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여행2019. 11. 20. 06:08

10월 하순 지중해 몰타로 가족여행을 다녀왔다. 아인투피하 해수욕장에서 비를 맞은 후 점심 무렵에 숙소로 돌아온다. 비 덕분에 숙소에서 점심을 해먹게 된다. 오후가 되자 조금씩 날씨가 맑아진다.   

아직 빗물이 남아 있는 발코니에 날아든 개미가 허위적거린다. 더 살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는 저 개미들을 어찌할꼬? 부엌으로 가서 라면 젓가락을 가져와 건져 주니 날아간다.



점심 후 원형 성당으로 유명한 인근 모스타(Mosta)로 향한다. 몰타섬 북서부 내륙에 위치한 모스타는 인구 2만명 도시다. 거리를 구경하기 위해 중심가에서 벗어난 버스 정류장에서 미리 내린다. 도로도 좁고 인도도 좁다. 가로수도 없는 거리에서 더욱 돋보이는 건물 한 채가 눈에 확 띈다. 2층 창문과 지붕에 화초가 무성히 자라고 있다.


도심에 있는 원형 성당 앞 작은 공원이다. 몇 해 전 영국 런던에서 본 것과 같은 붉은색 공중전화 부스는 몰타와 영국과의 관계를 쉽게 떠올리게 한다. 몰타는 1800년에서 1964년까지 영국 지배를 받았고 지금도 영연방에 속해 있다.  


그 유명하다는 로마 가톨릭교 원형 성당이 늦은 오후의 햇살을 받아 더욱 황금색으로 빛나고 있다. 정식 이름은 성모 승천 성당(Basilica of the Assumption of Our Lady)이다. 모스타 로툰다(Rotunda of Mosta) 혹은 모스타 돔(Mosta Dome)이라고도 불린다. 이 성당은 유럽에서 로마 베드로 성당과 런던 바울 성당에 이어서 유럽에서 세 번째로 큰 둥근 천장(돔)을 가지고 있다. 성당 규모를 살펴보면 외부 지름이 54.86미터, 정면에서 후면까지 길이가 74.37미터, 벽두께가 8.28미터, 바닥에서 천장 전등까지 높이가 56.38미터다. 


모스타 인구가 늘자 1833년부터 새로운 성당을 짓게 되었다. 기존 성당을 그대로 사용하면서 그 둘레에 이 원형 성당을 지은 것이 참으로 특이하다. 28년에 걸쳐 새로운 성당이 완공될 무렵 1860년 기존 성당을 철거했다. 로마 가톨릭교에서 아주 중요한 세계성체대회가 1913년 이곳에서 열렸다.       


성당 앞에는 낯익은 동상이 보인다. 천국의 열쇠를 잡고 있는 베드로(왼쪽)와 책과 (부서져 일부만 남은) 검을 잡고 있는 바울(오른쪽)이다. 


성당 정면 벽에는 사도 네 명의 조각상이 세워져 있다.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설명하자면 가죽을 벗기는 칼을 잡고 있는 바르톨로메오, 긴 곤봉을 잡고 있는 야고보(소야고보, 알패오의 아들), 라틴 십자가(아래쪽이 위쪽에 비해 길쭉한 장축형 십자가)을 잡고 있는 필립보 그리고 어린 천사를 옆에 두고 있는 마태오다. 


성당 앞을 둘러보고 있는 동안 작은딸이 자기 용돈으로 가족 네 명 입장권(1인당 2유로)을 구입해 들어오라고 한다. 아주 넓은 성당 안에 때마침 장례 미사가 열리고 있다. 우리도 조용히 앉아 기도에 동참한다. 장례식 끝무렵 팝송 "You raise me up"이 울려펴진다. 



첫째는 넓은 공간에 감탄한다. 둘째는 하늘색 벽과 벽화에 감탄한다. 그리고 셋째는 금색 무늬를 한 둥근 천장에 감탄한다. 성당 내부에 지붕을 받쳐 주는 기둥이 전무하다. 천장 내부 지름이 35.97미터다. 외부 높이는 59.74미터이고 내부 높이는 성당 외부 지름과 같은 54.86미터다.


