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얘기2013. 10. 25. 08:57

월요일, 수요일, 목요일 학교에서 돌아온 작은딸에게 점심을 챙겨주고 음악학교로 보내는 일은 내가 맡은 일이다. 아내는 딸보다 몇 시간 전에 음악학교에 가야하기 때문이다. 출근하기 전 아내는 신신당부했다.

"제발, 딸에게 오늘은 일반학교 교복을 입지 말고 음악학교로 오라고 해."
"왜?"
"지금까지 계속 일반학교, 음악학교 가리지 않고 하루 종일 같은 교복만 입으니까 별로 안 좋잖아."
"알았어."

오후 2시에 집에 와야 할 딸은 3시가 돼도 오지 않았다. 빨리 오라고 하자 그제서야 친구집에서 왔다. 1시간 후에 음악학교로 가야 했다. 지금껏 딸아이는 음악학교에 가는 날엔 교복을 벗지 않는다. 그런데 어제는 아무 말도 미리 하지 않았는데 스스로 교복을 벗고 평상복으로 갈아입었다.

"오늘 교복 말고 다른 옷을 입고 음악학교에 오라고 엄마가 말했어."
"알았어."
"그런데 평상복을 입지 말고 음악학교에 갈 옷을 입으면 더 좋잖아."
"아직 또 다시 갈아입을 시간이 충분해. 아빠, 걱정하지마."

30분이 지난 후 아파트 입구에서 숫자 코드를 누르는 소리가 들렸다. 이 비밀번호를 아는 사람은 우리 식구외에 아주 가까운 친척 둘뿐이다. 이 시간에 올 수 있는 사람은 아무리 생각해봐도 아내뿐이었다. 학생이 오지 않아 잠시 집으로 온 듯했다.

"딸아, 엄마가 온 것 같으니 현관문을 열어줘라."

자기 방에 있던 작은딸은 아무런 인기척을 내지 않았다. 잠시 후 현관문이 열리고 한 사람이 들어왔다. 둘이서 서로 대화를 할 법한데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그리고 이내 손님이 내 앞에 나타났다. 그 손님은 다름아닌 영국에서 공부하고 있는 큰딸이었다.

어제 늦은 밤까지만 해도 교환학생으로 갈 미국에 있는 대학교에 대해 아내와 함께 서로 이야기를 나눴다. 깜짝 출현이 제일 좋은 선물 그 자체였다. 작은딸은 이미 한 달 전에 언니가 올 것을 알고 있었다고 했다. 그래서 오늘 학교에 돌아오자마자 평상복으로 갈아입고 언니를 기다렸던 것이다. 입이 근질근질해서 그 동안 어떻게 참았는지 모를 일이다. 그 인내심에 고개가 숙여질 정도이다.

"벌써 음악학교에 갈 시간이다. 빨리 가야지."
"언니가 왔는데 어떻게 내가 학교에 갈 수가 있나? 아빠는 생각을 좀 해라. 노래 선생님에게  오늘 결석한다고 어제 쪽지 보냈어."
"뭐라고?"
"오늘 언니가 집에 오는데 갈 수가 없다고. 엄마를 놀래려고 하니 만약 엄마가 선생님에게 전화하면 내가 머리 아파서 수업에 못 온다고 꼭 전해달라고."  
"그래?! 언니가 무슨 선물했니?"
"안 물어봤어. 안 물을 거야. 선물을 하든 안 하든 상관없이 난 언니를 사랑해."
"그래, 그런 마음이 중요하다."

이제 남은 과제는 아내를 놀래는 일이다. 딸 둘은 엄마의 표정을 담기 위해 동영상 촬영을 위해 카메라까지 방에 설치했다. 큰딸이 부엌에 있을까, 아니면 작은딸 방에 있을까 둘이서 상의하더니 연출하기에 편한 작은딸 방을 선택했다. 퇴근해서 집에 막 도착한 엄마를 어떻게 제일 먼저 방으로 유인할 방법을 작은딸이 궁리했다.

