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페란토2021. 1. 16. 03:22

1990년 헝가리 엘테대학교에서 에스페란토학을 전공할 때 부다페스트에 살고 있는 에스페란토 도서 및 정기간행물 등을 수집하는 퍼이시 카로이를 방문했다. 그의 아파트에서 1938년과 1939년 홍콩에서 발행된 <Orienta Kuriero> 잡지에 실린 안우생(Elpin)의 글을 찾아냈다. 안우생(1907-1991)은 안중근의 동생 안공근의 장남이다. 
 
이후 여러 해를 거쳐 헝가리, 오스트리아, 네덜란드, 스페인 등지의 도서관에서 그의 글들을 직접 수집했다. 2004년 한국에스페란협회 《Verkoj de Elpin - 안우생 문집》을 발행했다. 이 책에 실린 작품수는 총 40편이다. 자작시 3편, 번역시 14편, 원작 단편소설 2편, 번역 단편소설 12편, 번역 극본 4편, 기타 5편이다[관련글: 안우생의 도연명 <도화원기> 에스페란토 번역본을 찾다]. 
 
당시 간행물에서 중국에서 활동하는 한국인 에스페란티스토로 추정되는 사람들의 글도 함께 복사했다. 지난해 11월부터 리투아니아에서 살면서 매주 수요일 한국에 살고 있는 에스페란티스토들에게 안우생의 문학작품 공부를 줌(Zoom)으로 지도하고 있다. 원문을 찾아볼 일이 생겨 30여년 전에 복사한 자료집을 꺼내서 종종 살펴보곤 한다. 
 
얼마 전에 임철애(Im Ĉol Aj)가 쓴 <La vivstato de koreaj virinoj>(조선 여성들의 생활상)가 우연히 눈이 띄었다. 이 글은 1938년 8월호 《Orienta Kuriero》에 게재되었다. 임철애라는 사람은 누구일까?
 
1938-1939년 홍콩에서 발행된 간행물 <Orienta Kuriero>
구글 검색을 통해 쉽게 알게 되었다. 바로 박차정(1910.05.07-1944.05.27) 의사가 중국에서 독립운동을 할 때 사용한 이명(異名) 중 하나가 바로 임철애(林哲愛 에스페란토 표기 Im Ĉol Aj)다. 그는 1910년 부산에서 태어나 1929년 근우회(일제 강점기에 조직된 여성 단체) 사건으로 옥고를 치르고 1930년 말 중국 북경으로 망명해 화북대학에서 수학했다. 
 

1938년 8월호에 게재된 임철애의 <조선 여성들의 생활상>

1931년 의열단 단장인 약산 김원봉과 결혼했다. 1935년 조선민족혁명당 부녀부 주임, 1938년 조선의용대 부녀복무단장으로 선임되었다. 1939년 2월 일본군을 상대로 전투를 하던 중 부상을 입고 그 후유증으로 1944년 충칭(중경)에서 사망했다. 
1945년 12월 박차정(임철애)의 유해가 국내로 송환되어 김원봉의 고향인 밀양 송산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관련글: 박차정 묘소 가는 길]. 그가 태어난 부산 동래에는 그의 생가가 2005년 복원되어 있다[관련글: 박차정 생가 가는 길].
 
또 다른 의미있는 글은 조선민족혁명당의 호소문 <Leviĝu Koreoj!>(조선인이여 일어나라!)다. 이 호소문은 1937년 8월 25일에 발행된 《Ĉinio hurlas》에 게재된 글로 번역문이 아니라 에스페란토 원문으로 되어 있다. 

 

중일전쟁 발발 직후 나온 조선민족혁명당의 에스페란토 원문 호소문
한편 1939년 9월 1일 발행된 《Heroldo de Ĉinio》 제5호에 실린 <Nova Korea Unueco kontraŭ Japana regado> 기사 중 김약산(김원봉)이 ‘Bomba Kim’로 알려져 있다는 것이다. 이는 그가 폭발물을 잘 다루는 데서 붙여졌다고 한다. 에스페란토로 bombo는 폭탄의 명사형이고 bomba는 폭탄의 형용사형이다.   
 
