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얘기2018. 12. 6. 05:27

외국에 살면 가장 가고 싶지 않는 곳을 손꼽으라하면 이민국과 병원이다. 외국 생활시 비자와 질병이 제일 큰 문제다. 이민국은 이제 5년마다 한 번씩 가서 거주증만 갱신하면 된다. 질병은 예측하기가 힘든다. 수술 하나를 마치면 이것이 생애 마지막 수술이기를 간절히 바라보지만 수술 집도의를 만난 횟수가 벌써 네 번이다.

지난 여름철 오른쪽 귀 뒷편에 뽀루지가 생겼다. 이 부위는 안경 다리 끝부분과 마찰이 잦은 곳이다. 아주 드물게 여기에 뽀루지가 생겨 짜내면 얼마 후 흔적이 사라진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렇지가 않고 이 부위가 좀 커져서 딱딱한 결절이 형성되었다. 그냥 내버려두고 싶었지만 그래도 의사를 한번 찾아가보기로 했다.

리투아니아 의료체계에 따르면 먼저 가정의를 방문해 소견서를 받아서 2차 진료 기관을 방문한다. 응급한 상황일 경우 아침 일찍 종합진료소를 통해 당일이나 아주 가까운 시일내 가정의를 거치지 않고 전문의 진료를 받을 수 있다. 이렇게 11월 23일 곧 바로 수술의사를 방문했다. 결절을 살펴 보더니 수술로 제거할 수 밖에 없다고 했다. 11월 26일 종합진료소를 다시 방문해 수술 소견서와 수술 날짜 배정을 받도록 했다. 11월 26일 다시 그를 방문하자 일주일 후인 12월 3일 오후 시간으로 수술 날짜를 잡았다.

고민거리가 생겼다. 수술의사에게 어떻게 답례할까이다. 의료보험이 되어 있기 때문에 일체의 수술 비용이 들지 않는다. 단지 위생 신발덮개(신발커버)를 64원에 구입해야 했다. 돈으로 성의를 표시할까? 아니면 초콜릿이나 커피 봉지 등으로 선물할까? 솔직히 "감사합니다"라는 미소 담긴 말로 끝내고 싶지만 리투아니아인 아내는 술 한 병과 초콜릿 한 상자를 깔끔한 선물 종이 가방에 넣어 주었다. 아내가 근무 중이라 나 혼자 수술을 받으러 가야 했다.

아내는 반드시 이 선물을 수술 하기 전에 줘야 한다고 신신당부했다. 또 의사에게 도려낸 부위 조직 검사를 하는 지와 그 결과를 언제 알 수 있는 지를 꼭 물어 봐라고 하면서 리투아니아어 문장(Ar išsitrinsite? Kada sužinosiu)을 여러 차례 일러주면서 외우도록 했다.  

종합진료소 수술실에 들어가 수술의사와 인사를 나눈 후 접수했다. 바로 이어 수술실 간호사의 안내를 받아 수술실로 들어갔다. 수술 전에 수술의사에게 꼭 줘라고 당부한 선물 가방을 줄 상황이 보이지 않았다. 수술 침대에 옆으로 눕자 속전속결로 진행되었다. 


* 사진을 글과 관계 없는 수술 사진(출처: karpol.lt/features/dienos-chirurgija/)

눈을 감는다
분무기로 수술 부위가 있는 머리 뒷 부분에 마취액을 분무한다
녹색천으로 머리 위를 덮는다

조금 후 마취액이 묻어 있는 부위가 뜨거워졌다. 곧 수술 집도의가 들어와 수술을 시작했다. 결절을 도려내는 데는 그야말로 한 찰나였다. 수술진은 여러 차례 수술 중 무슨 일이 생기면 즉시 말하라고 부탁했다. 수술실에는 집도의외에 세 명의 의료진이 더 있었다. 집도의를 비롯한 의료진은 실밥을 꿰매면서 거의 끊임없이 나와 대화를 이어갔다.

"오늘 저녁에 한국어 수업을 한다고 했는데..."
"저녁 6시 30분에 시작된다."
"학생은 얼마나 되나?"
"12명."
"한국어와 캄보디아어는 닮았나?"
"전혀 안 닮았다."
"세상에 한국어와 비슷한 언어가 있나?"
"없다."
"한국어를 배우지 않고 알 수 있나?"
"알 수 없다."
"한국어가 어렵겠지?"
"한국어보다 리투아니아어가 더 어려운 것 같다."
"이곳에 산 지는 얼마나 되나?"
"20년."
"리투아니아어는 어떻게 배웠나?"
"처음에는 어학강좌를 다녔다."
"자녀는 있나?"
"있다. 딸 하나."
"몇 살이니?"
"17살."
"누굴 닮았나?"
"둘 다 안 닮은 듯..."