1유로를 넣고 촛불을 켜고 기도한다.


의자 여섯 개를 일렬로 함께 묶여 놓았다. 미사 중 의자가 삐걱거리는 소리를 막을 수 있어서 좋을 듯하다.


성당 가운데 제단이 보인다. 


이 제단 그림은 성모가 승천하는 모습을 담고 있다. 1678년 몰타의 바로크 화가 스테파노 에라르디(Stefano Erardi 1630-1716)가 그린 것으로 알려져 있다.  


강대가 인상적이다. 강대 혹은 설교단은 설교 등을 위해 만들어진 단이다. 보통 성당 중앙칸 벽면에 붙어 있거나 가까이에 있다. 그런데 여기는 원형 성당이라서 그런지 따로 마련되어 있다.  


조개 껍질에 물을 담아 세례하는 모습이다. 이 조각상을 보고 있으니 기독교에서 조개 껍질이 세례를 상징한다는 말이 쉽게 기억된다.  


성당 안에 왜 머리에 뿔이 두 개 달린 조각상이 있을까? 미켈란젤로의 모세 조각품이 떠오른다. 뿔 달린 모세다. 미켈란제로는 성경에 근거해 뿔을 넣어 조각했는데 이는 히브리어의 '빛을 뿜다, 광채가 나다'를 잘못 해석한 것이라고 한다.


성모승천상은 1868년 처음 조각되었고 1947년 완전히 새로 만들어진 것이다.   



성당 내부 관람 중 안내표시판은 자꾸 폭탄 박물관을 가르킨다. 성당에 웬 폭탄 박물관이 있을까? 궁금증이 생긴다. 내용인즉 이렇다. 몰타는 군사적 요충지다. 제2차 대전에서 몰타 공방전은 널리 알려져 있다. 영국이 포함된 연합국 군대와 독일과 이탈리아가 포함된 추축국 군대가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1942년 4월 9일 16시 40분 독일 전투기들이 폭탄을 투하했다. 


폭탄 3개가 성당으로 떨어졌다. 이 중 500kg 폭탄 한 개가 천장을 뚫고 성당 가운데 바닥으로 떨어졌다. 당시 성당 안에서는 300명 이상의 사람들이 모여 저녁 미사를 기다리고 있었다. 다행히 폭탄은 폭발하지 않았다. 성당 옆에 떨어진 폭탄 두 개도 불발탄으로 남았다. "1942년 4월 9일 폭탄 기적"이 일어났다. 성당에 있던 사람들 중 사상자가 한 명도 없었다. 불발탄은 해체되고 몰타섬 서해안 바다에 버려졌다. 현재 전시되어 있는 폭탄은 복제품이다. 


아직 날이 밝기에 모스타 도심 거리를 돌아다녀 본다. 역시 여기도 누런색 석회석 건물이 대부분이다. 


건물벽 주로 현관문 옆에 붙어 있는 성물(聖物)은 경건함을 자아낸다[관련글:  몰타 거리 산책에서 색다른 재미를 느끼다].


왕복 각각 1차선이다. 도로변 인도에 자리잡은 주유소 풍경이 몹시 낯설다. 어느 나라에서는 안전상 이유로 허가를 받을 수 없을 텐데 말이다. 도시공간 구조상 어쩔 수 없을 수도 있겠다.


시간이 지나니 배가 출출하다. 아내는 몰타에 와서 꼭 먹어봐야 할 음식 중 하나를 먹어보자고 한다. 바로 파스티찌(pastizzi)다. 


모스타 제과점에서 1개당 50센트다. 치즈나 으깬 고기나 완두콩 등이 안에 들어 있다. 나는 완두콩 파스티찌를 고른다. 바삭바삭하고 아주 고소하다. 이렇게 맛있는 것을 식구당 하나씩만 사 준 아내가 약간 원망스러워진다. 이거 먹으러 다시 몰타에 가보고 싶은 충동심이 일어난다.