1939년 9월 1일 발행된 간행물에 김약산이 "Bomba Kim"으로도 알려져 있음을 언급
늦었지만 이제 박차정(임철애)은 독립운동가로서뿐만 아니라 에스페란티스토로서도 재조명되길 바란다. 특히 2022년 부산에서 열릴 아시아에스페란토대회 중 그의 생가를 방문하거나 일본침략에 맞서서 한국과 중국의 협력에 생을 마친 그의 삶을 조명하는 일도 의미가 있을 것이다.

임철애_박차정_조선민족혁명당.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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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초유스
기사모음2010. 3. 1. 0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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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1일을 즈음해서 늘 한국의 독립운동에 헌신한 사람들이 떠오른다. 리투아니아도 오랜 세월 동안 제정 러시아와 소련의 지배를 받았다. 살벌하기 짝이 없는 소련 시대의 비밀경찰 KGB의 눈을 피해서 금서들을 펴낸 리투아니아인을 여러 해 전에 만났다.

북동유럽 리투아니아 제2의 도시 카우나스 교외에 살고 있는 비타우타스 안줄리스(79)이다. 그는 1980년 양봉을 하면서 민족주의자 워자스 바제비츄스를 알게 되었고, 이들은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서적과 신앙심을 키우는 종교서적을 펴내기로 뜻을 모았다.

이들은 각자 성의 첫 글자를 따서 'ab'라는 비밀인쇄소를 만들어, 1990년 리투아니아가 소련에서 독립할 때까지 10여년 동안 철저히 금지된 반체제와 종교 관련 서적들을 몰래 인쇄해 보급했다.

이 비밀인쇄소는 기막히게 숨겨져 있다. 비타우타스는 언덕 비탈에 위치한 온실에 시멘트 구조물로 수조와 묘목판을 만들었다. 이 묘목판 중앙에는 관수용 수도관을 세웠다. 이 수도관을 돌리면 기계가 작동해 수조를 이동시켜서 묘목판과 수조 사이에 틈이 생긴다. 이 틈이 바로 비밀인쇄소로 들어가는 문이다. 그는 2년에 걸쳐 30m 굴을 경사지게 파고 중간 중간에 철문을 세워놓았다. 비밀인쇄소는 지하 7m에 위치해 있다.

비타우타스는 고물 인쇄기 3대를 구해 직접 인쇄기 1대를 만들었다. 10년 동안 23개 책제목 138,000부를 찍었다. 가장 위험하고 아끼는 책은 1939-40년 스탈린과 히틀러가 발트 3국을 분할 점령한 내용을 담은 책이다. 현재 당시 사용했던 인쇄기와 서적 등을 보존 전시해 방문객들에게 역사 현장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근대 리투아니아 지배 체제로부터 탄압받은 출판 역사에 관한 많은 자료를 전시해놓았다. 그의 개인 박물관은 이제 리투아니아 국립 비타우타스 전쟁박물관 분원되었다. 당시 비밀경찰 KGB는 어디에서 누가 이런 금지된 서적들을 인쇄하는지 끝내 밝혀내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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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밀인쇄소 입구 앞에서 비타우타스 안줄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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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타우타스(가운데), 비타우스 부인(오른쪽), 그리고 요가일래와 엄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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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타우타스님께 한국에서 가져온 기념품을 선물

일가족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금서를 펴낸 이유를 묻자, 그는 "총보다 인쇄물을 더 무서워한다는 것을 알게 되어 인쇄 일을 하는 내가 인쇄했을 뿐이다."라고 겸손하게 말했다. 그를 만날 때마다 이런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역사는 변화한다."고 확신하게 된다.

* 최근글: 한국 스티커 때문에 폭로협박에 눈물 흘리는 딸아이

Posted by 초유스
기사모음2008. 9. 2. 2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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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마다 광복절을 즈음해서 마음 속에 떠오르는 사람이 있다. 해방 후 행적이 묘연해서 일반인들에게 널리 알려지지 않았지만, 한국독립운동사과 중국에스페란토운동사에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인물인 안우생이다.