이렇게 대화하면서 수술이 끝났다. 간호사는 마취액 자국을 정성스럽게 닦아내었다. 마취액을 분무한 것에 불과한 데도 좀 어지러웠다. 간호사는 나를 부축하면서 회복실로 안내했다. 그리고 수술 부위에 냉찜질을 하도록 했다. 

20분 정도 지난 후 집도의가 직접 와서 상태를 확인한 후 약처방을 내렸다. 혹시 통증이 있을 시 돌멘(dolmen)을 하루 세 번 식후 복용하고 소독약 octenisept나 cutasept를 하루 세 번 뿌려라하고 했다. 실밥 등 수술 후 확인을 위해 목요일에 진료소로 오라고 했다. 외투와 선물로 두툼한 가방 속에서 선물 봉지를 꺼내 수술의사에게 건넸다. 그는 흔쾌히 이를 받았다. 

옆에 있던 간호사는 아직 가지 말고 의자에 잠시 기다려라고 했다. 이유인즉 진통제 주사를 놓아주겠다고 했다. 간호사도 여러 가지 질문을 했다.

"서서 바지만 조금 내려."
"이 주사 효과는 어느 정도로 가나?"
"한 다섯 시간 정도."
"잘 됐네. 저녁 강의가 끝날 때까지는 통증을 느끼지 않겠구나."
"어디에서 왔나?"
"한국에서."
"일본인으로 생각했는데. 물어보기를 잘했네."
"리투아니아어를 잘하는데..."
"아직 멀었다. 하지만 현지에 살고 있으니 현지어를 배워 말해야 된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의료진과 소통을 하면서 수술을 무사히 마치니 집으로 돌아오는 발걸음이 가벼웠다. 두 서 시간 수술 부위가 당겨서 부자연스러웠다. 

* 관련글:    
Posted by 초유스
생활얘기2013. 5. 14. 14:48

살면서 가장 힘겨운 일 중 하나가 병이다. 수술로 치료해야 하는 병은 더 고생스럽다. 병원을 모르고 살아왔는데 지천명 나이를 전후로 해서 병원 신세를 몇 차례 지게 되었다. 먼저 갑상선 결절 수술이었다. 이 수술 한 번으로 이제 건강하기를 간절히 원했지만, 또 다른 병이 찾아왔다. 


담낭 제거 수술을 지난해 2월 받았는데 그 간접적인 휴유증으로 인해 좀 고생하고 있다. 이야기를 1년 전 2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2월 16일은 1918년 리투아니아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날로 국경일이다. 아내는 딸을 데리고 지방에 있는 친정으로 갔다. <리투아니아 역사> 시험 공부하느라 혼자 집에 남아 있었다. 이날 오후 잠시 한국 교민 모임에 참가해 맛있게 만두국과 군만두를 원 없이 먹었다. 

17일 혼자 저녁을 먹고 간식으로 기름진 빵을 두 개 먹었다. 그리고 집중도 안 되고 눈도 피곤해 밤 9시 30분경에 취침했다. 그런데 배가 아파 잠에서 깼다. 시간을 보니 밤 12시였다. 조금 후면 사라지겠지 했지만 한 시간이 지나고, 두 시간이 지나도 여전히 견디기 힘든 통증이 지속되었다. 열은 없고, 식은 땀이 나고, 속이 메스껍고, 오른쪽 배와 옆구리가 아팠다.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 

갑상선 수술을 한 후 정기적으로 병원에 검사를 다녔다. 초음파 검사에서 쓸개에 돌이 있다는 진단을 받았기 때문이다. 고통을 참으면서 아이팟으로 인터넷에서 담석증 증상을 찾아보았다. 일치했다. 혹시나 해서 음식 먹고 체했을 때처럼 바늘로 엄지 손가락, 엄지 발가락을 따보았다. 그래도 통증은 사라지지 않았다. 잠자는 가족에게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 아침이 되도록 꾹 참았다. 하지만 여전히 통증은 지속되었다. 

18일 아침 6시에 아내에게 전화했다. 집에 있는 진통제를 복용했지만, 통증은 여전했다. 결론은 112로 전화해 응급차를 불렀다. 방문 의사는 체온과 혈압을 측정했고, 두 가지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했다.

"진통제 주사, 아니면 병원행?"

진통제 주사를 맞아 일시적으로 고통을 줄일 수 있지만 근본적인 치유 방법은 아닐 것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입원시 필요한 준비물을 챙겨서 응급차를 타고 병원으로 향했다.
  
