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잡지 기고글'에 해당되는 글 92건

  1. 2011.11.29 KGB가 몰랐던 비밀인쇄소
  2. 2011.11.29 삶은 호수 위를 흐른다
  3. 2011.11.29 핀란드 농부, 휴가비에 룰루랄라
  4. 2011.11.29 28인용 ‘유로킥보드’ 출현!
  5. 2011.11.29 “나는 냄비만 모은다”
  6. 2011.11.29 어! 리투아니아도 대통령 탄핵
  7. 2011.11.29 '에스페란토’로 항일을 노래하다
  8. 2011.11.29 생맥주와 턱수염의 괴력!
  9. 2011.11.29 리투아니아 대통령 이러다 잘릴라
  10. 2011.11.29 교도소 미인대회가 남긴 대박
  11. 2011.11.29 늑대사냥꾼 “늑대와 춤을”
  12. 2011.11.29 텃밭과 아파트를 오가며
  13. 2011.11.29 다양한 점술 놀이로 새해를 맞는다
  14. 2011.11.29 하루종일 ‘삽질’하는 여인
  15. 2011.11.29 칼리닌그라드는 ‘낙동강 오리알’
  16. 2011.11.29 구 소련 우상들 숲 속에서 ‘동거중’
  17. 2011.11.29 충격! 발트해는 화학무기 쓰레기장
  18. 2011.11.29 여성 운전자와 접촉 사고
  19. 2011.11.29 허걱! 모래를 밥으로 냠냠 …
  20. 2011.11.29 아파트를 탈출한 ‘타잔’
  21. 2011.11.29 리투아니아가 노래에 빠진 날
  22. 2011.11.29 女배우는 하늘로, 男가수는 감옥행
  23. 2011.11.29 여름엔 자나 깨나 개조심
  24. 2011.11.29 까마귀야, 요 맛있는 것들아!
  25. 2011.11.29 리투아니아 "그리운 나폴레옹"
  26. 2011.11.29 가자 국민투표, 오라 유럽연합
  27. 2011.11.29 여죄수미인대회 - 그래도 우리는 아름답다
  28. 2011.11.29 리투아니아는 역술인 맘대로
  29. 2011.11.29 '일본판 쉰들러'를 아시나요
  30. 2011.11.29 선거사범이 없는 나라

[비타우타스 안줄리스] KGB가 몰랐던 비밀인쇄소

빌뉴스= 글 · 사진/ 최대석 자유기고가 chtaesok@hanmail.net

과거 무시무시했던 옛 소련의 비밀경찰 KGB의 눈을 피해 금서들을 펴낸 비타우타스 안줄리스(74). 그는 1980년 양봉을 하면서 민족주의자 워자스 바제비추스를 알게 되고, 이들은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서적과 신앙심을 키우는 종교서적을 펴내기로 뜻을 모았다. 각자 성의 첫 글자를 따서 ‘ab’라는 비밀인쇄소를 만들어, 1990년 리투아니아가 옛 소련에서 독립할 때까지 10여년 동안 철저히 금지된 반체제와 종교 관련 서적들을 몰래 인쇄해 보급했다. 

이 비밀인쇄소는 기막히게 숨겨져 있다. 비타우타스는 언덕 비탈에 위치한 온실에 시멘트 구조물로 수조와 묘목판을 만들고 묘목판 중앙에는 관수용 수도관을 세웠다. 이 수도관을 돌리면 기계가 작동해 수조를 이동시켜서 묘목판과 수조 사이에 틈이 생긴다. 이 틈이 바로 비밀인쇄소로 들어가는 문이다. 그는 수개월에 걸쳐 은밀히 길이 30m의 굴을 경사지게 파고 중간중간에 철문을 세워놓았다. 비밀인쇄소 바로 위가 부엌이고, 부엌과 인쇄소에 벨을 설치해 외부와 의사소통할 수 있게 했다. 마치 첩보영화를 보는 듯했다. 

난공불락의 지하 요새 같은 비밀인쇄소의 내부는 인쇄에 필요한 활자와 활자판을 보관한 방과 인쇄기가 있는 방으로 되어 있다. 비타우타스는 고물 인쇄기 3대를 구해 직접 인쇄기 1대를 만들어 10년 동안 수만권의 책을 펴냈다. 그가 가장 아끼는 책은 1939~40년 스탈린과 히틀러가 발트해 3국을 분할 점령한 내용을 담은 책이다. 현재 당시 사용했던 인쇄기와 서적 등을 잘 보존 전시해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역사 현장을 보여주고 있다. 그의 집 3층 넓은 방엔 리투아니아의 근대와 현대의 지배 체제로부터 탄압받은 출판 역사에 관한 많은 자료를 전시해놓았다. 

당시 비밀경찰 KGB는 어디에서 누가 이런 금지된 서적들을 인쇄하는지 끝내 밝혀내지 못했다. 일가족 몰살의 위험을 무릅쓰고 금서를 펴낸 이유를 묻자, 그는 “언론출판 자유를 통해 역사의 진실과 정의는 어느 시대라도 밝혀져야 한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다. 나의 아버지는 소련 점령 초기 지하 간행물을 발간하다가 감옥살이를 했다. 나 또한 누군가가 자신의 생명을 두려워하지 않고 이 일을 해야 한다고 확신했을 뿐”이라고 겸손하게 말했다. 

* 이 기사는 한겨레21 제515호 2004년 7월 1일자로 이미 보도된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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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영의 천국’ 리투아니아의 호수 여행… 숲과 산새와 잔잔한 물소리의 환상적인 조화 

빌뉴스= 글 · 사진/ 최대석 자유기고가 chtaesok@hanmail.net 

리투아니아는 야영의 천국이다. 최근 리투아니아 북동부에 자리잡은 아욱쉬타이티야 국립공원에 현지인들과 함께 2박3일 야영을 다녀왔다. 유럽 대륙의 중앙에 위치한 리투아니아는 평야, 구릉 등으로 이뤄져 산이 거의 없다. 가장 높은 산이 고작 294m이다. 산이라기보다는 그저 큰 언덕이다. 하지만 강과 호수가 도처에 흩어져 있다. 길이가 10km 넘는 강과 시내가 758개, 면적이 0.5ha를 넘는 호수가 2830개에 이른다. 특히 아욱쉬타이티야 국립공원에는 크고 작은 호수들이 강이나 시내 또는 개천 등으로 서로 거미줄처럼 연결되어 있다. 

