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가일래2010. 1. 27. 09:32

월요일 음악학교에서 돌아온 딸아이 요가일래는 봉지를 주면서 빨리 해달라고 재촉했다.
봉지를 열어보니 밤이었다. 밤을 먹을 때 종종 요가일래는 이렇게 말한다.

"아빠, 어두워지면 오는 밤하고 우리가 먹는 밤이 똑 같다."
"먹는 밤은 길게 말하고, 자는 밤은 짧게 말하지."

(속으로 자는 [겨울] 밤은 기는데 왜 먹는 밤이 길까라고 혼자 생각해본다.)

지난 해 봄 이후 처음으로 사온 밤이었다. 리투아니아에는 밤이 자라지 않는다. 모두 수입품이라서 값이 비싸다. 주위에 밤을 사서 먹는 사람들을 거의 보지 못했다. 아내에게 물었다.

"비쌀텐데 당신이 어떻게 밤을 다 샀지?"
"요가일래가 자꾸 졸라서 샀지."


어리 시절 집 바로 옆에 밤나무 두 그루가 자랐다. 덜 익은 밤이지만 여름날 먹는 밤알은 참 맛있었다. 딱딱하게 익은 밤알보다 막 익기 시작한 부드러운 밤알이 더 맛이었다. 그래도 뭐니뭐니 해도 가장 기억에 남는 밤은 추운 겨울날 사랑방 화롯불에서 굽어먹는 군밤이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 리투아니아에는 밤나무가 자라지 않는다. 밤은 전부 수입품이다.

리투아니아에서 밤 1kg 값은 10-20리타스(5천원-1만원)이다. 다른 과일에 비해 비싸서 사기가 주저된다. 다른 식구들은 밤에 익숙하지가 않았다. 그런데 언젠가 요가일래가 이 밤을 먹어보더니 아주 좋아했다. 그후 조금 사오면 요가일래 것을 빼서 먹는 것 같아서 먹고 싶어도 참곤한다. 요가일래는 삶은 밤보다 생밤을 더 좋아한다.  

이날 요가일래가 잠든 후 부엌에서 혼자 밤을 깎고 있었다. 생밤을 도시락에 넣어주면 요가일래가 도시락을 열어보고 깜짝 놀라고 아주 기뻐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잠시 후 부엌에 들어온 아내가 말했다.

"그 밤 요가일래 도시락에 넣어주면 참 좋겠네."
"그럴려고 지금 깎고 있지."


혹시 아이가 잠든 사이에 혼자 밤을 먹으려고 깎고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아내가 그렇게 말할 수도 있지만 적어도 이 순간만큼은 아내와 마음이 통했다.
 
밤을 다 깎고 밤알을 그대로 넣을 것인가 아니면 쪼갤 것인가 잠시 생각해보았다. 주위 친구들에게 밤알을 나눠줄 수도 있으니 쪼개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먹기 편하게 여러 조각 쪼개서 아내가 만든 샌드위치 밑에 밤알을 넣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 생밤을 좋아하는 요가일래

다음날 학교를 마치고 돌아오는 요가일래를 맞으러 갔다. 딸아이는 도시락 이야기를 꺼냈다.

"아빠, 나 오늘 도시락 다 먹었어."
"정말?"
"열기 전에 샌드위치 밑에 있는 것이 바나나인 줄 알고 안 먹으려고 했어.
그런데 샌드위치를 다 먹고 밑을 보니 밤이잖아!"
"혼자 먹었니?"
"아니. 옆에 앉는 짝하고 친구에게도 나눠줬어."
"맛있다고 하더니?"
"맛있다도 또 달라고 했는데 부족해서 못 주었어. 다음엔 더 많이 넣어줘. 그리고 정말 고마워."

이렇게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요가일래는 덧붙었다.

"아빠, 밤하고 너도밤하고 아주 닮았다. 그런데 너도밤은 왜 못 먹지?"
"밤은 먹으면 달고, 너도밤은 먹으면 쓰다."
"너도밤을 모르는 사람이 밤이다하고 먹을 수도 있겠다. 그렇지, 아빠?"
"물론이지. 그러니 닮아도 확실하게 구별할 수 있어야지."

(이렇게 답하고도 매사에 이런 능력을 가지 못한 자신이 안스러워 보였다)   

* 최근글: 딸아이의 첫 눈썹 메이크업에 웃음 절로

<아래에 손가락을 누르면 이 글에 대한 추천이 되고,  더 많은 사람들이 이 글을 읽을 수 있게 됩니다.>
Posted by 초유스
생활얘기2009. 3. 3. 14:55

동유럽에서 20여년을 살면서 가장 먹고 싶은 과일 중 하나가 '밤'이었다. 어릴 적 시골 마을에는 약 100호 정도가 약 100호가 살았다. 하지만 밤나무가 자라는 집은 두 집밖에 없었다. 우리 집에는 두 그루가 살았고, 바로 앞집에는 한 그루가 자랐다. 초가을부터 이 밤 덕분에 친구들이 자주 어울리게 되었다.