아픈 옆구리를 잡고 혼자 진료 등록을 하고 피 검사와 초음파 검사를 받았다. 초음파 검사에서 3cm 크기의 담석이 발견되었고, 의사는 입원 치료가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다시 정밀 피 검사를 받았고, 심전도 검사이어서 입원 수속을 밟았다. 주소와 주민등록번호를 알려주었다. 

"보험되어 있지요?" 
"예."  

환자복을 받아 입원 수속 간호사의 안내를 받아 따라 병동으로 갔다. 4인실에 배정받았다. 11시 30분경 진통제와 링겔을 맞았다. 아내는 이날 저녁 무렵에 병원을 잠시 방문하고 집으로 돌아갔다.  

19일 일요일에는 아침도 없고, 링겔도 안 주고, 점심에는 고작 당근국 하나, 저녁에는 차 한 잔.
 
20일 월요일 10시 위 내시경 검사를 받았다. 엄지손가락 두 개 만한 내시경으로 위까지 검사하는 데 구토 증세를 참느라 미칠 지경이었다. 다행히 별다른 이상이 없었다. 점심은 보리죽과 빵. 저녁은 차 한 잔. 마취의사가 찾아와서 마취제에 대해 과민반응 여부를 물었다.
 
21일 화요일 아침에 샤워를 하고 수술 시간을 기다렸다. 긴 기다림의 연속이었다. 오후 1시에 간호사가 왔다. 아내가 일찍 오기로 했는데 학교 일 때문에 오지 못했다. "혼자 태어나 혼자 살다 혼자 간다."라는 어느 리투아니아 독신 할머니의 말이 떠올랐다. 

수술옷으로 갈아입고 침대에 누워서 실려가는데 수술실 바로 앞에 승강기에서 아내를 만났다. 일원상 서원문을 암송하면서 마음을 편하게 하면서 수술대에 올랐다. 오후 1시에 수술실에 들어가 오후 3시 40분에 병실로 돌아왔다. 복강경으로 수술이 이루어졌다.

의식을 회복한 지 제일 먼저 한 말이 "As gyvas?"(내가 살았어?)이다.

병원에 온 지 7일만인 24일 금요일 퇴원했다. 담석 제거 수술로 인해 몇 가지 부작용이 있었다. 수술 후 상처가 잘 아물지 않아 두 달간 통원치료를 받았다. 또한 수술 후 곧 바로 대학교에서 강의를 해서 성대에 결절이 생겨 수술까지 받게 되었다

갑상선 수술할 때처럼 리투아니아에서 병원 생활하면서 느낀 것은 "보험이 되어 있으면 수술 비용에 별다른 걱정이 없고, 또한 보호자가 참 편하다."는 것이다. 보호자는 일상 생활을 그대로 하면서 방문 시간에만 찾아와 잠시 환자 곁에 머물다가 집으로 돌아간다. 모든 국민이 적어도 의료비와 교육비에 대한 부담만큼은 없이 살아갈 수 있도록 했으면 좋겠다.

* 관련글:    
Posted by 초유스
요가일래2013. 4. 23. 07:15

딸아이가 아주 어렸을 때 "너는 언제 자라나? 빨리빨리 자라거라!"라며 한숨을 내쉴 때도 종종 있었다. 그런데 딸아이는 벌써 초등학교 5학년생으로 훌쩍 자라버렸다. 아직은 느끼지 못하지만, 조만간 사춘기에 접어들 나이다. 

1살 반경 딸아이는 언니와 놀다가 쇠 난간에 이마가 부딛혀 상처를 입었다. 그 흉터 자국이 남아 있다. 예쁜 얼굴에 있는 이 흉터를 볼 때마다 당시 제대로 주의하지 못한 것이 후회된다. 일전에 이 흉터 자국을 보면서 딸아이에게 말했다.


"나중에 네 이마에 있는 흉터를 제거하는 성형수술을 받자."
"안 돼. 나 안 할래."
"무서워서?"
"아니."
"그럼, 왜?"
"어릴 때 추억이잖아. 그리고 이 흉터를 보면서 늘 조심해야 한다는 것을 생각할 수 있잖아."
"그래. 네 생각이 옳다. 거울 볼 때 그 흉터를 보고, 그 흉터를 볼 때마다 앞으로는 그렇게 해서는 안 되겠다고 다짐하는 거야. 그러면 그 자국이 흉하는 것이 아니라 아름다운 것보다 더 아름답다. 오늘 우리가 한 말을 잊지 말고 살아가자."


이마에 있는 흉터가 보기 싫은 것이 아니라 어린 시절 추억의 징표요, 경각심을 불러일으키는 표시로 생각하는 초등학생 딸아이가 대견스럽다. 아이가 어른을 가르친다는 말이 바로 이런 경우가 아닐까...... 아무튼 딸아이가 이런 마음을 오래오래 변치 말고 살아가길 바란다.