△ 호수와 호수를 이으며 유유히 흐르는 시냇가의 울창한 숲 속엔 새들의 아름다운 지저귐이 끊임없이 들린다.

이 호수 저 호수로 옮겨다니며… 

울창한 숲을 함께 지닌 이 지역은 리투아니아를 ‘호수의 나라’로 불러도 손색이 없을 듯하다. 여름철 이 지역은 해수욕장 못지않게 삼림욕과 호수욕을 즐기면서 야영하는 사람들로 몹시 붐빈다. 산악지대의 계곡에서는 아찔하고 격렬한 래프팅을 할 수 없지만 노를 저으며 이 호수 저 호수로 옮겨다니면서 울창한 소나무 숲에서 야영을 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주 5일 근무를 마치고 주말을 이용해 뱃놀이 야영을 즐기는 직장 동호회도 많다. 기업의 단합대회 장소로도 활용된다. 

이번에 함께한 동아리는 언어가 다른 민족간 상호 이해와 평화를 지향하는 에스페란토를 쓰는 사람들의 모임 ‘유네쪼’다. 이런 행사는 해마다 치러지는데 올해가 38번째이다. 참가자들은 30~40대로 국회의원, 펀드매니저, 번역사, 교사, 건축설계사 등이다. 보통 이곳의 야영지는 문명의 세계와 거리가 멀다. 식당이나 가게가 몇km나 떨어져 있다. 따라서 먹을거리들은 미리 준비해야 한다. 2박3일을 호수와 숲 속에서 지내려면 개인 준비물이 여간 무겁지 않다. 초여름이라 리투아니아 숲엔 낮에도 모기가 극성을 부린다. 어디서 사람 냄새를 맡았는지 순식간에 모기떼가 몰려와 머리가 쭈뼛 설 정도로 끝없이 공격해온다. 밤 10시가 넘어도 서쪽 하늘은 어두워질 줄 모른다. 모닥불을 피워놓고 기타 반주에 맞춰 부르는 이들의 그윽한 노랫소리는 소나무 가지 사이로 내리 비치는 달빛과 어울려 영혼 깊숙이 와 닿았다. 

다음날 아침 실개천으로 서로 이어져 있는 호수의 두 섬 안으로 빠져 들어가니 아주 작은 또 다른 호수가 나타난다. 군데군데 쓰러진 나무로 인해 어렵게 실개천을 따라 아담하고 잔잔한 호수에 들어오니 꼭 어머니 뱃속에 들어온 듯 평화롭다. 생일을 맞은 참가자들을 위한 즉석 축하연이 벌어지기도 했다. 배를 서로 묶어 둥글게 만든 뒤 축하와 선물을 받고 간식을 먹는다. 야생화 화관을 비롯해 즉석에서 생각해낸 기발한 선물들이었다. 어떤 이는 카메라 필름통을 선물로 주면서 나중에 열어보라고 말한다. 그 안에는 알사탕이 들어 있다. 어떤 이는 놀려주기 위해 밑에 살짝 구멍을 내놓은 캔맥주를 주기도 한다. 야영 행사의 절정은 바로 새내기 신고식이다. 기존 참가자들은 첫 참가자들에게 여러 짓궂은 과제를 주고, 과제를 잘 마치면 호수의 물을 머리 위에 듬뿍 뿌리는 것으로 끝난다. 

리투아니아인들의 주말이 부럽다 

이렇게 2박3일 동안 호수 11개와 시내 및 개천 8개를 통과했다. 잔잔한 호수, 풍랑 이는 호수, 기다란 호수, 작은 호수 등 다양하다. 잔잔하고 긴 호수를 건널 때에는 하모니카와 기타가 단조로운 철썩 소리를 대신해 귀를 즐겁게 해준다. 좁고 물살이 센 시내에는 여기저기 겨울에 덮인 눈을 이기지 못해 넘어진 전나무나 비버가 갉아 넘어뜨린 나무들이 가로놓여 있다. 이를 헤치고 지날 때면 등에 땀이 흐를 정도로 긴장된다. 하지만 고요한 시냇물을 따라 떠내려가면서 듣는 새들의 지저귀는 소리는 모든 피로를 말끔하게 씻어준다. 청둥오리가 앞서 날면서 길을 안내해주는 듯했고, 우아한 백조도 다가와 환영해주는 듯했다. 달이 둥실 떠 있는 하늘 아래 언덕 위에 홀로 우뚝 선 성스러운 참나무에 모두 손을 대고 각자의 소원을 빌 땐 신비감마저 들었다. 주말이나 휴가철이면 일손을 놓고 호수나 숲을 찾아 자연과 밀착해 살아가는 리투아니아인들의 삶이 몹시도 부러웠다. 

* 이 기사는 한겨레21 제514호 2004년 6월 24일자로 이미 보도된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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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니 카우피넨] 핀란드 농부, 휴가비에 룰루랄라

빌뉴스= 글 · 사진/ 최대석 자유기고가 chtaesok@hanmail.net

“핀란드 농부는 휴가비까지 지원받는다.” 

핀란드인 농민인 온니 카우피넨(50)은 첨단 선진 농민의 빛과 그늘을 잘 보여준다. 얼마 전 리투아니아 수도 빌뉴스에서 열린 농업박람회에 참석한 그에 따르면 핀란드 정부는 농부의 연간 휴가 25일을 전액 지원한다. 정부는 또 고용된 인부의 연간 125시간의 노동시간 비용을 농부와 반반씩 나눠 부담한다. 즉, 그가 휴가를 보낼 때 그를 대신해 농사일을 할 인부에게 정부가 임금을 지급하는 셈이다. 그 인부도 관청에서 알선한다. 이런 정부 지원 덕에 해마다 느긋하게 해외여행을 즐긴다. 

정부 지원이 있어 좋긴 하지만 성가신 신고 의무도 많다. 젖소 수뿐만 아니라 이들의 신상변동과 관련해서도 일일이 관청에 신고해야 한다. 가령 젖소 새끼가 태어난 뒤 4일, 젖소가 병이 든 뒤 10일 안에 신고해야 한다. 제때 신고하지 않으면 벌금 350유로를 물어야 한다. 아내가 먼저 저 세상으로 떠나는 바람에 경황이 없어 제때 신고를 못했더니 800유로를 물어야 했다. 심지어 경작하는 곡물과 규모도 낱낱이 신고해야 한다. 가끔 관청에서 위성사진을 찍어 실지 경작규모를 확인하기 위해 농장을 방문하기도 한다. 