이상은 초유스 몰타 가족여행기 10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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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얘기2015. 2. 24. 06:53

한국에서 가서 가장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이냐라는 질문에 가장 먼저 떠오르는 답은 등산이다. 내가 살고 있는 리투아니아에서 가장 높은 산은 해발 300미터도 채 되지 않는다. 여기 사람들에겐 산이지만 1000여미터의 산을 보고 자란 나에게는 산이 아닌 셈이다. 한국에는 흔한 등산화는 여기는 없다.

서울에 머무는 동안 한 지인이 자락길 산책을 제안했다. 두 말 하지 않고 합류하기로 했다. 이렇게 내 생애 처음으로 자락길 산책에 나섰다. 목표는 서울 안산 자락길이다. 독립문 지하철에서 시작했다. 이 자락길은 총 7킬로미터에 이른다.  
 


자락길 밑에서 바라본 안산 정상 모습이다. 



자락길 입구에 도착하기 전에 재개발 지역이라서 그런지 이런 빈집들이 있다. 더 이상 집을 짓지 말고 그냥 자연으로 원상회복을 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눈길이나 얼음길에 산책하는 시민을 배려하는 정성이 담겨져 있다. 




이디 이뿐인가! 따뜻한 날 정자에 앉아 책을 읽을 수 있도록 책장까지 마련되어 있다. 




리투아니아에서는 보기 드문 까치도 이날 만났다. 반가운 손님이 오는 것이 아니라 난생 처음 자락길 산책하러온 유럽 손님을 환영하러 나온 듯하다. 



리기다소나무 한 그루가 산책길을 막아서고 있다. 베어내지 않고 이렇게 자연스럽게 놓아둔 것이 바로 친자연 자락길임을 잘 말해주고 있다. 이 막아섬은 산책객을 막아서는 것이 아니라 개발시 인간의 환경파괴심을 막아서는 것을 웅변하는 듯하다



하늘을 향해 쭉 뻗어있는 메타세콰이어가 하늘 기운을 받아서 산책객에게 전해주는 듯하다.



운동기구들도 잘 갖춰져 있다. 



목재로 길을 만들어놓았다. 사치 같아서 예산낭비로 보이는 듯했다. 그런데 그 순간 오른쪽 빙판길을 걷는 사람이 있었다. 그가 철망을 잡고 걷는데도 여러 번 미끄러지는 모습을 보고서야 이렇게 해놓길 참 잘했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락길따라 산책하면서 사방에 보이는 서울의 모습이다. 아파트 단지 저 뒷편에 북한산이 보인다.



남서쪽이다. 뿌여서 제대로 전경을 즐길 수 없는 것이 아쉽다.



맞은편 인왕산과 청와대,백악산이 보인다.  



여기는 서대문 형무소이다.



안산 자락길을 3시간 정도 다 둘러보고 마지막으로 도착한 곳이 서대문 형무소이다. 지난 역사를 되새겨보기 위해 역사관 안으로 들어갔다.



"한국 황제 폐하는 한국 전부에 관한 일체 통치권을 완전차 영구히 일본국 황제폐하에게 양여함에" 피가 끓어올랐다.



고초 겪었던 애국지사들의 수형기록표가 붙여져 있다. 



이번 방문에서 애국지사에 붙는 의사, 열사, 지사 단어의 뜻을 명확하게 알게 되었다. 의사는 무력으로 결행, 열사는 맨몸으로 투쟁, 지사는 항거하는 사람이다.  



외국에 살면 태극기만 봐도 웬지 가슴이 뭉클해지고 머리카락이 쭈삣쭈삣 선다. 



산책길을 마치고 인근 식당에서 어린 시절 즐겨먹었던 수제비를 주문해 맛있게 먹었다.