Posted by 초유스
생활얘기2013. 3. 14. 07:03

3년 전 이맘 때 빌뉴스 의과대학교 병원에서 갑상선 수술을 받았다. 갑상선 수술을 앞둔 사람이 가장 많이 걱정하는 것 중 하나가 수술 자국 흉터이다. 수술 부위가 그대로 노출되는 목이기 때문이다. 자국이 현저하게 남아있으면 자신이 거울을 볼 때나 여름철 타인이 이를 바라볼 때 느낌이 안 좋을 듯하다.    

  • 2010/03/19 수술 후 가장 먼저 확인하고 싶었던 일은
  • 2010/03/16 유럽에서 겪어본 일주일 병원생활
  • 2010/03/15 한국인 사위 수술에 깜짝 출현한 장모님
  • 2010/03/15 수술 두려움을 날려버린 딸아이의 한 마디

  • 아래 사진은 당시 수술한 후 얼마 지나지 않을 때 찍은 사진이다. 이와 비슷한 흉터가 남는다면, 그야말로 흉물스럽다.


    아래 사진은 3년이 지난 후 지금의 수술 자국 모습이다.  


    현미경으로 보지 않는다면 거의 알아볼 수 없을 정도이다. 설사 눈치채더라도 수술이 아니라 조금 긁힌 것으로 보인다. 당시 수술을 집도한 의사는 그 후 한 여성에게 아래와 같은 방법으로 수술을 해서 화제를 낳았다. 목이 아니라 왼쪽 가슴 위로 들어가 수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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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출처: http://www.santa.lt/index.php?-1985283908

    이를 통해본다면 갑상선 수술을 앞둔 사람이 수술 흉터에 대해 더 이상 걱정할 필요는 없겠다. 설령 있다하더라도 건강 회복이 제일이다.
    Posted by 초유스
    생활얘기2010. 4. 28. 06:30

    사람이 일생을 살아가면서 가장 원하는 바 중 하나가 아파서 병원에 가지 않는 것이 아닐까...... 리투아니아에서는 아프면 제일 먼저 찾아가는 곳이 거주지역을 관할하는 보건소이다. 이곳에서는 자기가 살고 있는 거리를 관할하는 가정의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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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로 이 가정의사를 찾아가 1차 진료를 받고 검사와 치료에 대한 상담을 받는다. 전화나 인터넷으로 진료 예약을 하고 그 시간에 가면 된다. 이런 경우는 가정의사를 돕는 간호사가 미리 개인건강기록부를 챙겨서 가지고 있다.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보건소 접수실에 가서 이 개인건강기록부를 받아서 가정의사를 찾아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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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개인건강기록부에는 그 동안 개인이 받은 모든 진료나 검사 결과가 적여있다. 당연히 보건소나 병원을 많이 방문할 수록 이 기록부가 더 두꺼워진다. 누구나 이 기록부만 보면 환자의 과거 병력을 한눈에 살펴볼 수 있다. 꼭 학교 다닐 때 생활기록부나 성적기록부를 보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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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번 수술을 받으면서 수술 받을 병원에서 다시 모든 검사를 할 것을 기대했다. 하지만 수술담당 의사는 관할 보건소에서 수술을 위해 필요한 혈액검사를 하고 결과가 적힌 서류만 가져오라고 했다. 리투아니아 보건소를 방문해 잘 정리된 이 기록부를 볼 때마다 보건소의 개인건강관리가 돋보인다.

    * 최근글: 리투아니아에도 한국가수 팬클럽들 활발
     
     
     

    Posted by 초유스
    사진모음2010. 4. 17. 15:18

    지난 3월 처음으로 수술을 직접 체험했다. 당시 수술실에 들어가기 전 수술실 내부 환경이나 수술 도구들을 한번 살펴보기를 바랐다. 하지만 막상 수술대에 눕고 보니 주변을 두리번거릴 시간조차 없었다.

    * 관련글: 제1편: 해외에서 갑상선 수술체험기 - 진단과 수술결정
                   제2편: 해외에서 갑상선 수술체험기 - 입원과 수술
                   제3편: 수술 후 가장 먼저 확인하고 싶었던 일은

    수술대에 눕자마자 간호사는 왼쪽 팔에 마취 주사를 놓을 준비를 했다. 천장에 매달려있는 환한 전등불을 보자마자 의식은 이내 몽롱해져 갔다. 결국 수술 도구는 직접 보지 못했다.

