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모음2010.01.15 08:48

한 때 유럽 여행객들은 가는 나라마다 새로운 화폐로 환전해야 했다. 여행이 끝날 때쯤이면 각국 동전은 처치하기 곤란한 짐이 되기도 했다. 베테랑 여행자들은 환율이 좋은 환전소를 찾아 거리를 헤매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는 낯선 풍경이 되었다. 현재 유럽연합(EU)의 16개국이 유로라는 단일통화를 사용하기 때문이다.

제2차 세계대전 후부터 유럽 국가들은 경제공동체와 아울러 단일통화 도입을 위해 부단한 노력을 해왔다. 1991년 마스트리히트 조약으로 단일통화 도입이 확정됐고, 1995년에는 단일통화 이름이 ‘유로’로 결정됐다. 유로가 정식 화폐로 도입된 것은 1999년의 일이다. 마침내 2002년부터 자국화폐 대신 유로가 일상생활에서 통용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일부 유럽인들은 이보다 훨씬 오래 전부터 단일통화를 추구해 왔다. 바로 만국공통어 사용을 주장하는 에스페란토 지지자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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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34년 소인이 찍힌 에스페란토 엽서 (4. 유럽 단일통화 도입을 요구하라)
 
"프롬유로"는 단일통화에 대한 유럽인들의 인식을 촉진하기 위해 유럽투자은행과 유럽위원회 등이 1990년 설립한 비영리기구다. 이 기구가 펴낸 ‘유럽을 위한 유로’라는 책자에는 1934년 9월13일자 소인이 찍힌 우편엽서가 실려 있다. 루마니아에서 발행된 엽서의 발신지는 스페인, 수신자는 프랑스 에스페란티스토(에스페란토 사용자)다. 에스페란토로 쓰인 이 엽서는 유럽인들에게 호소하는 열 가지 사항을 담고 있다. 유럽연합을 믿어라, 유럽 단일경제구역 창설을 지지하라, 유럽 의회를 대표하는 공동의회 창설을 홍보하라 등 유럽 통합을 지지하는 열 가지 내용 중 네 번째 사항은 ‘공동 유럽군대 창설과 유럽 단일통화 도입을 요구하라’다.

1907년부터 공동통화 제조 유통 … 회비 내고 잡지 구입 등에 사용
에스페란토는 세계평화 실현을 목표로 폴란드인인 자멘호프가 창안해 1887년 발표한 언어다. 에스페란티스토들은 초기부터 만국공통어 실현과 함께 단일통화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비록 에스페란티스토들 사이에서만 통용됐으나 이미 20세기 벽두에 유럽 공동화폐를 실현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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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스페란티스토들이 사용한 공동통화 "스텔로"

에스페란티스토들은 언어학자이자 에스페란티스토인 소쉬르의 제안에 따라 1907년부터 제1차 세계대전까지 ‘스페스밀로’라는 공동통화를 제조해 사용했다. 독일 에스페란티스토인 차우나는 1921년부터 유럽 단일통화 연구에 몰두했다. 에스페란토 국제조직인 ‘세계연맹’은 기존 지폐에 이어 1959년부터 '스텔로(뜻은 별)라는 동전을 통용시켰다. 비록 에스페란티스토 사이에서만 사용됐지만 이 화폐는 회비를 내고 잡지를 구독하거나 도서를 구입하는 등 기존 화폐 기능을 모두 가지고 있었다.

유로의 아버지는 에스페란티스토
그렇다면 현재 유럽 단일통화인 '유로(euro)라는 이름은 어떻게 태어났을까? 세계 에스페란토 협회 기관지 Esperanto 2010년 1월호는 이에 대한 글을 실었다. 이 기사에 따르면 "euro"라는 이름을 짓은 사람은 벨기에서 중학교 교사이자 에스페란티스토인 게르마인 피를로트(Germain Pirlot)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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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계 에페란토 협회 기관지 "에스페란토" 2010년 1월호에 실린 관련 기사 화면 촬영

그는 1995년 8월 4일 당시 유럽집행위원장인 작크 상테르(Jacques Santer)에게 새로운 유럽 통화에 "유로"라는 이름을 지어주자라는 제안을 담은 편지를 보냈다. 그 해 9월 18일 상테르는 피를로트에게 그의 제안에 대한 감사편지를 보냈다. 1995년 마드리드에서 열린 유럽 정상회의에서 "유로"라는 이름이 공식적으로 승인되었다.