엄마가 직장 동료인 노래 선생님에게 작은딸이 수업에 참가할 수 없다고 전화하자 선생님은 태연하게 웃으면서 이미 알고 있다고 답했다.

드디어 아내가 돌아오는 소리가 들렸다. 내가 맡은 일은 카메라를 작동하고 살짝 빠지는 것이었다. 작은딸이 현관문에서 엄마를 맞았다. 곧장 욕실에 가 손을 씻으려는 엄마를 가로막았다.

"엄마,  이제 내 머리가 안 아파. 그런데 내 방에 옷장이 넘어져 방이 엉망진창이야. 빨리 한번 보고 도와줘야 돼. 내가 할 수 없어."


이렇게 작은딸 방으로 들어가자마자 아내는 기쁨의 충격으로 순간적으로 돌이 되어 버렸다. 어젯밤까지 이번 짧은 방학에는 비행기표 구하기가 어려워서 빌뉴스 집으로 오지 못하겠다고 한 딸이 눈 앞에 앉아 있었기 때문이다. 아내 기뻐서 그만 눈물까지 흘렸다. 


언니 사랑에 푹 빠져 음악학교에 가지 않은 작은딸의 꾀병도 쉽게 이해가 되었고, 모두에게 순간 엔돌핀이 팍팍 치솟았다. 큰딸의 예고없는 깜짝 방문으로 끈끈한 가족애를 식구 모두가 다시 한번 느끼게 되었다.

Posted by 초유스
요가일래2012. 10. 9. 04:52

가을이다. 아침부터 내리는 비는 초딩 5학년생 딸이 수업을 마칠 때까지 그칠 줄 몰랐다. 여름철이라면 한바탕 비가 쏴 내리다가도 이내 해가 방긋한다. 굵직하게 내리는 비를 창문 밖으로 보면서 전화가 올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어린 시절 이런 경우 종종 누나나 형이 우산을 들고 학교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바로 전화 소리가 울렸다.

"아빠, 비가 와."
"알았어. 학교 건물 안에서 기다리고 있어. 아빠가 우산 가지고 금방 갈게."

이렇게 해서 800미터 떨어진 초등학교로 향했다. 학교 현관문 창문으로 보니 딸아이가 친구들과 재잘거리면서 놀고 있었다. 한참을 방관자처럼 지켜보았다. 아빠와 눈이 마주친 후에야 딸아이는 밖으로 나왔다.

"이제 비가 거의 안 오네. 아빠가 올 필요가 없어졌네."
"그래도 아빠가 올 땐 비가 많이 내렸지. 가방 이리 줘. 내가 들고 갈게."
"안 돼. 내가 들어야 돼."
"가방이 너무 무겁다. 아빠가 들고 간다!"
"아빠, 우기지 마. 내가 학생이야!"

이런 선택에서는 누군가 양보해야 한다. "내가 학생이야!"라는 말에 부녀(父女)의 실랑이는 끝났다.

아빠의 믿음직한 존재를 딸에게 보여줄 수 있는 기회였는데 "맞아. 군인은 총, 기자는 펜, 학생은 책가방을 들어야지!"라고 마음 속으로 생각하면 집으로 향했다.


그친 듯한 비가 다시 굵어지기 시작했다.

"봐, 아빠가 오길 잘 했지?"
"고마워."

아무리 생각해도 딸아이의 가방이 무거워 보였다.

"집에 가서 네 책가방이 얼마나 무거운 지 한번 무게를 재어봐야겠다."

* 책가방를 메고 잰 무게(왼쪽), 책가방 없이 잰 무게(오른쪽): 책가방 무게는 4kg
 
이 말이 떨어지자마자 딸아이는 정말 자신의 책가방이 무거운 지를 알았다는 듯이 책가방을 아빠에게 건네주었다. 

"아빠, 무거워?"
"아니, 괜찮아."

책가방을 멘 한 쪽 어깨가 축 쳐지는 듯했지만 대답은 그렇게 했다. 비 덕분에 모처럼 아빠와 딸이 정을 나누는 순간이었다.

Posted by 초유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