    최근 옛날 수술 도구 사진들을 모아 놓은 한 웹사이트를 방문했다. 믿기지 않을 정도로 무시무시한 도구들이 있어 너무 놀랐다. (사진출처 source li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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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근글: 한국 소포 선물에 마음 찡한 우리 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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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osted by 초유스
    생활얘기2010. 3. 19. 1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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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주 2년이 채 남지 않은 50 평생에 처음으로 직접 수술을 받으러 수술실로 옮기는 침대에 누웠다. 천천히 갔으면 좋을텐데 중년의 여간호사가 미는 침대는 왜 그렇게 빠른지 평소 발걸음이 빠른 아내도 뛰다시피해서 뒤따라왔다. (오른쪽 사진: 수술 후 왼손으로 써본 천지하감지위 天地下鑑之位 부모하감지위 父母下鑑之位 동포응감지위同胞應鑑之位 법률응감지위 法律應鑑之位. 하지만 한자 '감'자가 가물가물해 정확하게 쓸 수가 없었다.)
     
    누워서 복도 천장의 전등을 보니 마치 빠른 자동차를 타고 도로 옆의 나무들을 보듯이 쌩쌩 지나갔다. 리투아니아 사람들은 만나고 헤어지는 순간에는 볼이나 입술에 입맞추고 인사를 한다. 예상보다 2배나 길어진 수술을 무사히 마치고 돌아오자 아내가 몹시 기뻐했다. 갑상선 수술 후 목소리를 확인하기 위해서 아내는 말을 해보라고 재촉했다. 말하기가 힘들었지만 목소리에는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

    "당신이 수술실로 들어갈 때 의도적으로 입맞춤을 하지 않았다."라고 아내가 말하면서 원만한 수술을 축하해주었다. 이렇게 리투아니아 사람들은 수술실로 들어가는 사람에게는 입맞춤으로 인사를 하지 않는다. 그 입맞춤이 생의 최후 입맞춤이 되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기 때문이다.

    수술대에 누워 심장박동 확인기를 부착하고 또 주사액이 몸 안으로 들어왔다. 이 순간 수술대 위 전등을 쳐다보면서 수술 후 저 전등을 확인하고자 하는 기대감은 정신의 몽롱감과 반대해 점점 낮아졌다.

    4시간 후인 오후 3시에 병실로 돌아왔지만 여전히 비몽사몽이었다. 마취 후유증으로 구토증상까지 일어났다. 여러 시간을 잠과 깨어남의 반복을 거듭했다. 내내 옆에서 아내가 지켜보고 있었다. 밤에 아내가 집으로 돌아가고 이젠 완전히 의식이 정상으로 돌아온 것 같았다.

    그래서 혼자 남은 병실에서 손으로 제대로 글자를 쓸 수 있을까를 가장 먼저 확인해보고 싶었다. 평소 컴퓨터 자판기로 글을 쓰는 데 익숙해 가끔씩 손으로 글을 쓰는 것이 웬지 낯설다는 느낌을 받곤한다. 수술대로 옮기는 침대에서 암송했던 일원상서원문(一圓相 誓願文)을 써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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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직 팔 손 근육이 제대로 원래대로 회복되지 않아서 그런지 볼펜이 바람에 날려가는 듯 했다. 더욱이 몇몇 한자는 기억이 가물거릴 정도로 아리송했다. 하지만 이렇게 글을 쓰고나니 수술이 원만하게 끝났음을 비로소 스스로 확인하게 되어 안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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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玉兎昇沈催老像 (옥토승침최로상)
    金烏出沒促年光 (금오출몰촉년광)
    옥토끼(달) 오르고 내려 늙음을 재촉하고
    금까마귀(해) 뜨고 져 세월을 독촉하네.

    求名求利如朝露 (구명구리여조로)
    或苦或榮似夕煙 (혹고혹영사석연)
    명예와 이익을 구함은 아침이슬 같고
    고통과 영화는 저녁연기와 흡사하네.

    勸汝慇懃修善道 (권여은근수선도)
    速成佛果濟迷倫 (속성불과제미륜)
    그대에게 은근히 선도 수행을 권하니
    빨리 불과를 이뤄 미혹중생을 구하라.

    今生若不從斯語 (금생약부종사어)
    後生當然恨萬端 (후생당연한만단)
    지금 세상에 이 말을 따르지 아니하면
    다음 세상에 당연히 온갖 한탄을 하리라.


    이 글은 보조(普照)의 [계초심학인문(誡初心學人文)], 원효의 [발심수행장(發心修行章)], 야운(野雲)의 [야운자경(野雲自警)]이 합철된 [초발심자경문(初發心自警文)]에 나오는 글로 야운 스님이 지은 글이다. 병원생활하면서 여러 차례 필사를 하면서 마음을 다져보았다.