헬싱키에서 북쪽으로 500km 떨어진 그의 농장은 45ha 초원과 45ha 숲으로 이뤄져 있다. 그는 혼자 이 넓은 농장을 단지 네대의 트랙터로 경작한다. 그는 젖소 50마리를 길러 우유와 고기를 파는 한편, 사료용 귀리와 보리 등도 경작한다. “내가 젖을 짜는 것이 아니고 젖소들이 스스로 자기 젖을 짠다”는 그는 길이 든 젖소는 젖이 일정량이 되면 착유 로봇에 다가가 스스로 젖을 짠다고 말한다. 그는 “기계화와 전산화 덕분에 별다른 어려움 없이 일을 한다”고 덧붙인다. 

그의 요즘 걱정은 최근 동유럽 등 10개국의 유럽연합(EU) 가입에 따른 치열해질 농업 경쟁의 거센 파고다. 핀란드는 1995년 EU 가입 전에는 쇠고기 1kg에 4유로를 받았으나 지금은 1유로밖에 못 받는다. 그래도 휴가비까지 지원받는 핀란드 농민들은 농산물 개방 압력으로 생사의 기로에 서 있는 한국 농민들에겐 부러움의 대상일 뿐이다. 

* 이 기사는 한겨레21 제512호 2004년 6월 10일자로 이미 보도된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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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기르다스 노메이카] 28인용 ‘유로킥보드’ 출현!

빌뉴스= 글 · 사진 최대석/ 자유기고가 chtaesok@hanmail.net 

“유럽연합이 킥보드에 올라탔다.” 



리투아니아는 1990년 옛 소련에서 독립한 지 14년 만인 5월1일 유럽연합 회원국가가 됐다. 알기르다스 노메이카는 이런 중요한 역사적 전환기에 리투아니아 어린이들 사이에 큰 인기를 누리고 있는 킥보드를 만들었다. 길이가 무려 9.9m, 폭이 1.53m이다. 이 초대형 킥보드에 유럽연합을 상징하는 색을 칠하고 ‘유로킥보드’라 이름지었다. 노메이카는 폴크스바겐 딱정벌레차를 우선 반으로 잘라 앞과 뒷부분을 6m 철골로 이었다. 이 철골 위에 승객 24명이 서서 탈 수 있는 입석을 만들었다. 승객들이 한쪽 발로 땅을 차면 킥보드가 앞으로 나아간다. 운전자를 위한 자리와 앉아 가는 승객을 위해 세 자리가 더 마련돼 있다. 그는 “승객과 운전자를 위한 25자리는 유럽연합 회원국 25국을 상징하고, 여분으로 만든 좌석 3자리는 앞으로 가입할 3개국을 의미한다”라고 설명했다. 

파란색으로 칠한 앞부분엔 유럽연합 깃발의 별들을 장식했고, 뒷부분엔 유럽연합 모든 국가들의 국기를 세웠다. 2.5t의 무게를 견디도록 철골 구조로 설계했고, 원래 차 모습으로 복원되도록 아주 쉽게 조립할 수 있다. 최고 시속은 약 28km지만, 속도는 승객 24명이 얼마나 잘 호흡을 맞추면서 땅을 차느냐에 달려 있다. 이는 곧 유럽연합 회원국간 얼마나 잘 협력하느냐에 따라 그 성공이 결정됨을 의미한다. 

그는 많은 차들 가운데 장난감처럼 아름답게 보이는 이 유로킥보드를 운전하기가 가장 힘들다고 토로한다. 킥보드 무게는 700kg에 달한다. 누군가의 발이 행여 실수로 킥보드 밑으로 들어가지 않도록 매순간 신경을 곤두세워야 한다. 킥보드를 한번 운전하고 나면 며칠간 팔이 아플 정도다. 그는 “이 킥보드는 엔진이 24기통이다”라고 말했다. 그는 평소 초대형 물건 만들기를 좋아한다. 2003년에 부활절 계란 3만3천개로 길이 10.4x10.4m, 높이 6.5m 크기로 세계 최고의 피라미드를 만들었다. 지난 4월에는 리투아니아에서 가장 큰 1305.72㎡의 국기를 제작했다. 이제 노메이카는 유로킥보드가 세계 기네스북에 오를 그날을 고대하고 있다. 

* 이 기사는 한겨레21 제511호 2004년 6월 3일자로 이미 보도된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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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출리스] “나는 냄비만 모은다”

빌뉴스=글 · 사진 최대석/ 자유기고가 chtaesok@hanmail.net

라트비아와 접경지대에 있는 리투아니아 소도시 자가레시의 동서를 가로지르는 거리를 지나가다 보면 낡은 냄비들이 빽빽이 주렁주렁 걸려 있는 이색적인 가옥이 눈에 확 들어온다. 이 가옥의 주인은 에드문다스 바이출리스(45)이다. 그는 7년 전부터 알루미늄 냄비를 모아 자신의 목조가옥 외벽과 지붕에 붙이는 별난 취미를 갖고 있다. 

그는 “어느날 집에 있는 더 이상 쓸모없는 알루미늄 냄비를 어떻게 처리할까 고민하다가 벽에 걸어놓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고 말한다. 그 뒤 냄비가 생기는 족족 벽에 못질을 해 붙였다. 이 기괴한 모습에 주위 사람들이 구경을 오고 또 자신들의 냄비를 기증하거나 팔기도 한다. 

그의 가옥은 수백 개의 크고 작은 다양한 냄비들이 걸려 있는 탓에 ‘옥외 냄비박물관’을 방불케 한다. 초라한 목조가옥이 이젠 이 지방의 관광명소로 변했다. 걸려 있는 냄비의 개수를 묻자 그는 “나도 모른다. 수집가는 수집된 물품의 개수를 헤아리지 않는다”고 답했다. 적으면 실망해서 중도에 포기할 수도 있고, 많으면 만족해서 그만해야겠다는 마음도 생길 수 있기 때문에 개수를 헤아리지 않는 것이 진정한 수집가의 태도라는 설명이다. 