이렇게 생애 처음 자락길 산책은 끝이 났다. 경제수치뿐만 아니라 이런 사회시설물에서 한국이 잘 산다는 것을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되었다. 진달래 피는 봄날 다시 한번 가보고 싶다. 내년 봄에 가족과 함께 한국 방문을 계획하고 있는데 그때 이 안산 자락길을 다시 걷기를 바란다.
Posted by 초유스
기사모음2014. 11. 10. 09:24

10월 23일과 24일 가족과 함께 바로셀로나를 방문했다. 바로셀로나는 스페인 카탈루냐주의 수도이다. 마드리드에 이어 스페인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이다. 피카소, 가우디 등 많은 예술가를 배출한 도시로 유명하고, 지중해와 연해 있고, 연중 내내 관광객들이 찾아온다. 

이날 카탈루냐 광장을 시작으로 고딕 건물이 즐비한 좁은 골목길을 따라 1888년 바르셀로나 세계박람회 출입문 개선문, 1882년 착공해 아직도 짓고 있는 사그라다 파밀리아(성가족 성당), 여전히 해수욕과 일광욕을 즐기는 사람들로 붐비는 해변,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를 기리는 60미터 높이의 기념탑 등을 구경하면서 아침부터 오후 늦게까지 시내 중심가를 도보로 걸어다녔다.

이번 방문에서 무엇보다도 인상 깊게 다가온 것은 바로 건물 외벽에 수없이 걸려있는 카탈루냐 깃발이었다. 곧 있을 스페인으로부터 독립을 묻는 주민투표를 향한 이들의 열기를 쉽게 느낄 수 있었다. 


이 체감의 절정은 카탈루냐주 해군 사령부(Sector Naval de Cataluna) 건물에서 일어났다. 사령부 건물 옥상에는 스페인 국기가 바람에 휘날리고 있었다. 한 관광객이 이 건물을 사진 찍는 모습이 시선을 끌었다.

'혹시 저 사람이 마지막 역사적 장면을 찍고 있는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번쩍 들었다. 정말 카탈루냐가 독립한다면 옥상에는 지금의 스페인 국기 대신에 카탈루냐 국기가 달릴 것이기 때문이다.



어제 11월 9일 스페인 중앙정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카탈루냐주는 비공식 분리독립에 대한 주민투표를 실시했다. 카탈루냐는 1714년 스페인에 병합되었지만, 역사, 문화, 언어가 스페인과 달라서 줄곧 독립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이어져왔다.

주민투표의 질문은 두 가지였다. 
1. 카탈루냐가 국가가 되기를 원하는가?
2. 그 국가가 독립적이길 원하는가?
총 2,043,226명이 투표에 참가해 1,649,239(80.7%)명이 두 질문에 "예"라고 답했다. 단지 4.5%만이 질문 두 가지에 "아니오"라고 답했다. 

위와 같이 절대적으로 카탈루냐는 독립국이 되고자 하지만, 스페인 중앙정부의 반대가 워낙 확고하고, 또한 이해관계로 스페인 중앙정부를 지지하는 외국과 국제기구들로 인해 과연 카탈루냐가 진정한 독립국가를 이루어낼 지는 미지수이다.


신대륙을 가르키는 콜럼버스의 저 손가락 언어가 "카탈루냐는 스페인에 계속 남아있어야 돼!" 혹은 "그래, 카탈루냐는 독립해야 돼" 중 어느 것으로 최종 해석될 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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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상모음2013. 5. 4. 12:10

유럽 누리꾼들 사이에 화제가 된 역사 영상이다. 1000년부터 2000년까지 유럽 역사 지도를 일목요연하게 영상으로 정리해 놓았다. 200년 단위로 정지 화면을 잡아서 큰 줄기만 한번 살펴보자.   

 1000년: 이슬람 스페인, 프랑스, 로마 제국, 폴란드, 헝가리, 불가리아, 비잔티움 제국, 키예프 루시 등이 눈에 띈다.

 1200년: 이슬람 스페인이 작아지고, 프랑스, 로마 제국, 폴란드, 헝가리, 불가리아, 키예프 루스 등이 눈에 띈다. 한편 비잔티움 제국이 사라졌다.  