    * 관련글:    
    Posted by 초유스
    기사모음2010. 3. 15. 05:01

    이 글은 해외에서 갑상선 수술체험기 - 진단과 수술결정에 이어지는 글이다. 이 글은 해외에서 갑상선 수술체험기 - 입원과 수술 편이다. 드디어 3월 8일 오전 빌뉴스대학교 수술병원에 속한 보건소 담당의사와 수술병동 원무과를 거쳐 병실이 있는 5층으로 왔다. 병실 배정은 간호사의 몫이었다.

    “두 청년이 있는 4인 병실이 어때요?”라고 간호사가 아내에게 물었다.
    “아참, 오늘이 여성의 날인데 꽃을 잊었네. 꽃 대신 여기 초콜릿 선물을 받으세요.”라고 옆에서 내가 끼어들었다.

    병원에서 있는 동안 혹시 친절한 간호사가 있으면 주려고 서너 개의 초콜릿을 준비했다. 순간적으로 초콜릿이 무슨 힘을 발휘했는지 간호사는 잠시 병실입실표를 살펴보더니 말을 이어갔다.

    “비어있는 2인실 병실은 어때요?”
    “좋아요.”

    이렇게 방을 배정받았다. 화장실과 세면대가 딸린 방이었다. 입원 첫 날은 2인실 방을 독방으로 쓰게 되었다. 아내는 떠나고 홀로 남은 방에서 다음날의 수술을 잊기 위해 책을 쉼 없이 읽었다. 이 날은 식사제공이 없어 병원식당에 가서 밥을 사먹어야 했다.

    서류담당 의사로부터 수술에 관한 설명을 들었고, 여러 곳에 서명했다. 수술범위가 갑상선 전체를 제거하는 것으로 적혀있었다. 지난 번 수술의사를 면담할 때는 일단 갑상선 결절을 드러내면서 즉각 세포검사를 하고 악성으로 판단되면 전체를 제거하는 것으로 협의했다는 점을 상기시켰다. 일단 서명했다. 얼마 후 수술담당 의사가 병실로 와서 지난 번 협의를 확인했고, 서류담당 의사가 새로운 서류를 작성해왔다. 기존에 서명한 서류를 내가 보는 앞에서 찢었다.

    오후에 마취의사가 찾아왔다. 그 동안 수술 경험과 마취 경험, 약물 부작용을 확인했다. 병원약국에서 수술 후 다리 근육 보호를 위한 띠 3m와 피부 접착제를 구입했다. 수술하면 봉합용 바늘과 실이 떠오르는 데 이제 접착제를 사용하는 것 같아 몹시 놀라웠다. 간호사는 수술 후 상처 표시가 거의 없을 것이라면서 안심시켰다. 수술과 회복에는 보통 2시간이 소요된다고 설명했다.

    다음날 3월 9일 10시 40분에 수술실 침대에 눕혀졌다. 저승사자가 내 침대를 끌고 가는 기분이 들었지만 눈을 부릅뜨고 바라보는 복도의 전등은 밝았다. 누운 침대는 모두 4개였다. 병실 침대, 병실에서 수술실 입구까지 이동 침대, 수술실 입구에서 수술대까치 이동 침대, 그리고 수술대 침대였다. 수술실을 주마간산(走馬看山)해보니 최신식 시설물이었다. 이어서 수술대 바로 위의 전등을 보고 있는데 정신이 몽롱함을 느끼자마자 그 후 기억은 사라졌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는지는 모르겠지만 주위가 산만했다. 내 주위에 사람들이 뭔가를 정리하는 듯했다. 눈을 떠보니 수술대 전등이 아니었다. 회복실이었다. 병실로 돌아오니 수술 시작한 후 4시간 뒤였다.

    우리는 정보를 알려줄 수 없어요 - 인상적이었다

    수술실 앞 복도에서 기다리는 사람은 아내와 장모뿐이었다고 한다. 수술시간이 길어지자 아내는 수술실에서 나오는 사람들을 붙잡고 “한국인 어떻게 되었나요?”라고 눈물을 글썽이면서 물었다. 모두가 한결 같은 대답을 했다. “우리는 정보를 알려줄 수가 없어요.” 이 대답은 이번 수술 과정에서 가장 인상적인 부분 중 하나였다. 지난 번 2차 조직검사를 했을 때 결과를 전화로 문의했다. 그때도 “담당의사외에는 정보를 알려줄 수가 없어요.”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리고 보건소에서 혈액검사 결과를 물었을 때 “우리는 검사만 하지 분석결과는 담당의사가 한다.”라는 답을 들었다.