초기에 냄비들의 몰골이 워낙 볼썽사나워 시청에서 도시 미관을 해친다고 철거하라는 명령까지 왔었다. 하지만 “자기 집 장식을 자기 마음대로 하는 자유도 없냐”며 냄비 수집을 멈추지 않았다. 지금은 시의 큰 볼거리가 되었으니, 시도 싫어하지 않는 눈치다. 그는 다양한 옛 물건들도 모은다. 그의 살림집 안으로 들어가면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수세기 전 과거로 회귀하는 느낌이 든다. 옛 사람들이 사용하던 촛대, 종(鐘), 각종 식기(食器), 동전, 차주전자를 비롯해 마당 앞 개울에서 발견한 석기시대 돌도끼, 고대시대 팔찌, 1700년대 주화 등 진귀한 물건이 즐비하다. 

* 이 기사는 한겨레21 제508호 2004년 5월 3일자로 보도된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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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리포트] 

리투아니아 빌뉴스/최대석〈자유기고가〉chtaesok@hanmail.net

공교롭게도 필자가 태어난 나라와 살고 있는 나라의 현직 대통령 모두 올해 임기가 만료되는 국회에 의해 역사상 최초로 탄핵소추를 받았다. 3월 12일부터 권한이 정지된 노무현 대통령은 집권 과정과 집권 후 모습에서 리투아니아의 롤란다스 팍사스 대통령과 유사점이 많다. 하지만 양국은 탄핵절차 등에서 큰 차이점을 보이고 있다. 

특별위원회가 한 달간 집중조사 
노 대통령은 2002년 12월 대선에서 이회창 후보를 48.9% 대 46.6%로 아슬아슬하게 이겼다. 팍사스 대통령은 2002년 12월 대선에서 35%를 얻은 발다스 아담쿠스에 이어 20%를 얻어 2위를 했지만, 결선투표에서 55%를 얻어 대통령에 당선됐다. 대부분의 정치인과 탈락한 후보자가 아담쿠스 현직 대통령을 지지해 그의 승리가 확실시된 상황에서 팍사스 당선은 이변이었다. 아담쿠스가 유럽연합과 나토 가입을 위해 정상외교로 동분서주하는 동안, 팍사스는 러시아인 유리 보리소프가 운영하는 항공회사 '아비아 발티카'로부터 거액의 선거자금을 받아 헬기를 타고 전국 도처를 누비면서 선거운동을 했다. 팍사스 대통령은 노 대통령보다 하루 뒤인 2003년 2월 26일 대통령에 취임했다. 

노 대통령은 정치적 배경이 없는 지방 평민 출신으로 50대의 젊은 나이에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그는 국민이 자신을 선택한 이유를 '개혁과 변화'로 인식하고, 개혁을 통해 '새로운 대한민국'을 만들겠다고 약속했다. 팍사스 대통령도 지방 평민 출신으로 47세 젊은 나이로 대통령에 당선됐다. 토목공학과 곡예비행을 전공한 그는 1997년 빌뉴스 시의원으로 정치활동을 시작해 국무총리를 역임했다. '질서와 변화'의 기치를 내걸고 당선된 팍사스 대통령은 취임 때만 해도 큰 기대를 모았다. 하지만 둘 다 태생의 한계인 국회 다수당의 지지를 확보하지 못해 개혁다운 개혁을 제대로 추진하지 못하고 늘 탄핵 위협에 직면해 있었다. 

팍사스 대통령의 탄핵소추는 2003년 10월 30일 메치스 라우린쿠스 국가안전부장이 대통령과 그의 보좌관이 러시아 범죄조직과 연루되어 있다는 문건을 국회에 제출하면서 시작됐다. 국회는 이 사건이 국가안보를 위협할 소지가 있다고 판단해 즉각 특별조사위원회를 구성해 한 달간 집중적으로 증거를 확보하고 관련자를 심문했다. 12월 1일 위원회는 "대통령의 특별지위, 책임, 국내외 정책 역할을 고려할 때 대통령의 행위는 리투아니아 국가안전을 위협하고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 보고서에 의하면 대선 때 팍사스의 선거전략과 홍보를 맡은 러시아 회사 알막스와 거액의 대선자금을 지원한 유리 보리소프가 여전히 대통령과 대통령실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대통령과 보좌관들이 국유재산 사유화와 다른 사업이권에 용인할 수 없는 영향을 미치려고 시도했다. 대통령의 측근들이 다른 국가기관의 활동을 간섭하는 등 지위를 남용했고, 대통령은 이를 묵인했다. 대통령과 보좌관이 기밀정보를 누설했다. 

국회는 보고서를 승인하고 12월 18일 국회의원 86명의 서명을 받아 대통령 탄핵소추 발의를 의결했다. 이를 근거로 국회는 법조인과 국회의원으로 구성된 특별소추위원회를 설치해 한시적 특별조사위원회의 탄핵 관련 여섯 가지 의결사항이 합당한지를 두 달에 걸쳐 또다시 강도 높은 조사와 심의를 거쳤다. 이에 헌법과 대통령선서 위반을 포함한 여섯 가지 항목 모두 유효하다고 결론지었다. 2004년 2월 19일 국회는 이 소추위원회의 보고서를 승인하고, 2월 23일 37권 각 30부, 총 1,110부, 20만7천7백 쪽에 달하는 방대한 증거서류를 헌법재판소에 제출했다. 

한편 3월 9일 한국 국회는 한나라당-민주당의 공조로 노무현 대통령의 선거법 위반, 측근비리, 경제파탄 사유로 국회의원 159명의 동의를 받아 탄핵소추를 발의했다. 이후 국회는 증거조사나 심의도 하지 않고 또한 대통령의 해명 기회도 없이 곧바로 3월 12일 경위권이 발동된 상태에서 193명의 찬성으로 탄핵소추를 의결했다. 초고속으로 이루어진 한국 국회의 탄핵소추는 수개월에 걸쳐 여러 번의 의결을 거치고 철저한 증거조사와 심의를 하는 리투아니아 국회의 탄핵소추와 현저히 비교된다. 리투아니아는 민주주의를 도입한 지 이제 고작 10여 년밖에 되지 않는다. 