유로는 단일통화로 완전히 정착되고 있지만, EU는 여전히 회원국간의 언어문제로 골머리를 앓고 있다. EU는 회원국 언어들을 최대한 존중하는 정책을 유지하고 있다. 이런 가운데 EU 확대로 인해 늘어나는 통번역비 등으로 업무어수(業務語數) 축소, 또는 하나의 공용어에 대한 목소리가 지속적으로 높아지고 있다.

유로와 에스페란토는 통일성을 추구하는 점에서는 동일하다. 하지만 유로는 각국의 기존 화폐를 사라지게 하고, 에스페란토는 각국의 기존 언어들을 존중하는 1민족 2언어 주의를 표명하고 있다. 이 점이 바로 유로와 에스페란토의 차이점이다.

* 관련글: 영어 홍수 속에 여전히 살아있는 에스페란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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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초유스
에스페란토2009.06.02 09:29

어제 한 통의 편지를 받게 되었다. 바로 브라질의 한 에스페란티스토가 생을 마감했다는 소식이었다. 아무리 자연의 이치라고 하지만 나이가 한 살 한 살 더 먹어갈수록 주위 사람들이나 친구들이 하나 하나 곁을 떠난다는 것이 너무 아쉽다.

올해 여든살인 이 브라질 지인은 UN 직원, 시인, 대학교수, 에스페란토 학술원 회원, 번역가, 교육자, 사전편찬자 등으로 다양한 분야에서 많은 일을 했다.
 
지난 해 12월 31일 브라질 리오데자이네로 여행 때 처음 이 분을 만났다. 당시 머물고 있는 지인 집으로 이날 직접 찾아와 한 동안 대화를 나누었다. 그는 포르투갈어-에스페란토 사전 편찬에 마지막 박차를 가하고 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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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지 않은 체구에 넘치는 웃음과 힘찬 목소리가 인상적이었다. 어떻게 여든의 나이에 저렇게 건강하고 정열적으로 살 수 있을까 놀랍기도 하고 몹시 부러웠다. 저 나이에도 저렇게 살고 싶은 마음이 일어났다.

그는 다음날 (1월 1일) 점심식사로 초대했다. 처음 만난 사람으로부터 초대를 받아 부담스러웠지만 그의 호의를 거절할 수도 없었다. 우선 그가 단골로 가는 중국식당으로 갔으나 새해라 문을 닫았다. 한참 동안 찾아간 곳이 일본식당이었다.


"당신들을 초대하기 위해 내가 지난 10년 동안 연금을 절약해놓았으니, 오늘 먹고 싶은 것이 있으면 마음껏 시켜라"라고 하던 그의 모습이 눈 앞에 선하다. 고인의 명복을 빈다. 식사 내내 그의 농담과 일화로 웃음이 떠나지 않았다.
(영상은 음식이 나오기 전 젊은 시절의 여러 가지 일화를 에스페란토로 들려주는 그의 모습을 담고 있다.)

* 관련글: 브라질에서 만난 아름다운 사람들
 

Posted by 초유스
사진모음2009.02.12 11:30

낯선 나라에 처음으로 갈 때 새로움에 대한 기대와 일어날 일에 대한 걱정이 늘 상존한다. 지난 12월 초순 갑자기 브라질 쿠리티바를 방문할 일이 생겼다. 아내가 동해하는 김에 세계적 유명 관광지인 리오데자네이로(리오)와 상파울로도 방문하기로 했다.

쿠리티바와 상파울로에는 친구들이 있어 별다른 걱정이 없었다. 문제는 리오였다. 부부가 같이 가므로 일상에서 더 절약하고 이번 리오에서는 분위기 있게 보내기를 결정했다. 그래서 신나게 인터넷으로 호텔 예약을 시도했다. 무궁화 3개부터 시작해 무궁화 5개까지 모조리 찾았으나 방이 없었다. 새해맞이를 위해 세계와 브라질 각지에서 사람들이 몰려들기 때문에 상파울로나 쿠리티바로 곧장 오는 것이 좋겠다고 조언한 브라질 친구가 옳았다.

