에스페란토2024. 4. 11. 17:37

오늘 페이스북이 1년 전 2023년 4월 11일에 올린 글을 상기시켜 주면서 공유할 것을 제안했다. 내용인즉 필명 정문주의 실명이 허정숙이다. 독립운동가이자 사회주의자 허정숙이 쓴 에스페란토 글을 페이스북을 통해 지인들에게 알렸다. 하지만 기록용으로 사용하는 이 블로그에는 올리지 않았다. 1년 전 당시 차일피일 미루었을 것이다. 

1990년 헝가리 엘테대학교에서 에스페란토학을 전공할 때 부다페스트에 살고 있는 에스페란토 도서 및 정기간행물 등을 수집하는 퍼이시 카로이(Fajszi Károly)를 방문했다. 개인도서관으로 사용하는 그의 넓은 아파트에서 1938년과 1939년 홍콩에서 발행된 <Orienta Kuriero> 잡지에 실린 안우생(Elpin)의 글을 찾아냈다. 안우생(1907-1991)은 안중근의 동생 안공근의 장남이다. 

이후 여러 해를 거쳐 헝가리, 오스트리아, 네덜란드, 스페인 등지의 도서관에서 그의 글들을 직접 수집했다. 그 결과물이 2004년 한국에스페란협회가 발행한 《Verkoj de Elpin - 안우생 문집》이다. 이 책에 실린 작품수는 총 40편이다. 자작시 3편, 번역시 14편, 원작 단편소설 2편, 번역 단편소설 12편, 번역 극본 4편, 기타 5편이다.
[관련글: (안우생의) '에스페란토'로 항일을 노래하다 (한겨레 21 504호)]. 

당시 간행물에서 중국에서 활동하는 한국인 에스페란티스토로 추정되는 사람들의 글도 함께 복사했다. 코로나 시대 2020년 11월부터 리투아니아에서 살면서 매주 수요일 한국에 살고 있는 에스페란티스토들에게 안우생의 문학작품 공부를 줌(Zoom)으로 지도하는 중에 원문을 찾아볼 일이 종종 생겼다. 이때 보관하고 있던 자료들 사이에 임철애(Im Ĉol Aj)가 쓴 <La vivstato de koreaj virinoj>(조선 여성들의 생활상)가 우연히 눈이 띄었다. 이 글은 1938년 8월호 《Orienta Kuriero》에 게재되었다. 임철애라는 사람은 누구일까? 바로 독립운동가 박차정이다.
[관련글: 박차정 - 임철애가 쓴 에스페란토 글을 발굴하다

30여년 전 안우생 문집을 만들기 위해 자료를 수집하던 중 정문주(Ĝong Mun Ĝu)라는 이름의 기사(Studentoj en Koreo)가 있기에 한국인일 가능성이 아주 높아서 이 기사 또한 복사해서 보관해왔다. 수집 자료들을 살펴볼 때마다 정문주라는 사람이 누구일까라고 화두를 걸었는데 드디어 2023년 4월 11일 알게 되었다. 우연히 인터넷 자료 검색를 하던 중 허정숙의 필명이 정문주라는 사실이다. 

허정숙은 중국 하얼빈에서 활동했던 남자현처럼 남성들과 함께 해외의 전장을 누비며 독립운동과 사회주의 운동을 이어간 여전사가 되었다. 처음 남경으로 간 허정숙과 최창익은 김원봉이 속한 조선민족혁명당에 가입해 활동하다가 중국공산당 근거지인 화북의 연안지역으로 옮겨 활동했다. 1938년 최창익이 화북조선청년연합회(후일 화북조선독립동맹)을 결성해 본인은 대표, 허정숙이 부대표를 맡았다. 허정숙은 특기를 살려 중국에 체류할 당시 <조선민족전선>과 <민족전선> 등 잡지 발행을 돕고 정문주라는 필명으로 조선학생운동에 관한 글을 게재했다.
* 출처: https://graduate.yonsei.ac.kr/_res/ysinmun/etc/inmun122_2.pdf  저자: 신유리, 권경미

 

이어 또 따른 논문은 정문주가 허정숙이라는 것을 더욱 확신하게 했다.