헌법재판소 판결 뒤 국회 의결 
리투아니아 헌법재판소는 3월 16일부터 집중공개심리를 거쳐 3월 31일 세 가지 항목에서 팍사스 대통령이 헌법과 대통령선서를 위반해 탄핵되어야 한다고 판결했다. 이 판결을 근거로 4월 6일 국회는 세 가지 항목을 개별적으로 표결에 붙여 세 항목 모두 탄핵의결 수인 재적의원 5분의 3 이상으로 팍사스 대통령 탄핵을 최종 결정했다. 세 가지는 ▲대선자금을 지원한 유리 보리소프에게 부당하게 리투아니아 국적을 주었고 ▲유리 보리소프에게 국가기관이 그의 활동을 조사하고 전화를 도청하고 있다는 기밀을 누설했고 ▲대통령의 지위를 이용해 측근들이 기업으로부터 사리를 꾀하는 데 영향력을 행사했다는 것이었다. 

이로써 팍사스 대통령은 유럽에서 최초로 탄핵받은 대통령이라는 오명을 남기게 되었다. 그는 결국 대선자금 최대 후원자인 유리 보리소프의 도움으로 대통령에 당선되었고 또한 그로 인해 대통령 자리에서 물러나게 된 셈이다. 현재 보리소프는 아프리카 수단에 불법무기를 거래한 혐의로 피소되어 검찰의 조사를 받고 있다. 하지만 이번 탄핵이 곧 팍사스의 정치생명에 종말을 고하지는 않을 것 같다. 현재 그는 대선에 다시 출마해 국민의 심판을 받을 뜻을 비치고 있다. 한편 검찰의 기소 가능성도 남아 있어, 그의 향후 정치역정은 아직 불투명하다. 

탄핵소추가 진행되는 동안 특히 유럽연합과 나토 가입을 목전에 둔 리투아니아는 국가 이미지에 적지 않은 손상을 입었다. 국내 정치상황을 이유로 이탈리아 대통령과 슬로바키아 대통령 등 국빈 방문이 잇따라 취소되는 등 정상외교에 차질이 생겼다. 하지만 국회의 다수당이 국무총리를 맡고 있는 행정부는 정국 안정에 주력하여 큰 동요 없이 국정을 이끌어 왔다. 이 가운데 3월 29일 리투아니아는 나토 회원국으로 가입했고, 5월 1일 유럽연합 회원국이 된다. 

리투아니아는 아르투라스 파울라우스카스 국회의장이 대통령 권한을 대행하고, 60일 이내 선거를 치른다. 대통령 임기는 5년이고, 두 번에 걸쳐 연임할 수 있다. 이번 탄핵으로 1991년 소련연방으로부터 독립한 리투아니아는 민주주의 뿌리를 더욱 굳건히 하고, 정경유착과 측근비리 등에 연루된 대통령을 견제하는 국회의 힘을 축적하게 되었다. 한편 팍사스 정부가 들어선 후 커지는 양상을 보이고 있는 러시아 영향력을 차단하는 효과도 보게 되었다. 

* 이 기사는 뉴스메이커 2004년 4월 22일 571호에 보도된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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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 의사의 조카이자 독립운동가인 안우생의 창작 · 번역물 40편 유럽 도서관에서 최초 발굴 

빌뉴스= 글 · 사진 최대석/ 자유기고가 ds@chojus.com 

1909년 이토 히로부미 총독을 암살해 일본의 불법 침략을 세계에 알린 안중근 의사의 구국 결의는 그의 아우와 조카 등 일가에 의해 해방 이후까지 이어졌다. 막내동생 안공근은 안 의사의 의거를 계기로 교사 생활을 접고, 형 안정근과 함께 연해주로 이주해 독립운동을 벌였다. 그는 1921년 임시정부의 외무차장으로 임명되었고, 그해 10월 모스크바에 파견되어 러시아를 상대로 외교 활동을 폈다. 1925년 상하이로 돌아와 김구 선생의 측근으로 활약했다. 의열 투쟁을 벌인 윤봉길, 이봉창, 나석주 의사 등을 배출한 한인애국단의 단장도 맡았다. 그는 영어·프랑스어·러시아어 등 6개 국어에 통했다. 김구 선생의 영문편지를 대신 써주었으며, 김구 선생과 중국의 장제스 총통이 만날 때도 자리를 함께했다. 


△ 세계적으로 권위있는 문학잡지 〈Literatura Mondo〉의 1934년 11월호에 게재된 안우생의 번역작품 김동인의 '걸인'.

김구 선생 대외담당 비서로 활약 

안우생(1907~91)은 바로 이 안공근의 장남이다. 임시정부에서 운영하던 교육기관인 인성학교를 거쳐 중국 베이징 복건대학과 광둥 중산대학에서 수학했다. 1936년 한국 국민당이 조직한 한국청년전위단의 핵심 단원이 되었고, 광복군 내 정보 분야에 활동했다. 임시정부 주석판공실 비서, 선전부 선전과장, 문화부 편집위원을 지냈으며, 주중 미 대사관에서 한인공작반의 일원으로 첩보 업무를 담당하기도 했다. 해방 뒤 귀국해서 김구 선생의 대외담당비서로 일했고, 한중문화협회 이사와 과도입법의원 영문비서 등도 역임했다. 국내외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던 때, 그는 일체의 외국 군대를 철수시키고 통일된 독립국가를 세우기 위해서는 남북의 제휴와 합작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이에 따라 공산주의에 대해 무조건적인 거부 반응을 보이던 임정 계열의 인사들도 안우생 등의 설득에 힘입어 1948년 평양에서 열린 남북연석회의에 참석했다. 

△ 6개 국어에 능통했던 항일운동가 안우생은 중립적인 언어 에스페란토로 문학작품 활동을 하면서 애국정신과 항일의식을 고취했다. 북한에 있는 안우생 무덤.(사진/ 한겨레)
 
그 뒤 안우생은 남북연석회의의 실패와 김구 선생의 피살 등으로 홍콩으로 망명했다거나, 한국전쟁 초기에 월북 혹은 납북된 것으로 알려졌다. 1991년 북한이 그의 사망 소식을 발표하기 전까지 그의 행적은 드러나지 않았다. 중국에서 항일운동을 함께 한 에스페란티스토들이 그의 소식을 팔방으로 수소문했지만 도무지 알 수 없었다. 독립을 위해 임시정부에 참여한 안우생은 아버지와 함께 뛰어난 공적을 남겼다. 하지만 독립운동 세력이 주도하는 역사 형성이 좌절되면서 안우생은 생소한 사람으로 남았고, 제대로 역사적 평가를 받지 못했다. 