    회복실에서 나와 병실로 와보니 믿기 어려운 일이 벌어졌다. 병실에 의자가 두 개 있는데 하나는 아내가 앉아있었고, 다른 하나는 시골에 사는 장모가 앉아있었다. 의식이 몽롱한 상태라 헛꿈을 꾸고 있는 것이 아닐까 의문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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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수술 회복실에서 병실로 옮겨진 사위의 얼굴을 쓰다듬고 있는 장모님

    이 날 장모는 아침 일찍 일어나 250km 떨어진 곳에서 기차를 타고 왔다. 빌뉴스로 오는 중에 아내에게 휴대폰 문자메세지를 보내면서 마치 시골집에 있는 것처럼 격려했다. 수술 받는 동안 수술병동에 도착한 후에야 아내에게 전화해서 정확한 위치를 물었다. 수술결과 불안에 떨고 있는 아내에게 장모의 출현은 큰 힘이 되었다. 사위와 딸에게 먼 길을 멀다하지 않고 깜짝출현으로 힘을 실어주신 장모님이 무척 고마웠다.

    수술 직후 의사는 아내에게 암이 없음을 판단해서 한 쪽만 절개했다고 말했다. 앞으로 학술연구를 위해 보건소에 가지 말고 직접 1년간 몇 차례 수술의사한테 와서 향후 갑상선 기능 검사를 하는 데 서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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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osted by 초유스
    기사모음2010. 3. 15. 05:01

    그 동안 매일 한 두 혹은 서너 개의 글을 블로그에 올렸는데, 지난주에는 그러하지 못했다. 바로 갑상선 수술로 병원에 입원했기 때문이다.

    2009년 11월 예전에 없던 증상이 나타냈다. 목 앞부분에 압박감이 가끔 오고 목 안에 이물질이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하지만 음식을 먹을 때는 때로 통증이 없었다. 이 증상이 지속되자 우선 아내에게 말했다. 아내는 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이유인즉 겨울철 중앙난방이 가동되면 집안 공기가 건조하기 때문에 누구나 쉽게 특히 목 부분에 이상 현상을 느끼곤 한다. 나 또한 오랫동안 목을 내밀고 컴퓨터를 하기 때문에 생기는 일시적인 현상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런 현상이 지속되자 더 이상 일할 의욕이 생기지 않았다. 11월에는 침대에 누워서 책을 읽는 날이 많았다. 누워있으니 다소 편함을 느꼈기 때문이다. 12월 중순 일단 혈액검사를 해보니 병의 징후가 나타나지 않았다(관련글: 5분 안에 나온 혈액검사 결과 믿어야 하나). 증상이 사라지길 바랐지만 아니었다. 그래서 한 해를 넘기기 전에 초음파검사라도 해보자고 했다.

    리투아니아에서 아프면 우선 관할지역 보건소에 있는 담당 가정의사를 방문한다. 인터넷으로 쉽게 진료를 예약할 수 있고 그 시간에 맞추어 가면 된다. 이 가정의사가 먼저 진료하고 증상에 따라 해당 보건소 전문의를 소개하고 검사를 지정해준다. 이런 절차를 밟으면 적어도 1-2주일은 쉽게 가버린다. 그래서 즉각 결과를 알 수 있는 사설 검사소와 의원을 찾았다.

    12월 30일 초음파검사 결과로 왼쪽 목 부분 갑상선에 1.57cm x 1.97cm 결절이 생겼고, 혈액순환의 활성화는 결절에서 아직 보이지 않고, 석회화 성분을 동반한 혼합 에코발생도(mixed echogenicity)임을 알게 되었다. 내분비 전문의를 찾아갈 것을 권고했다. 집으로 돌아와 아내와 함께 영어, 리투아니아어, 러시아어, 한국어의 무수한 웹사이트에서 갑상선 결절에 대한 지식을 습득하느라 새해 첫 날들을 보냈다. 아내는 리투아니아 사람들이 자신이 경험한 의사들을 평가하는 웹사이트에서 내분비 분야에 권위 있는 의사를 찾아 진료예약을 했다.

    1월 4일 그를 찾아갔다. 역시 개인의원이라서 그런지 속전속결이었다. 초음파검사를 하니 결절이 2.6cm이었다. 일주일 동안 두 차례 검사에서 결절이 1.97cm에서 2.6cm로 나오다니 몹시 의아했다. 세포병리검사를 위해 세 번이나 세침을 찔러 세포를 채취했다. 한 방 크게 맞은 듯 목은 묵직해졌다. 이 날 저녁 관련정밀혈액검사 결과를 팩스로 받아보았다. 다음 날 세포검사 결과는 양성인지 악성인지 판단하기가 불가능하다고 했다. 이로써 우리 부부의 고민은 더욱 깊어갔다. 권위 있는 의사로 알려진 사람에게서 이런 검사 결과를 받으니 앞길이 더 망망해졌다. 다음 방문에 그는 수술을 권했다. 불확실한 상태로 있는 것보다는 수술을 통해 더욱 정확하게 세포를 검사할 수 있다고 했다.