1936년 조선을 떠나 남경에 도착한 허정숙은 ‘한국민족혁명당’에 가담하였다. ‘한국민족혁명당’은 약산 김원봉(1898-1958)의 의열단을 중심으로 중국 관내의 5개 단체가 결집한 통일전선당이었다. 1935년 7월 5일 결성된‘한국민족혁명당’에 허정숙을 비롯한 공산주의자들이 유입되자 당내의 우파들이 반발했다. 우파들이 대거 나간 이후 김원봉을 중심으로 주도권이 확립되면서 1937년 1월, ‘조선민족혁명당’으로 개칭하고, 1938년 10월 10일 군사조직으로 조선의용대를 설치했다. 조선민족혁명당은 조선민족전선연맹을 구성해 기관지 『조선민족전선』을 간행했는데, 허정숙은 정문주라는 가명으로 ‘조선학생운동’에 관한 논문을 싣기도 했다.
* 출처:  https://s-space.snu.ac.kr/bitstream/10371/170185/1/000000163110.pdf 저자:백숙현

 

<Orienta Kuriero> 1938년 7월호에 "Studentoj en Koreo" 글이 실렸고, 저자는 Ĝong Mun Ĝu다. 위 두 논문에 있는 내용과 일치한다.

    

1938년 7월호 <Orienta Kuriero>

허정숙이 정문주라는 필명으로 쓴 에스페란토 원문 기사다.

Studentoj en Koreo (조선에 있는 학생들) - Ĝong Mun Ĝu (정문주) 

 

허정숙 그리고 박차정 등의 에스페란티스토 활약으로 1937년 8월 25일 발행된 <Ĉinio hurlas>에 조선민족혁명당의 호소문 <Leviĝu Koreoj!>(조선인이여 일어나라!)라는 에스페란토 원문이 게재되었을 것이다. 일제강점기 특히 중국에서 활동하던 독립운동가들와 에스페란토는 아주 밀접한 관계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Orienta Kuriero>에 여러 차례 기고한 Kimkemo라는 필명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궁금하다. 인터넷 검색 덕분에 필명 임철애의 실명이 박차정, 필명 정문주의 실명이 허정숙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으니, 언젠가 당시 중국 에스페란토 잡지에 실린 한국인 에스페란티스토들의 실명이 다 밝혀지는 날이 오길 기대해본다.

 

L.Lujlang - "Labor-libro" por la koreaj laboristoj; Tagoj

Li Kung Se - Malliberigita Japanio

Kimkemo - Letero el Koreio; Pri nuntempa ĉina literaturo; La superakvego de la Flava Rivero

 

세계 공통어, 에스페란토

에스페란토는 자멘호프(1859~1917) 박사가 1887년 바르샤바에서 발표한 세계 공통어를 지향하는 국제어이다. 그가 태어난 폴란드 비아위스토크는 당시 여러 민족이 각기 다른 언어를 사용함으로써 의사소통이 어려워 민족간 불화와 갈등이 빈번했다. 이에 그는 모든 사람이 쉽게 배울 수 있는 중립적인 공통어를 만들어야겠다고 결심하고, 유럽 언어의 공통점과 장점을 활용해 규칙적인 문법과 쉬운 어휘를 기초로 에스페란토를 창안했다. 에스페란토는 말이 같은 민족사회에선 그 민족어를 사용해 발전시키고, 말이 서로 다른 국제관계에서는 에스페란토를 쓰자고 주장한다. 현재 120여개 나라에 사용자가 산재해 있고, 이들은 네덜란드 로테르담에 본부를 둔 세계에스페란토협회를 기점으로 광범위하게 활동하고 있다. 한국에서는 1920년 김억에 의해 보급되기 시작해 한국에스페란토협회와 주요 도시에 그 지부가 조직돼 있고, 서울에스페란토문화원은 매월 에스페란 토 강좌를 열고 있다. 도한 한국인이 개발한 <Memlingo>를 통해 인터넷으로도 쉽게 배울 수 있다

Posted by 초유스
에스페란토2021. 1. 16. 03:22

1990년 헝가리 엘테대학교에서 에스페란토학을 전공할 때 부다페스트에 살고 있는 에스페란토 도서 및 정기간행물 등을 수집하는 퍼이시 카로이를 방문했다. 그의 아파트에서 1938년과 1939년 홍콩에서 발행된 <Orienta Kuriero> 잡지에 실린 안우생(Elpin)의 글을 찾아냈다. 안우생(1907-1991)은 안중근의 동생 안공근의 장남이다. 
 