 1400년: 카스티야 왕국, 프랑스, 헝가리, 폴란드-리투아니아, 오스만 제국, 킵차크 칸국이 눈에 띈다. 키예프 루시가 사라지고, 그 자리에 폴란드-리투아니아와 몽골 세력인 킵차크 칸국이 들어선다. 리투아니아 대공국은 몽골 세력의 서방 진출을 막아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1600년: 스페인, 프랑스, 폴란드-리투아니아, 오스만 제국, 러시아. 러시아가 거대한 세력으로 등장해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광활한 옛 영토를 차지하고 있다. 

 1800년: 스페인, 프랑스, 영국, 프로이센, 오스트리아-헝가리, 오스만 제국, 러시아 제국이 눈에 띈다. 1300년대부터 700년대 말까지 동유럽의 넓은 영토를 차지했던 폴란드-리투아니아가 지도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2000년: 지금의 유럽 모습이다. 수많은 공국으로 갈라져 있던 독일이 하나로 되었다. 동유럽에서는 루마니아, 벨라루스, 우크라이나가 넓은 영토를 차지하고 새롭게 유럽 역사에 등장했다.
 


이 영상 덕분에 비록 주마간산격이지만 유럽의 1000년 역사를 쉽게 엿볼 수 있다. 200년 단위로 살펴보면서 매번 큰 변화가 있었다. 지금부터 200년 후 유럽의 모습은 어떠할까? 유럽 연합이 더 확대되어 큰 전쟁과 갈등이 사라진 평화스러운 세상이 구현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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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모음2011. 9. 29. 07:03

옛 사진이다. 객실을 갖춘 마차가 바다로 들어간다. 해변 가까운 바다에는 마차가 일렬로 서 있다. 도대체 왜 마차는 바다로 들어가는 것일까? [사진출처 image source link]
 

까닭은 해수욕을 하기 위해서이다. 18세기-19세기 유럽에서 유행했던 해수욕법이다. 지금이야 남녀노소가 해변에 진을 치고 해수욕하지만 당시의 품위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해수욕을 하기 위해 객실 마차가 바다로 들어가는 것은 이제 완전히 사라진 역사의 옛 풍경이다. 누드촌 해수욕장은 당시로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일이었을 것이다.
 
* 최근글: 주차시 차문 흠집 불안 한방에 해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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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상모음2009. 5. 18. 08:39

폴란드 북동지방 푼스크는 구릉지와 호수 등으로 어우러진 아름다운 경관으로 유명하다. 최근 이곳에 고대 프러시아인들의 거주지가 재현되어 화제를 모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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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프러시아인들은 지금의 리투아니아 네무나스 강과 폴란드의 비스와 강 사이에 살았던 민족으로 발트인에 속한다. 이들은 13세기 독일 기사단에 예속되었다. 1511년 독일 기사단령은 프로이센 공국으로 되었고, 호엔촐레른가(家)가 지배하게 되었다. 이후 이 지역은 프로이센 왕국에 속하다가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폴란드, 러시아, 리투아니아로 나눠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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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거주지를 재현해낸 사람은 페트라스 루코쉐비츄스(아래 첫 번째 사진)이다. 그는 역사학자와 고고학자들의 자문을 얻어 13세기 건축물 등을 10여년에 걸쳐 손수 짓고 있다. 이곳에는 벌써 성채, 다리, 울타리, 망루, 주택 등이 세워져 있다. 고대 프러시아 거주지를 이렇게 재현함으로써 그는 사라진 과거 역사를 다음세대 사람들에게 전하고자 한다. 특히 대문에 도끼 4개를 묶어 동서남북을 표시한((아래 두 번째 사진)) 것이 인상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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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특히 목조건물을 짓는데 쇠로 된 못을 쓰지 않고, 또한 건축자재인 목재는 영하 10도 이상인 겨울날에만 톱으로 자르는 등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고 있다. 이렇게 수백 년이 지난 후에야 한 개인의 의지와 노력으로 고대 프러시아 삶의 터전이 되살아난 것에 대해 깊은 감명을 받았다. 이런 사람들이 있기에 지나간 역사도 이렇게 다시 빛을 발할 수가 있음은 확인하게 되었다. 고대 프러시아 거주지 재현 현장을 아래 영상에 담아보았다.