갓 익어가는 생밤의 겉껍질은 벗기기는 쉽고, 속껍질은 수고를 들어야 한다. 하지만 오래 씹을수록 달콤한 맛이 나서 늘 그 밤맛이 그리웠다. 겨울철 사랑방 화롯불에 밤을 구워 먹은 일은 늘 추억 속에 그대로 남아있다.

몇 해 전 큰 상점에서 프랑스산 밤을 산 적이 있었다. 당시 1kg에 15리타스(약 8천원)했고, 거의 반도 먹지 못하고 버려야 했다. 돈 버리고, 입맛 버리고 해서 더 이상 밤을 사지 않기로 해다. 하지만 난데없이 며칠 전 아내가 약간의 밤을 사가지고 왔다. 크기를 보니 어린 시절 먹던 밤과 비슷했다.

"당신이 어떻게 밤을 다 사가지고 와?"
"보니까 싸서 한 번 사봤지."

"1kg에 얼마?"
"6리타스(3천원)!"

"정말 싸다. 옛날의 반값도 안 되네!"
"먹어보고 맛이 좋으면 더 많이 삽시다!!!"

경제 불황 덕분에 값이 내려 이렇게 밤을 사먹을 수 있다고 생각하니 씁쓸하지만 순간 웃음이 나왔다. 우선 생밤을 먹으니 옛날 샀던 프랑스 밤과는 달랐다. 생기가 살아있었다. 삶아서 먹으니 한국에서 먹던 밤맛 그대로였다.

딸아이 요가일래가 밤을 먹더니 말을 꺼낸다.

"아빠, 이 밤과 저녁이 되면 오는 밤이 똑 같다."
"하지만 발음의 길이가 다르지."

"아빠, 한국말은 정말 재미 있다. 봐, 먹는 배도 배고, 물에 타는 배도 배고, 사람 몸에 있는 배도 배다. 배, 배, 배 세 개가 다 똑 같네. 리투아니아말은 세 개 다 다르다."

밤을 맛있게 먹고 다시 상점에 가서 밤을 사기로 했다. 원산지가 중국이었다. 하도 사방에서 중국 농산물이 위험스럽다고 하니 좀 머뭇거렸다. 하지만 어린 시절 밤나무에 농약을 칠하는 것을 본 적이 없어서 일단 안심하고 한 봉지 가득 사가지고 왔다. 리투아니아 친구들이 오면 이 밤맛을 보여주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Posted by 초유스
사진모음2008. 10. 6. 06:58

가을이 되면 늘 떠오르는 과일이 있다. 바로 밤이다. 당시 우리 시골엔 100여집이 있었다. 밤나무는 유일하게 우리 집밖에 없었다. 바로 우리 집 옆 산비탈에 큰 밤나무 두 그루가 자랐다. 밤색이 될 때까지 기다릴 수가 없어서 안 익은 밤도 주저 없이 따먹었다. 오래 씹으면 씹을수록 고소한 맛을 내는 그 밤... 벌레 먹지 말라고 모래 속에 넣은 밤을 꺼내 겨울밤에 화롯불에 굽어먹던 그 시절이 정말 그립다.

간혹 스페인과 프랑스 밤을 사보았으나 비쌀 뿐만 아니라 크기가 작고, 반 이상을 버리게 더 이상 사지 않았다. 그래서 그런지 비록 먹을 수는 없지만, '밤' 비슷한 유럽의 '너도밤'을 보니 정감이 간다. 언젠가 이 '너도밤'을 정말 먹을 수가 없을까 하고 한 번 오기를 부려 살짝 깨물어보았다. 바닷물이 짠다하면 짠 줄을 알고 먹지를 말지 괜히 믿지 못하고  먹다가 낭패를 당하는 꼴이 된 적이 있었다.

오늘 딸아이와 산책을 하면서 "먹지는 못하지만, 집안 장식물로 사용할 수 있으니 집에 가져가자!"하면서 몇 알을 주었다. 봄부터 가을까지 유럽의 너도밤나무 모습을 사진으로 담아보았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 삼월 하순경 돋아나는 너도밤나무 새싹
사용자 삽입 이미지
      ▲ 5월 초순 활짝 피어나는 너도밤나무꽃
사용자 삽입 이미지
      ▲ 하얀색에 분홍색이 약간 펴져 있는 너도밤나무꽃
사용자 삽입 이미지
      ▲ 구월 중하순경 익으면 밤처럼 바깥껍질이 절로 터진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 너도밤나무 열매
사용자 삽입 이미지
      ▲ 너도밤을 조심조심 줍고 있는 요가일래
사용자 삽입 이미지
      ▲ 가시가 듬성듬성 있지만 그래도 찔리면 아프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 지고 있는 너도밤나무 잎들
사용자 삽입 이미지
      ▲ 오월 너도밤나무(좌)와 9월 너도밤나무(우): 이렇게 세월은 흘러간다.

Posted by 초유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