    유럽 한인들에게 비타민D 농도 검사를 권한다

    참고로 검사결과 혈중 비티민D 농도가 극소수로 나타났다. 햇볕이 강한 나라에서 태어난 나는 리투아니아 현지인보다 훨씬 더 오래 햇볕에 노출이 되어야한다고 말했다. 그 동안 제대로 산책하지 않은 결과의 과보를 받는 것 같았다. 특히 리투아니아의 겨울철 날은 짧아서 일조량이 적다. 아내는 건강이 회복되면 햇볕이 강한 남쪽 나라로 벌써 여행을 가자는 희망으로 갑상선 결절로 인한 우울감을 상쇄시키고자 했다.

    내분비 의사는 갑상선 수술을 잘 하는 친구 의사를 소개했다. 리투아니아에서 수술을 받으려면 관할지역 보건소 담당 가정의사를 거쳐야 한다. 이 가정의사는 그 동안의 검사 결과를 보고 수술이 필요하다는 소견과 함께 파견서를 작성한다. 이 파견서를 가지고 수술병원이 속한 보건소에 가서 수술절차를 밟는다. 이 때 그 동안 검사한 서류를 함께 제출한다.

    수술의사는 손으로 갑상선 부위를 짚어본 후 그 동안 검사 결과를 살펴보았다. 75% 양성에 대한 바람과 25% 악성에 대한 불안감으로 당분간 살아가야 한다. 불안감뿐만 아니라 만약 암으로 발전할 경우를 생각한다면 수술하는 것이 좋다고 결론적으로 권했다. 이렇게 수술의사를 찾은 것은 최종적으로 초음파검사와 조직검사를 다시 한 번 더 해 줄 것이라는 기대감도 있었다. 하지만 그 동안 검사 결과만을 근거로 했다. 결절이 양성인지 악성인지 불분명한 경우가 있다면서 이는 수술 중 세포검사를 통해 만약 악성이면 갑상선 전체를 제거하고, 양성이면 반쪽만 제거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2주 후 수술 일정이 잡혔다. 막상 수술하겠다고 결정했지만 날짜가 다가올수록 어떻게 피할 길은 없을까에 생각과 노력이 집중되었다. 이때 한국 의사들은 어떻게 권할까 궁금했다. 인터넷 검색을 통해 휴먼영상의학센터(관련글) 전문의상담 코너에 질문을 하니 아주 친절한 답변을 해주었다. 추가적인 조직검사를 권하고, 여포성 종양 가능성이 있다면 수술 치료가 적절하다고 했다. 양성 결절로 나올 경우 고주파로 제거하는 치료법이 있다고 했다. 수술날짜가 1주일도 채 남지 않았는데 주변 지인을 통해 초음파검사와 세침흡인 세포검사를 했다. 이번에는 빌뉴스대학병원 종양내과에서 했다. 하루 만에 나온 검사결과는 결절의 악성여부를 판단할 수 없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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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까지 병원신세를 한 번도 져보지 않았는데 영락없이 수술대에 올라야 한다고 생각하니 두렵기까지 했다. 온갖 인터넷 문헌을 뒤지고 의료계 지인들의 도움을 얻었지만 수술은 피해갈 수가 없게 되었다. 두 번째 종양내과에서 실시한 세침흡인검사는 초음파기구를 지켜보면서 결절을 휘집어 세포를 채취했다. 엄청 아팠지만 이번에는 제대로 검사결과가 나오겠지 하는 기대감으로 참았다. 그런데 결론은 첫 번째 세포검사처럼 악성여부를 판단할 수 없다고 나왔다.

    금요일 관할지역 보건소로 달려가 수술의사가 부탁한 혈액검사와 소변검사를 속성으로 받았다.

    “아빠, 수술 무서워?”
    “조금.”
    “나도 수술했잖아. 예전에 내 엉덩이가 미끄럼틀 나뭇조각에 찔려서.”


    8살 요가일래가 4살 때였다. 그때 전신마취를 했다. 전신마취를 한 후에 의식이 돌아오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까라는 두려움이 제일 앞섰다. 이렇게 보니 주위에 많은 사람들이 수술을 받았고 건강을 되찾았다. 담담하게 수술에 임하고 운명에 맡기자라는 쪽으로 마음을 굳혔다. 수술날짜를 화창한 봄날로 미루고 싶은 마음이 꿀떡같았으나 걱정을 그 때까지 가져가는 것보다 당장에 훌훌 털어버리는 것이 상책이다라는 아내의 조언이 큰 힘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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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osted by 초유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