* 관련글: 술마신 후 빵냄새를 맡는 까닭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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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모음2008. 12. 9. 18:20

폴란드 역사를 읽으면서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을 알았다. 바로 폴란드 국왕에 관한 것이다.
 
우리나라는 왕권이 세습되어 왔지만, 폴란드에는 귀족들이 자기들의 이해관계, 국내 정세 그리고 외세에 따라 폴란드인뿐만 아니라 외국인도 국왕으로 선출했다. 하지만 이렇게 수입된(?) 왕들 중에는 폴란드 역사에 큰 공헌을 한 왕들도 많았다.
 
폴란드 역사는 10세기부터 시작된다. 폴란드 최초 왕은 미에쉬코 1세(960?-992)로 그는 천주교를 국교로 수용하고, 영토를 확장했다. 그가 죽자 후계자 문제로 권력 투쟁이 일어났다.
 
슬라브 전통에 의하면 장자에게만 상속권이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다른 아들들도 권리를 요구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결국 장자인 볼레스와브 1세가 권력을 잡았다.
 
그가 사망하자 차남인 미에쉬코 2세가 왕위에 오르자, 장자인 베스프럼과 그의 동생 오톤이 왕권을 요구했다. 이로써 수백년간 걸치는 피로 얼룩진 권력투쟁이 일어나고, 폴란드는 여러 왕국으로 나누어져 때로는 독일, 때로는 체코의 영향 아래 놓이게 되었다.
 
카지미에스 대왕(1310-1370)은 비록 영토는 다소 축소되었지만, 다시 통일 국가 건설을 했고, 사회 경제 국방 등 많은 발전을 이루었다. 그는 1364년 크라코브대학  (지금의 야기엘론스키 대학교)을 설립했다. 그는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그의 죽음으로 10세기부터 시작된  피아스트 왕조의 폴란드 통치는 드디어 막을 내리게 되었다.
 
폴란드 왕위는 헝가리 왕 루드빅에게로 넘어갔고, 그가 1382년에 사망하자 2년 후 1384년 그의 둘째딸인 야드비가가 폴란드 왕으로 즉위했다.
 
한편 리투아니아는 이때 영토를 확장하고 강력한 국가로 부상했고, 폴란드 귀족들은 리투아니아의 대공이 된 요가일라와 합의하여 그가 야드비가와 결혼하고 폴란드의 지배자가 되는 댓가로 리투아니아 영토를 폴란드에 통합시키도록 했다. 이로써 리투아니아인 요가일라는 1386년 폴란드의 왕으로 즉위했고, 근 200년간 요가일라 왕국이 지속되었다.

1573년 폴란드 의회는 프랑스 국왕 카롤 9세의 동생인 헨릭 발레지를 국왕으로 선출했고, 그가 6개월만에 프랑스 왕위를 물려받기 위해 떠나자, 트란실바니아의 스테판 바토리를 폴란드 국왕으로 선출했다.
 
그리고 1587년에는 스웨덴 얀 3세의 아들 지그문트 3세를 국왕으로 선출했, 그는 1596년 수도를 크라쿠브에서 바르샤바로 옮겼다.
 
이어서 1673년 터키군을 대파한 얀 소비에스키는 폴란드 국왕(1674-1696)으로 선출되었고, 1683년 직접 폴란드 군대를 지휘하며 12만명의 터키 군대를 오스트리아 군대와 함께 무찌르고 터키의 침략으로부터 유럽을 수호한 왕으로 명성을 얻게 되였다.
 
그의 사후 합스부르크의 지지를 받는 삭센 영주 아우구스트가 폴란드 귀족들의 특권과 특혜를 인정하며 폴란드의 국왕으로 선출되었다.
 
