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모음2011. 1. 14. 0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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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소련군대 무력진압으로 희생된 사람들의 묘소)

1991년 1월 13일 - 2011년 1월 13일

1월 13일은 리투아니아 사람들에게 역사적인 날이다. 특히 올해는 20주년을 맞이한 날이다. 이날을 맞아 리투아니아 다양한 국가행사를 열었다. 그렇다면 1월 13일은 어떤 날인가?

공산세력권이 점점 약화되고 있던 1990년 리투아니아 최고회의 선거가 자유롭고 민주적으로 치러졌다. 독립국가 건설을 목표로 하는 사유디스가 141석 중 101석을 차지했고, 란드스베르기스가 의장으로 선출되었다. 새로 구성된 최고회의는 소련의 모스크바가 연방탈퇴법을 제정하기 전인 1990년 3월 11일 리투아니아가 독립국가임을 선언했다. 이 선언문은 6명의 폴란드인 위원을 제외하고 모두가 서명했다.

독립은 선포되었지만, 여전히 소련 군대가 주둔해 있었고, 소련 KGB가 활동하고 있었다. 최고회의는 리투아니아 내에서 소련 헌법과 법이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고 선언했다. 소련은 탈퇴를 승인하지 않았지만, 모든 것이 합법적으로 이루어졌다. 그래서 당시 고르바초프가 탈퇴를 무력으로 진압할 수가 없었다.

제2차 대전 후 리투아니아에 유입된 러시아인들이 약 30만명이었다. 이들은 자신의 특권 상실, 국적법, 무시하고 배우지 않은 리투아니아 국어 등을 두려워했다. 러시아인 공산주의자들은 소련 공산당에 여전히 남았고, 24만여명 폴란드인 주민들에게 복종하지 말고 자치권을 요구하도록 충동질했다. 두 소수 민족은 반정부 시위를 조직했고, 모스크바에 편지를 보내 리투아니아에 소련체제 재건을 요구했다.

1991년 1월 10일 고르바초프는 소련헌법의 우월성을 인정하라고 최후통첩을 보냈다. 리투아니아 최고의회가 이를 거부하자 소련군대가 움직였다. 1월 11일부터 소련군대는 언론회관, 국방부, 경찰학교 등을 점령했다. 리투아니아 정부는 국민들이 자신들의 소속기관으로 와서 지킬 것을 호소했고, 수천명의 리투아니아 사람들은 국회의사당과 텔레비전 타워를 요새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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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리투아니아 국회의사당에 당시 소련군대로부터 국회의사당을 보호한 장벽들이 보관되어 있다.

1월 13일 소련군 특수부대가 탱크를 동원해 텔레비전 타워를 공격했다. 비무장 군중을 향해 총을 발사하고 곤봉을 휘둘렸다. 이 과정에서 14명의 사망자와 600여명의 부상자가 속출했다. 빌뉴스에서 방송을 내볼 수 없게 되자 리투아니아 정부는 즉각 카우나스(Kaunas) 텔레비전을 활용해 전국으로 방송했다. 아래 동영상은 1991년 1월 13일 당시의 모습을 담고 있다.


이 피의 일요일 사건은 전세계로부터 커다란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아이슬란드가 최초로 1991년 2월 리투아니아를 독립국가로 인정했다. 1991년 8월 19일 모스크바에서는 소련제국 구하기 쿠테타가 일어났다. 3일만에 쿠데타가 진압되었고, 보리스 엘친이 통치하기 시작했다.

1991년 8월 25일 러시아, 9월 2일 미국 등 세계 각국이 리투아니아 독립국가를 인정했다. 리투아니아는 1991년 9월 17일 유엔의 회원국이 되었다. 1993년 8월 31일 마지막 소련군대가 리투아니아를 최종적으로 떠났다. 이는 곧 리투아니아 사람들에게 2차 대전의 진정한 종말을 의미한다.
Posted by 초유스
기사모음2008. 9. 4. 15: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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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에스토니아 소비에트 공화국" 독립을 선언하고 러시아에게 독립국가 인정을 청원한 에스토니아의 두 시골집 사람들
(사진 출처: 례투보스 리타스 인터넷판)

<례투보스 리타스> 인터넷판 기사에 의하면 최근 에스토니아에 두 시골집으로 구성된 초미니 독립 공화국이 선언되었다. 러시아 국경선에서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 에스토니아 북동 지방의 한 농부는 최근 “에스토니아 소비에트 공화국”을 선언하고, 러시아에 이의 독립을 인정하고 도와달라는 청원서를 보냈다. 이에 이웃집도 찬성했다.

“보통 사람들에게 전혀 관심이 없고, 숲을 벌목하고, 실업률이 높고, 부패가 만연하고, 나토와 미국이 모든 결정을 하고, 파시스트가 넘쳐나는 부로조아 에스토니아에 더 이상 살고 싶지 않다”며 그는 새로운 독립 국가를 선언한 이유를 말했다.

소외된 시골사람들의 한 해프닝으로 끝날 수도 있지만, 러시아가 그루지야에서 남오세티아와 아브카지아를 떼어내고 이들의 독립을 인정하는 시점에 나온 것이라 미묘한 파장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특히 러시아인들이 많이 사는 에스토니아와 라트비아는 그루지야 사태를 강 건너 불구경하듯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루지야 다음으로 발트 국가가 아닐까 벌써 우려하는 사람들도 생기고 있다.

Posted by 초유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