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가일래2020. 5. 6. 05:01

북유럽 리투아니아에 살고 있는 요가일래는 일반학교를 다니면서 음악학교 8년 과정을 마쳤다. 음악학교는 일반학교 수업 후 일주일 3일 다닌다. 동시에 두 학교를 다니느라 또래 아이들보다 자유로운 시간이 적었는데도 곧 이어서 미술학교를 다니고 싶어했다.

미술학교는 4년 과정이고 입학시험을 거쳐야 한다. 대체로 1년 예비과정을 다닌 후 입학시험을 치고 들어간다. 다행히 예비과정 없이 합격해서 입학했다. 초반기에는 미술 역사 등을 비롯해 미술의 다양한 분야를 두루 다 배운다.

미술학교 졸업학년에 다닐 때 어느 날 요가일래는 어린 시절 한국의 고향집 사진과 리투아니아어 배울 때 사용한 책이나 연습책을 보여 달라고 했다.

"왜 그런 것이 필요해?"
"그냥 한번 궁금해서 보여 달라고 했어."
"한번 찾아볼게."

앨범을 뒤져 어린 시절 고향집 사진 한 장 그리고 20년 전 리투아니아어를 공부할 때 사용한 연습책을 찾았다. 그 연습책에는 연필로 쓴 내 글씨가 선명하게 남아 있다.

"자, 여기 있다."
"우와, 정말 오랜 된 것이다. 내가 잠시 빌려갔다가 돌려줄게"

그렇게 두 물건을 한동안 잊고 있었다. 드디어 지난해 5월 미술학교에서 졸업전시회가 열렸다. 당시 발트 3국을 돌아다니면서 한국인 관광객들을 안내하느라 요가일래 졸업전시회에 가볼 시간이 없었다. 나중에 전시회가 끝나고 집으로 가져온 작품을 보고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왜일까?
졸업작품의 동기(모티브, motive)가 이유를 설명하지 않고 그냥 궁금하다면서 빌려간 것이기 때문이다. 요가일래 전공은 리놀륨 판화(리노컷 리노판화 linocut, linoleum etching)다.


 요가일래의 판화 전시품은 모두 여섯 점이다.


아래 사진 왼쪽 하단에 있는 것이 작품의 동기를 암시하는 것이다.  


이는 2002년 빌뉴스대학교에서 리투아니아어를 배울 때 사용한 연습책의 일부다.  


요가일래는 아빠가 쓴 "AR?..."가 마음에 들어서 이것을 그대로 작품으로 만들어내었다. AR는 "까?"의 의미를 지니고 있는 리투아니아어 의문사다.  


리투아니아어 수업 시간에 "한국에는 저수지와 호수도 많이 있다"라는 아빠의 한국 소개글에서 착안해서 "저수지와 호수"라는 작품을 만들었다.    


이어서 "한국에는 사계절이 있다"라는 아빠의 한국 소개글에서 착안해서 아래 작품을 만들었다. 겨울은 -, 봄은 ~+, 여름은 +, 가을은 ~- 그리고 순환은 원으로 표현했다. 


여름과 겨울로 변해가는 중간과정에 있는 봄과 가을을 표시하기 위해 ~(물결, 흐름)을 사용한 것이 인상적이다. 이 작품명은 "봄"이다.       


아빠가 쓴 글씨 중에 "Kur?"가 마음에 들어서 아래 작품을 만들었다고 한다. 글씨뿐만 아니라 의미가 깊다고 한다. 리투아니아어 "kur"는 문장에 따라서 "어디서, 어디에, 어디로"라는 뜻을 모두 다 담고 있다. 

이 작품을 보고 있으니 "인생은 어디서 와서 어디에 있다가 어디로 가는가"라는 본질적인 물음이 절로 떠오른다. 확실한 물음의 밝은 흰색과 불확실한 대답의 어두운 검은색이 잘 어울린다.  


"한국의 지형은 북쪽(š)과 동쪽(r)에 산이 많고 남쪽(p)과 서(v)쪽에는 평야가 많다"라는 아빠의 한국 소개글에서 착안해서 아래 작품을 만들었다. 산은 곡선으로 평야는 직선으로 표현했다. 


한국에서 어릴 적 살던 아빠의 시골집이다.  


찍어 놓은 사진으로밖에 졸업전시회 분위기를 느낄 수 있는 것이 몹시 아쉽다. 아무런 이유를 설명하지 않고 가져간 아빠의 오래된 물건에서 착안해서 졸업작품을 만들 생각을 하다니... 특히 자기의 근원 중 하나인 한국을 아빠가 리투아니아로 작문한 글에서 착안해서 이를 작품화한 것은 아빠에겐 크나큰 선물이자 감동 그 자체이다.

"아빠의 글씨와 한국소개를 졸업작품화해줘서 고마워~~~"
"미술학교에 보내준 것에 내가 고마워 해야지."
Posted by 초유스
생활얘기2013. 6. 25. 13:25

얼마 전 리투아니아 주요 도시 광장에서 주말에 10대 후반의 남녀 학생들이 정장을 입은 채 즐기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고등학교 졸업 시험을 마친 후 학창시절 마감을 자축하는 행사이다. 7월에는 리투아니아 전역에서 고등학교 졸업식이 열린다.