그는 루쉰의 작품 네편을 에스페란토로 탁월하게 번역했다는 평을 받고 있다. <한국 에스페란토 운동사>에서 그는 ‘엘핀’(Elpin)이라는 필명으로 중국의 대표적 애국문학가인 루쉰의 소설 ‘광인일기’ ‘고향’ ‘백광’을 에스페란토로 번역했고, 중국인 다섯명이 번역한 다른 소설과 함께 1939년 홍콩에서 <루쉰문선>(Elektitaj Noveloj de Lusin)이 발간되었다는 소식을 접하면서 안우생에 관심을 돌리기 시작했다. 한국인으로 중국 근대문학의 최초 소설인 ‘광인일기’를 번역했고, 그가 번역한 소설 세편이 책의 4분의 1을 차지한 것 등에서 그의 에스페란토 실력과 위상을 짐작할 수 있다. 

안우생은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여러 언어를 구사했다. 영어뿐 아니라 중국어, 러시아어, 프랑스어, 에스페란토 등 6개 국어에 능통했다. 상하이에서 1927년께 에스페란토를 배우기 시작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에스페란토 운동과 항일투쟁을 함께 한 중국의 원로 첸유안 교수(중국 국가언어위원회 부위원장)는 “안우생은 시를 사랑했고 아름다운 시구를 지었다. 중산대학에서 영어를 전공하면서 에스페란토 시 강의를 하기도 했다”라고 회상했다. 첸 교수는 또 잡지 발간을 함께 추진했는데, 안우생이 전쟁문학작품을 주로 싣자고 주장하는 바람에 결국 두 종류의 잡지를 발간하기도 했단다. 그는 “나의 에스페란토 인생에서 가장 큰 행복은 애국문학가 안우생을 알게 된 것이다”라고 술회했다. 이로써 안우생의 문학에 대한 사랑과 깊은 이해를 짐작할 수 있다. 더군다나 <백범일지>에 따르면 조부 안태훈은 시문에 능했다고 하니 손자가 조부의 문학적 재능을 물려받을 법도 하다. 

그렇다면 루쉰 소설을 번역한 세 작품 외에도 다른 역작이나 원작이 분명히 더 있을 확률이 높다는 판단이 섰다. 


△ 안우생의 문학작품의 보고로 1938-39년 홍콩에서 발간된 문학잡지 〈Orinta Kuriero〉(오른쪽)와 루쉰의 작품을 탁월하게 에스페란토로 번역했다는 평을 받는 〈Noveloj de Lusin〉(베이징, 1963).

김동인 · 유치진 등의 작품도 번역소개 

1991년 필자가 헝가리 엘테대학교에서 공부하면서 부다페스트에 있는 ‘칼롤리 파이시 에스페란토 도서관’을 방문한 적이 있다. 당시 수집가 파이시의 도움을 받아 1938~39년 홍콩에서 발간된 <원동사자>(遠東使者·Orienta Kuriero)라는 잡지를 찾았다. 안우생이 이 간행물의 편집위원으로 활동하면서 많은 작품을 남겼다는 놀라운 사실을 확인했다. 필자는 이 잡지를 중심으로 지난 2월까지 10여년 동안 헝가리·스페인·네덜란드·오스트리아·리투아니아 등 에스페란토 도서관에서 산재해 있는 그의 작품을 하나하나 수집했다. 

세계적으로 권위 있는 문학잡지 <문학세계>(Literatura Mondo) 1934년 11월호에 게재된 안우생의 번역작품 김동인의 ‘걸인’과 함께 두권의 책(<루쉰문선>, <루쉰소설집>(Noveloj de Lusin)), 네개의 정기간행물(<원동사자>, <동방호성>(東方呼聲·Voĉoj el Oriento), <중국보도>(中國報導·Heroldo de Ĉinio), <문학세계>)에서 모두 40편에 달하는 작품을 찾아낼 수 있었다. 거의가 1938~40년 중국의 홍콩, 청두, 중경에서 발간된 것들이다. 이것은 전부 에스페란토로 되어 있고, 원작시 3편, 번역시 14편, 원작소설 2편, 번역소설 12편, 번역희곡 4편 그리고 기사 5편이다. 

주목할 만한 것은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발간된 당시 세계적으로 권위 있는 에스페란토 문학잡지인 <문학세계> 1934년 11월호에 김동인의 ‘걸인’을 번역해 실은 점이다. 이 밖에 직접 구하지는 못했지만 일제시대 가난에 시달리는 한국 농촌을 다룬 유치진의 희곡 ‘소’를 에스페란토로 번역해 중국에서 단행본을 펴낸 것으로 알려져 있다. 

△ 중국 청두에서 1940년 발간된 〈Voĉoj el
Oriento〉(위)와 중국 중경에서 1940년에 발간된 〈Herold de Ĉinio〉에 안우생의 작품이 실려있다.


시·소설·희곡 등 다양한 문학장르로 구성된 그의 작품의 주된 내용은 일제의 만행을 고발하고, 전쟁의 참혹성을 알리고, 조국을 위해 분연히 전장으로 나가며 병사들이 영웅적으로 적을 무찌르는 것 등이다. 안우생은 해외 일선에서 항일 독립운동을 직접 전개함과 동시에 민족간 상호 이해와 세계평화를 추구하는 중립적인 언어 에스페란토를 통한 문학작품 활동으로 애국정신과 항일의식을 고취했다. 

그의 작품에는 항일로 불타오른 중일전쟁 전기의 중국 문예사조가 잘 드러나 있다. 원작시 ‘어머니의 땅’(Tero patrina)에는 “화약 냄새로 뒤덮인 이 시대에 어머니의 뜻에 맞는 새 시대를 찬미할 자손들이 기꺼이 자신을 바칠 것이다”라고 읊고 있다. ‘유격대원’(Geriloj)에는 “성스러운 사명을 완수할 때까지 유격대원들은 적의 세력을 박멸하고, 형제들에게 다시 찾아줄 평화를 위해 장렬하게 피를 흘린다”라고 적고 있다. ‘평화의 비둘기’(Paca kolombo)는 제국주의를 반대해 조국을 떠나 중국에서 라디오방송을 하면서 항일운동에 앞장선 일본 여성 하세가와 데루에게 바치는 시이다. 원작 단편소설 ‘숙모와 사촌들’(Onklino kaj gekuzoj)은 고부간 갈등으로 마음고생을 하는 미망인 숙모를 주제로 하고, ‘쉬운 내기’(Facila veto)는 미신타파를 다루고 있다. 