이어 1795년 폴란드와 리투아니아 연합국가는 러시아, 프로이센, 오스트리아의 3차 분할로 귀족공화국이 멸망하고, 1918년 독립을 회복할 때까지 123년 동안 유럽 정치지도에서 사라지는 불운을 맞이했다.
 
이와 같이 폴란드의 귀족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는 스스럼없이 외세와 결탁하여 이웃나라의 왕족들을 자신의 국왕으로 선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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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리투아니아인으로 폴란드 왕이 된 요가일라 (야기에워)

Posted by 초유스
기사모음2008. 11. 19. 18:22

요즈음 폴란드와 리투아니아, 그리고 유럽에서 뜨고 있는 동영상 하나가 있다. 바로 “십분 속 폴란드 역사”이다. 옜 그림과 사진 등으로 구성된 10분짜리 동영상을 통해 966년 미에쉬코 왕자가 로마 가톨릭교를 수용한 후부터 2004년 유럽연합까지의 역사가 음악과 함께 자막처리 되어 있다.

이 동영상을 본 한 누리꾼은 45년 인생에서보다 이 10분 속에서 더 생생하게 폴란드 역사를 배우게 되었다고 평하기도 했다. 이 10분물 동영상을 통해 폴란드 역사를 한 번 알아보는 것도 좋을 것아 소개하고자 한다.

966년 미에쉬코 왕자가 로마 가톨릭교를 수용했다.
1385년 폴란드로부터 리투아니아가 가톨릭교를 수용했다. 이후 리투아니아와 폴란드는 400여년 동안 연합국가를 형성했다. 리투아니아인 요가일라가 폴란드 왕이 되었다.

독일기사단이 리투아니아 침략을 계획하자, 폴란드와 리투아니아는 동맹을 맺었다. 1409년 전쟁 시작.
1410년 그룬발트 전투는 유럽 중세시대 가장 큰 규모의 전쟁 중 하나였다. 리투아니아-폴란드 동맹군이 독일기사단을 크게 무찔렀다.

16세기는 폴란드의 황금기이다
르네상스식 대표적인 건물인 크라쿠브 바벨성이 지어졌다.
코페르니쿠스(1473-1543)는 지동설을 주장했다.
1569년 폴란드와 리투아니아는 공동 의회를 구성했고, 영토는 100만 평방킬로미터에 달했다.
1573년 종교자유 인정. 유럽이 종교분쟁에 휩싸일 때 폴란드는 신교도, 유대인, 이슬람인의 안전한 피신처가 되었다. 국왕을 선출하기 시작했다. 모든 귀족은 법 앞에 평등. 입법과 행정의 권력분립이 이루어졌다. 국민의 10%가 선거권을 가졌다.

17세기에는 많은 전쟁을 치렀다.
1605년 스웨덴과 전쟁에서 승리
1610년 러시아 군대를 격파하고, 1612년까지 모스크바 점령
1683년 터키 군대가 비엔나를 포위하자 폴란드 왕이 이끄는 유럽동맹군이 터키 군대를 무찔렀다.

18세기에 폴란드는 큰 위기를 맞았고, 아우구스투스 왕은 많은 개혁을 추진했다.
1773년 국가교육위원회가 설립되었다. 세계 최초 교육부가 탄생.
1791년 5월 3일 성문헌법을 발표. 이는 미국에 이어 세계 두 번째, 유럽 최초의 성문헌법이다.
1792년 절대군주제를 취한 이웃나라들이 이를 받아들일 수 없어 전쟁을 시작했다. 패자가 되었다.
1794년 미국 독립전재에 참가한 코쉬츄쉬코가 봉기를 일으켰다.
 