한 때 졸업 선물로 각광을 받은 것이 앨범이다. 이 앨범에 추억의 아날로그 필름 사진들을 현상해 담을 수 있다. 그런데 지금은 디지털 시대이다. 그래서 앨범 선물은 구식이 되어버렸다.

최근 누리꾼들 사이에 할머니가 졸업 선물로 준 앨범이 화제를 끌고 있다. 
왜 일까? 
아날로그 선물 속에 담긴 할머니의 디지털 아이디어 때문이다. [사진출처 image source link]


돈은 역시 아날로그나 디지털을 떠나서 모든 시대에 두루 통하는 받는 이를 기쁘게 하는 좋은 선물이다.

Posted by 초유스
생활얘기2011. 9. 30. 07:53

지난 7월 고등학교를 졸업한 큰 딸 마르티나는 최근 영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마르티나 방을 작은 딸 요가일래가 이제부터 사용하게 되었다. 이번 주 내내 마르티나가 남겨놓은 책, 서류, 사진, 옷 등을 정리했다. 

사진을 정리하면서 마르티나의 학급사진이 눈에 띄었다. 한국은 초등학교 졸업앨범, 중학교 졸업앨범, 고등학교 졸업앨범이 있다. 리투아니아는 따로 앨범이 없고, 사진만 있다.

특히 학년을 마칠 때마다 학급이 기념 사진을 찍는다. 12년 학교생활이니 사진이 12장이다. 마르티나의 학급사진을 찾아서 정리해보니 10장뿐이었다. 2장(초등학교 2학년과 고등학교 2학년 사진)을 찾지 못해 아쉽다.  

초등학교 3학년 때 빌뉴스로 전학와서 12학년을 마쳤다. 처음 만난 학급친구들과 9년을 함께 학교생활을 했지만, 대부분은 12년을 함께 같은 학급에서 보냈다. 성장 과정을 고스란히 서로 지켜보면서 자랐다.  

1. 1999년-2000년 (초등학교 1학년)

2. 2001년-2002년 (초등학교 3학년)

3. 2002년-2003년 (초등학교 4학년)

4. 2003년-2004년 (초등학교 5학년)

5. 2004년-2005년 (초등학교 6학년)

6. 2005년-2006년 (중학교 1학년)

7. 2006년-2007년 (중학교 2학년)

8. 2007년-2008년 (중학교 3학년)

9. 2008년-2009년 (고등학교 1학년)

10. 2010년-2011년 (고등학교 3학년)

학년마다 찍은 이 학급사진을 보고 있으면, 12년의 학교생활이 그대로 총정리가 되는 듯하다. 

 
Posted by 초유스
요가일래2011. 9. 23. 05:55

큰 딸 마르티나는 지난 7월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외할머니는 그 동안 고등학교 졸업할 때 주려고 적금을 들어놓았다. 이 적금(리투아니아 돈으로 2000리타스, 약 1백만원)을 타서 졸업 축하금으로 주었다. 이 돈으로 무엇을 할까 큰 고민없이 마르티나는 미국가는 비행기표를 샀다. 금액이 조금 부족하기에 사용하고 있던 노트북까지 팔았다. 

"외할머니가 한 푼 두 푼 모아 선물한 것인데 좀 더 건설적으로 사용하면 안 되겠니?"
"내 꿈은 미국 한 번 가보는 것이다. 이것이 지금 나에겐 최고의 선택이다."

대학생이 되면 유용하게 쓸 데가 많을 것 같은데 미국 가는 비행기표에 홀랑 다써버린다는 것이 부모 입장에서는 많이 아쉬웠다. 하지만 성년이니 부모 의견을 강요할 수 없는 것이다. 외할머니가 졸업 선물로 거액을 주었으니 부모가 그냥 있을 수는 없는 노롯이었다. 그래서 졸업 축하금으로 미국 여행경비를 대기로 했다.

이렇게 보스톤, 뉴욕, 워싱턴, 나이가라 등지를 2달 동안 여행하다가 어제 마르티나가 집으로 돌아왔다.

"미국 어때?"
"집이 최고야. 그곳에 살고 싶지는 않아. 가는 곳마다 걸인에다 이상한 사람들이 많고 냄새나고, 몇 번 속임수도 당했어. 빌뉴스가 조용하고 깨끗하고 참 살기 좋다는 것을 느꼈어."
"미국 대도시에는 그럴 수 있지만 지방에는 빌뉴스보다 좋은 데가 많을 거야. 미국 간 것 후회 안 돼?"
"후회는 안 돼. 이번 한 번으로 만족한다."



마르티나가 돌아오자 제일 반가워하는 사람은 바로 요가일래였다. 학교에서 돌아온 요가일래는 숙제를 마치자마자 언니를 환영할 그림을 그렸다. 어렸을 때에는 하루에도 여러 장씩 그림을 그리더니 요즘 통 그림을 그리지 않았다.  그림도 자꾸 그려봐야 내공이 생기는 법인데 말이다.

무슨 그림을 그렸을까 궁금했다. 언니가 집으로 오자 공개한 그림이 바로 아래 그림이다.
"Hi!"
"Miss you!"
"Labas!"  
"Muliu!"
"Love you!"


철자 'i'와 느낌표"!" 대칭이 눈길을 끈다. 이제 오는 일요일 언니 마르티나는 영국 유학을 위해 집을 떠난다. 둘 사이의 작별 충격이 커지 않기를 바란다.


Posted by 초유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