특히 번역시 ‘전사의 유언’(Testamento de batalanto)의 마지막 구절인 “슬픈지고, 밤 유령들을 겁먹게 하고, 찰나의 영광을 누린 후, 번쩍이는 불꽃과 함께 꺼져버린, 성냥개비처럼 나는 잊혀져 폐기될 거야”라는 말은 애국열사들을 곧잘 잊고 사는 오늘날 우리에게 경구로 다가온다. 루쉰의 소설 세편을 에스페란토로 뛰어나게 번역한 사람으로 알려진 안우생의 문학작품 수가 적어 그동안 몹시 아쉬웠다. 

이번 발굴을 계기로 에스페란토 번역과 문학에 대한 그의 탁월성을 입증할 수 있게 되었고, 또 독립운동가뿐만 아니라 애국문학가로서의 그의 활동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그는 민족 독립운동과 에스페란토를 결부시킨 대표적 인물이다. 

에스페란토 문학의 거인 

한국 근대 시문학에 지대한 공헌을 한 김억은 “에스페란토는 문학적 묘사에 가장 적합하다”고 말했다. 그는 1920년대 열성적으로 에스페란토를 보급하고 한국 단편소설을 에스페란토로 번역해 외국에 널리 소개하기도 했다. 1938년 프랑스 파리에서 정사섭은 자신의 에스페란토 원작시 105편을 모아 시집 <자유시인>(La Liberpoeto)을 발간했다. 이들 못지않게, 짧은 기간에 활동했지만 그가 남긴 작품으로 미뤄 짐작건대 안우생은 에스페란토 문학의 거인으로 평가받는 데 전혀 손색이 없을 듯하다. 이제 남은 과제는 1940년 이후 작고 때까지의 작품을 발굴해 그의 문학을 종합적으로 재조명하는 일이다. 


세계 공통어, 에스페란토

에스페란토는 자멘호프(1859~1917) 박사가 1887년 바르샤바에서 발표한 세계 공통어를 지향하는 국제어이다. 그가 태어난 폴란드 비아위스토크는 당시 여러 민족이 각기 다른 언어를 사용함으로써 의사소통이 어려워 민족간 불화와 갈등이 빈번했다. 이에 그는 모든 사람이 쉽게 배울 수 있는 중립적인 공통어를 만들어야겠다고 결심하고, 유럽 언어의 공통점과 장점을 활용해 규칙적인 문법과 쉬운 어휘를 기초로 에스페란토를 창안했다. 에스페란토는 말이 같은 민족사회에선 그 민족어를 사용해 발전시키고, 말이 서로 다른 국제관계에서는 에스페란토를 쓰자고 주장한다. 현재 120여개 나라에 사용자가 산재해 있고, 이들은 네덜란드 로테르담에 본부를 둔 세계에스페란토협회를 기점으로 광범위하게 활동하고 있다. 한국에서는 1920년 김억에 의해 보급되기 시작해 한국에스페란토협회와 주요 도시에 그 지부가 조직돼 있고, 단국대학교와 원광대학교에서 에스페란토를 제2외국어로 가르치고 있다.

* 이 기사는 한겨레21 제504호 2004년 4월 15일자로 보도된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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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타나스 콘트리마스] 생맥주와 턱수염의 괴력!

빌뉴스=글 · 사진 최대석/ 자유기고가 chtaesok@hanmail.net

자신의 신체 일부인 치아, 귀, 목 혹은 손가락으로 무거운 것을 들어올리거나 끌어서 세계 기네스북에 오른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인간의 한계에 도전해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한다. 그런데 이런 사람들 가운데 자신의 수염을 이용해 세계 기록에 도전하는 사람이 리투아니아에 살고 있다. 

수염을 30년째 길러오고 있는 안타나스 콘트리마스 (52)는 어느 날 이 수염으로 뭔가 흥미로운 일을 시도할 궁리를 했다. 1999년 3월 그가 살고 있는 도시에서 이색 철인대회가 열렸다. 행사 전 평소 알고 지내던 조직위원들에게 그는 그냥 지나가는 말로 “자신의 턱수염으로 무거운 것을 한번 들어올려보마”고 제안했다. 평소 가족과 주위 사람들로부터 거추장스럽고 불편한 긴 수염을 깎으라는 충고를 귀가 따갑도록 들어오던 참이라 이 애물단지도 쓸모가 있음을 보여주리라는 오기도 작용했다. 고민 끝에 자신이 운영하는 맥주공장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맥주통을 들기로 했다. 

1차 시도는 성공적이었다. 연습에 연습을 거듭한 뒤 철인대회에서 40kg 맥주통을 32cm 턱수염으로 번쩍 들어올린 것이다. 사람들과 언론의 관심이 그에게 쏠렸다. 오랜 시간 수염을 기른 게 헛되지 않았다는 뿌듯한 생각도 들었다. 이후 그는 턱수염으로 계속 자신의 기록을 갱신해나갔다. 2000년에는 몸무게가 55.7kg이나 나가는 아가씨를 번쩍 들어올리기도 했다. 그에게 첫 기네스 공인기록 인증서를 가져다준 사건이었다. 곧이어 2001년 3월에는 59kg이 나가는 텔레비전 아나운서를, 8월에는 61.3kg의 여성을 들어올렸다. 이로 인해 기네스 기록 인증서를 3개나 더 받았다. 이제 그는 리투아니아에서 기네스 인증서를 가장 많이 보유한 사람이 되었다. 

1999년 6월에는 1t이나 되는 경비행기를 2.85m나 끌어당겼다. 2002년 7월에는 3t짜리 군용차를 13m 끌어당기는 괴력을 보여주었다. 턱수염의 힘은 어디서 나오는 걸까. 그는 스스럼없이 자신이 만든 생맥주에 있다고 말한다. 그는 하루 5~6ℓ 생맥주를 마시고, 기록에 도전할 때는 1ℓ를 마신다. “내가 생각해도 신기하다. 힘을 쓸 때 내 몸 안의 맥주가 에너지로 변해 빠져나가는 기분이 든다.” 그는 도의원으로서 지역의 정치 발전에 기여하면서 라디오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 그는 이제 바다에서 군함을 끌어당기는 기록에 도전할 생각이다. 