이후 여러 해를 거쳐 헝가리, 오스트리아, 네덜란드, 스페인 등지의 도서관에서 그의 글들을 직접 수집했다. 2004년 한국에스페란협회 《Verkoj de Elpin - 안우생 문집》을 발행했다. 이 책에 실린 작품수는 총 40편이다. 자작시 3편, 번역시 14편, 원작 단편소설 2편, 번역 단편소설 12편, 번역 극본 4편, 기타 5편이다[관련글: 안우생의 도연명 <도화원기> 에스페란토 번역본을 찾다]. 
 
당시 간행물에서 중국에서 활동하는 한국인 에스페란티스토로 추정되는 사람들의 글도 함께 복사했다. 지난해 11월부터 리투아니아에서 살면서 매주 수요일 한국에 살고 있는 에스페란티스토들에게 안우생의 문학작품 공부를 줌(Zoom)으로 지도하고 있다. 원문을 찾아볼 일이 생겨 30여년 전에 복사한 자료집을 꺼내서 종종 살펴보곤 한다. 
 
얼마 전에 임철애(Im Ĉol Aj)가 쓴 <La vivstato de koreaj virinoj>(조선 여성들의 생활상)가 우연히 눈이 띄었다. 이 글은 1938년 8월호 《Orienta Kuriero》에 게재되었다. 임철애라는 사람은 누구일까?
 
1938-1939년 홍콩에서 발행된 간행물 <Orienta Kuriero>
구글 검색을 통해 쉽게 알게 되었다. 바로 박차정(1910.05.07-1944.05.27) 의사가 중국에서 독립운동을 할 때 사용한 이명(異名) 중 하나가 바로 임철애(林哲愛 에스페란토 표기 Im Ĉol Aj)다. 그는 1910년 부산에서 태어나 1929년 근우회(일제 강점기에 조직된 여성 단체) 사건으로 옥고를 치르고 1930년 말 중국 북경으로 망명해 화북대학에서 수학했다. 
 

1938년 8월호에 게재된 임철애의 <조선 여성들의 생활상>

1931년 의열단 단장인 약산 김원봉과 결혼했다. 1935년 조선민족혁명당 부녀부 주임, 1938년 조선의용대 부녀복무단장으로 선임되었다. 1939년 2월 일본군을 상대로 전투를 하던 중 부상을 입고 그 후유증으로 1944년 충칭(중경)에서 사망했다. 
1945년 12월 박차정(임철애)의 유해가 국내로 송환되어 김원봉의 고향인 밀양 송산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관련글: 박차정 묘소 가는 길]. 그가 태어난 부산 동래에는 그의 생가가 2005년 복원되어 있다[관련글: 박차정 생가 가는 길].
 
또 다른 의미있는 글은 조선민족혁명당의 호소문 <Leviĝu Koreoj!>(조선인이여 일어나라!)다. 이 호소문은 1937년 8월 25일에 발행된 《Ĉinio hurlas》에 게재된 글로 번역문이 아니라 에스페란토 원문으로 되어 있다. 

 

중일전쟁 발발 직후 나온 조선민족혁명당의 에스페란토 원문 호소문
한편 1939년 9월 1일 발행된 《Heroldo de Ĉinio》 제5호에 실린 <Nova Korea Unueco kontraŭ Japana regado> 기사 중 김약산(김원봉)이 ‘Bomba Kim’로 알려져 있다는 것이다. 이는 그가 폭발물을 잘 다루는 데서 붙여졌다고 한다. 에스페란토로 bombo는 폭탄의 명사형이고 bomba는 폭탄의 형용사형이다.   
 
1939년 9월 1일 발행된 간행물에 김약산이 "Bomba Kim"으로도 알려져 있음을 언급
늦었지만 이제 박차정(임철애)은 독립운동가로서뿐만 아니라 에스페란티스토로서도 재조명되길 바란다. 특히 2022년 부산에서 열릴 아시아에스페란토대회 중 그의 생가를 방문하거나 일본침략에 맞서서 한국과 중국의 협력에 생을 마친 그의 삶을 조명하는 일도 의미가 있을 것이다.

임철애_박차정_조선민족혁명당.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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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초유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