그는 1909년 이등박문을 사살한 안중근 의사의 막내 동생 안공근의 장남으로 1907년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안공근은 전 가족과 함께 1922년에 상해로 이주하여 김구의 측근으로서 독립운동에 활약했다. 이에 안우생도 1939년경 중경에 가서 항일전선에 참가하여 독립운동을 했으며, 1942년 9월 임시정부 개편 이후 편집부의 과원으로 활동했다.

해방 이후에는 고국으로 돌아와 김구의 대회담당비서로 일했다. 그의 민족통일에 대한 신념과 노력은 김구, 김규식을 비롯한 민족주의자들의 남북연석회의 참가를 가능하게 하였다. 이 남북연석회의에 김구를 수행했던 그는 1946년 홍콩으로 간 후에 아무런 소식 없이 자취를 감추었다.

그러던 중 40년 후인 1986년 4월 19일 북한 노동신문에 “민족대단합의 위대한 경륜 - 남북연석회의와 김구선생을 회고하면서”라는 논문이 안우생 이름으로 발표되었다. 일본 관서에스란토연맹 기관지에 이 논문의 저자가 바로 안우생이라는 기사가 실려 안우생의 생사를 몹시 궁금해 하던 많은 에스페란티스토들에게 기쁨을 주었다. 이후 한국 언론이 그가 1991년 2월 북한에서 생을 마감하였다는 소식을 전했다.

그는 한국어, 러시아어, 중국어, 영어, 불어, 에스페란토를 구사한 어학의 기재(奇才)로 알려진 인물이다. 그와 교분을 쌓은 중국 에페란티스토들은 그가 특히 문학에 남다른 관심과 재능을 가졌다고 말했다. <한국 에스페란토 운동사>에서 그는 ‘엘핀’(Elpin)이라는 필명으로 중국의 대표적 애국문학가인 루쉰의 소설 ‘광인일기’, ‘고향’, ‘백광’을 에스페란토로 번역했다는 글을 읽고 그에게 관심을 돌리기 시작했다.

한국인으로 중국 근대문학의 최초 소설인 ‘광인일기’를 번역했고, 그가 번역한 소설 세편이 책의 4분의 1을 차지한 것 등에서 그의 에스페란토 실력과 위상을 짐작할 수 있다. 그렇다면 루쉰 소설을 번역한 세 작품 외에도 다른 역작이나 원작이 분명히 더 있을 확률이 높다는 판단이 섰다. 헝가리에서 에스페란토학을 공부하면서 1991년부터 헝가리, 오스트리아, 스페인, 네덜란드에서 여러 편의 그의 문학작품들을 수집했다.

당시 세계적으로 권위 있던 문학잡지 <문학세계>(Literatura Mondo) 1934년 11월호에 게재된 안우생의 번역작품 김동인의 ‘걸인’과 함께 두권의 책(<루쉰문선>, <루쉰소설집>(Noveloj de Lusin), 네 개의 정기간행물(<원동사자>, <동방호성>, <중국보도>, <문학세계>)에서 모두 40편에 달하는 작품을 찾아낼 수 있었다. 거의가 1938-40년 중국의 홍콩, 청두, 중경에서 발간된 것들이다. 이것은 전부 에스페란토로 되어 있고, 원작시 3편, 번역시 14편, 원작소설 2편, 번역소설 12편, 번역희곡 4편 그리고 기사 5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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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계적으로 권위있는 문학잡지 〈Literatura Mondo〉의 1934년 11월호에 게재된 안우생의 번역작품 김동인의 '걸인'

필자가 이렇게 수집한 40편 작품을 2004년 한국에스페란토협회는 "Verkoj de Elpin"(안우생 문집)이라는 제목으로 단행본을 발간했다. 이를 근간으로 2004년 한국외국어대학교 이영구 교수는 "Elpin의 문학세계"라는 책을 펴냈다. 해방 후 북한에서 살면서 한 에스페란토운동과 문학활동에 관한 자료를 전혀 구할 수 없었던 것이 가장 안타까웠다. 필자는 통일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다. 이유 중 하나는 바로 그의 문학작품들이 북한 어딘가에 더 있으리라 믿기 때문이다.

Posted by 초유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