1795년 리투아니아-폴란드 연합국가는 유럽지도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프러시아, 오스트리아, 러시아로 분할되고 말았다. 폴란드인은 조국을 잊지 않고 독립 쟁취를 위한 끊임없는 노력을 했다.
1830-1831년 11월 봉기, 1848년 봉기, 1863-1864년 1월 봉기

독립을 위한 싸움뿐만 아니라 과학과 예술 분야에서 많은 폴란드인들이 기록을 남겼다.
1853년 워카시에비츠는 등유램프를 만들었다. 이는 현대석유산업의 시작점으로 간주되고 있다.
쇼팽은 폴란드에서 태어나 자랐다.
폴란드인 마리아 퀴리 노벨상을 받았다.

1918년 폴란드는 123년만에 다시 유럽지도에 다시 나타났다.
1920년 폴란드는 소련군을 물리침으로써 유럽을 구했다.
1939년 9월 1일 2차 대전 발발
1978년 폴란드인 교황으로 선출됨
1980년 솔리다르노쉬치(연대) 결성
1989년 공산당 지도와 솔리다르노쉬치 지도자간 원탁회의. 이는 폴란드에서 공산주의 종말, 유럽에서 공산주의 붕괴의 시작이었다.
2004년 유럽연합 가입

* 관련글: 폴란드 바르샤바 인어가 검과 방패를 든 까닭

Posted by 초유스
영상모음2008. 6. 23. 11:29

과거 무시무시했던 옛 소련의 비밀경찰 KGB의 눈을 피해 금서들을 펴낸 리투아니아인 비타우타스 안줄리스(77). 그는 1980년 양봉을 하면서 민족주의자 워자스 바제비츄스를 알게 되었고, 이들은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서적과 신앙심을 키우는 종교서적을 펴내기로 뜻을 모았다. 각자 성의 첫 글자를 따서 ‘ab’라는 비밀인쇄소를 만들어, 1990년 리투아니아가 옛 소련에서 독립할 때까지 10여년 동안 철저히 금지된 반체제와 종교 관련 서적들을 몰래 인쇄해 보급했다.

이 비밀인쇄소는 기막히게 숨겨져 있다. 비타우타스는 언덕 비탈에 위치한 온실에 시멘트 구조물로 수조와 묘목판을 만들고 묘목판 중앙에는 관수용 수도관을 세웠다. 이 수도관을 돌리면 기계가 작동해 수조를 이동시켜서 묘목판과 수조 사이에 틈이 생긴다. 이 틈이 바로 비밀인쇄소로 들어가는 문이다. 그는 2년에 걸쳐 30m 굴을 경사지게 파고 중간 중간에 철문을 세워놓았다. 비밀인쇄소는 지하 7m에 위치해 있다.

난공불락의 지하 요새 같은 비밀인쇄소의 내부는 인쇄에 필요한 활자와 활자판을 보관한 방과 인쇄기가 있는 방으로 되어 있다. 비타우타스는 고물 인쇄기 3대를 구해 직접 인쇄기 1대를 만들어 10년 동안 23개 책제목 138,000부를 찍었다. 가장 위험하고 아끼는 책은 1939-40년 스탈린과 히틀러가 발트 3국을 분할 점령한 내용을 담은 책. 현재 당시 사용했던 인쇄기와 서적 등을 잘 보존 전시해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역사 현장을 보여주고 있다. 한편 리투아니아의 근대와 현대의 지배 체제로부터 탄압받은 출판 역사에 관한 많은 자료를 전시해놓았다. 그의 개인 박물관은 이제 리투아니아 국립 비타우타스 전쟁박물관 분원이다.  

당시 비밀경찰 KGB는 어디에서 누가 이런 금지된 서적들을 인쇄하는지 끝내 밝혀내지 못했다. 일가족 몰살의 위험을 무릅쓰고 금서를 펴낸 이유를 묻자, 그는 “총보다 인쇄물을 더 무서워한다는 것을 알게 되어 인쇄 일을 하는 내가 인쇄했을 뿐이다”라고 겸손하게 말했다. 이런 사람이 있기에 “역사는 변화한다”라는 믿음을 가져본다.



* 한국은 위대한 나라 - 리투아니아 유명가수

Posted by 초유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