순간 떠오르는 것이 에스페란토였다. 리오에 사는 에스페란토 사용자들에게 사정 얘기를 하고 도움을 청했다. 세계에스페란토협회가 발행하는 에스페란토 사용자 주소록인 연감에서 몇몇 현지인들에게 편지를 썼다. 새해부터 민폐 끼치기가 부담스러워 호텔 예약을 부탁했다. 큰 기대는 안했지만, 몇 시간 후 세 사람으로부터 답장이 왔다. 안전과 현지적응을 위해 호텔보다는 에스페란토 사용자 집을 권했다. 이렇게 자기 집으로 기꺼이 초대하겠다는 사람이 두 사람이나 있었다.   

12월 30일 파리 공항에 있는 데 브라질에서 국제전화가 왔다. 택시를 잘못 타면 바가지 낭패를 당할 수도 있으니 자기가 31일 아침 공항에 마중을 나가겠다고 했다. 약속대로 작곡가인 아라곤은 차를 가진 아들과 함께 공항으로 마중 나왔다. 손에는 초면의 사람을 찾기 위해 큼직하게 이름을 쓴 종이를 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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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부부와 3박 4일간 같이 생활한 마리아는 대학교 교직원으로 퇴임했다. 마리아는 치즈빵을 직접 만들어서 우리 부부를 맞이했다. 내내 관광지를 안내하며 브라질에 대한 많은 이야기를 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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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시절 UN 직원으로 일을 했고, 대학교수로 퇴임한 실라(80세)는 우리 부부 점심 초대를 위해 지난 십년 동안 연금을 절약했다면서 인근 일식당으로 초대했다. 같이 있는 동안 내내 웃음이 떠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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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수로 퇴임한 알로이죠는 에스페란토 사무실에서 자원봉사를 하고 있다. 이날 우리 부부를 리오데자이네로가 한 눈에 내려다보이는 "폐허 공원"으로 안내했다. 많아도 50대 초반으로 보였는데, 실제 나이가 65세라 한다. 믿지를 않자, 그는 주민등록증을 보여주었다. 에스페란토를 하면 이렇게 젊어지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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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질 남부 지방 쿠리티바에서 만난 에스페란토 사용자들이다. 짧은 만남이었지만 편하고 정이 가는 사람들이었다. 이날 모인 친구(오른쪽 밑 사진, 하얀 티셔츠)가 어느 날 사촌과 함께 대학시절 이야기를 했다고 한다.
사촌왈: "내가 꼽는 최고의 교수는 바로 포르투갈어를 가르친 제랄도 교수이지! 너는 모르지?"
친구왈: "그 교수와 난 같은 에스페란토 단체 회원인데!!!"
사촌왈: "부럽다, 부러워~~~" (교수는 왼쪽 윗 사진, 안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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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파울로에서는 서울에서 YTN 리포터 연수 받을 때 같은 방을 쓴 친구이다. 방을 같이 쓴 죄(?)로 이번에 손님 대접 왕창 받았다. 아내는 한국외에서도 한국인의 손님 환대에 감동 받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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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불교 교전>를 포르투갈어로 번역을 한 친구 제랄도(78세)의 가족이다. 3개 대학교에서 포르투갈어를 가르쳤다. 남들보다 3배나 더 일했으므로 합쳐서 100년을 일했다고 한다. 2주간 옆에서 지켜보았는데 먹고 자는 시간을 빼고는 대부분 시간을 글 쓰는데 바치고 있었다. 제랄도 가족 덕분에 브라질 사람들의 일상 삶을 가까이에서 지켜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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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르투갈어를 전혀 모르는 우리 부부가 브라질에서 이렇게 마음이 아름다운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의 도움을 받은 것은 바로
에스페란토 덕분이다. 출발지에서는 바로 위 사진 속처럼 환송을 받았고, 도착지에서는 환영을 받았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이렇게 하나의 언어로 서로 이해하고, 돕고, 형제처럼 지내는 날이 속히 오기를 바라고, 노력하고자 한다.

Posted by 초유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