* 이 기사는 한겨레21 제501호 2004년 3월 17일자로 보도된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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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임 1주년 롤란다스 팍사스 탄핵·사임 압력 … 마피아와 연루·이권개입 등 혐의 짙어 

최대석 / 리투아니아 통신원 chtaesok@hanmail.net
   
지난해 2월26일 열린 팍사스 대통령의 취임식 모습.

2월26일 리투아니아 롤란다스 팍사스 대통령(47)이 취임 1주년을 맞이한다. 하지만 과연 그가 취임 1주년을 무사히 넘길 수 있을지가 리투아니아와 국제사회의 주된 관심사다. 현재 리투아니아 국회가 대통령 선서 위반, 러시아 마피아와의 연루, 이권개입 혐의 등으로 그의 탄핵 여부를 심의하고 있기 때문이다.

소련에서 독립한 뒤 세 번째 치른 지난해 1월 대통령 결선투표에서 팍사스는 55%의 지지율을 얻어 대통령에 당선됐다. 대부분의 정치인들과 탈락한 후보들이 1차 투표에서 1위를 한 전직 대통령 발다스 아담쿠스를 지지했기 때문에 팍사스의 당선은 충격적인 이변이었다. 아담쿠스가 유럽연합(EU)과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가입을 위해 정상외교로 동분서주할 때 팍사스는 러시아인 유리 보리소프가 운영하는 항공회사 ‘아비아 발티카’에게서 거액의 자금을 받아 헬기를 타고 전국을 누비며 선거운동을 했다.

국가안전부장 폭로가 사건 발단

인터넷에 보급되고 있는 ‘팍사스 반대 배너’들.

토목공학과 곡예비행을 전공한 그는 1997년 빌뉴스 시의원으로 정치활동을 시작해 99년 빌뉴스 시장과 총리를 역임했다. 그러나 총리가 된 뒤 불과 몇 개월 지나지 않아 미국의 윌리엄스 인터내셔널이 국영기업 마제이큐 정유회사를 인수하는 데 반대해 총리직을 사임했다. 그러나 2000년 총선에서 자신이 이끈 자유연합과 현 국회의장 아르투라스 파울라우스카스의 사회자유당과 연합해 다시 총리가 됐지만 정부 결정에 일일이 간섭하려는 연합정당의 태도에 불만을 느껴 곧바로 총리직을 내놓았다. 사임 후 그는 자유민주당을 창당해 대통령에 당선되는 등 오뚝이 정치역정을 걸어왔다. 

질서와 변화를 기치로 내걸어 당선된 젊은 팍사스 대통령은 취임 때만 해도 큰 기대를 모았다. 하지만 현재 그는 일생일대의 정치적 위기에 빠져 있다. 문제의 발단은 지난해 10월30일 자신이 리투아니아 스페인대사로 내정한 메치스 라우린쿠스 국가안전부장이 국회의장과 총리 앞으로 대통령과 그의 보좌관이 러시아 범죄조직과 연루돼 있다는 핵폭탄성 내용이 담긴 문건을 제출한 것이다. 이보다 일주일 앞서 리투아니아 언론들은 팍사스 대통령의 딸 잉가 팍사이테(20)가 범죄세계의 대부로 알려진 헨릭카스 닥타라스의 딸 지빌레 닥타라이테의 생일파티에 참석했다고 대서특필했다.

이 문건을 받은 파울라우스카스 국회의장은 이 사건이 국가안보를 위협할 소지가 있다고 판단해 즉각 11월3일 본회의를 소집했다. 라우린쿠스 부장은 “이 사실을 비망록으로 남겨놓을 수도 있지만 이러다간 이 나라가 국제 마피아의 손아귀에 놀아날 것이란 우려 때문에 밝히게 됐다. 나와 대통령 사이의 신뢰는 이미 없어졌다. 내가 독대하여 보고한 기밀정보가 이해 상대자에게 곧바로 누설되기도 했다”고 증언했다. 이날 본회의에서는 연루를 입증하는 혐의자들의 도청된 전화통화가 아무런 여과 없이 생중계로 방송돼 큰 파문을 일으켰다.

이에 국회는 대통령의 국가안보 위협 가능성을 조사하기 위한 한시적 특별위원회를 설치했다. 4주일간 활동을 한 특별위원회는 12월1일 “대통령의 특별지위, 책임, 국내·외 정책 역할을 고려할 때 대통령의 행위는 리투아니아 국가안전을 위협하고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보고서는 △대선 때 팍사스의 선거전략과 홍보를 맡은 러시아 회사 알막스와 거액의 대선자금을 지원한 유리 보리소프가 여전히 대통령과 대통령실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대통령과 보좌관들이 국유재산 사유화와 다른 사업의 이권에 용인할 수 없을 정도의 영향을 미치려고 했다 △대통령의 측근들이 다른 국가기관의 활동을 간섭하는 등 지위를 남용했고, 대통령은 이를 묵인했다 △대통령과 보좌관이 기밀정보를 누설했다는 등의 내용으로 돼 있다. 

웹사이트에 올려진 컴퓨터 합성사진. 리투아니아 혁명을 주도하는 3인의 얼굴을 담은 것으로 왼쪽부터 보리소프, 팍사스, 스마일리테.대통령에게 영향력을 행사한 대선자금의 거액 기부자 보리소프(아래 왼쪽)의 전화통화 내용이 TV를 통해 아무런 여과 없이 공개됐다.(위 부터) 


또한 조사과정에서 팍사스 대통령이 유리 보리소프에게 리투아니아 국적을 부여한 데 대한 합법성 논란이 빚어졌다. 헌법재판소는 이 국적 부여가 불법임을 판결했고, 이민국은 최근 보리소프의 리투아니아 여권을 압수해 폐기처분했으며, 그의 국외 추방을 결정했다. 보리소프는 이에 반발해 그 부당성을 법원에 제소했다. 팍사스와 추종자들은 헌법재판소의 결정을 불신하고 국적 부여는 정당했다고 여전히 주장한다.

12월18일 국회는 86명의 동의를 받아 대통령 탄핵소추 발의를 의결했다. 리투아니아 헌법에 따르면 대통령이 헌법을 위반하거나 대통령 선서를 준수하지 않거나 범죄행위를 한 사실이 밝혀질 때, 국회는 재적의원의 4분의 1인 36명의 동의로 탄핵소추를 발의할 수 있고, 재적의원의 5분의 3인 85명의 동의로 대통령을 탄핵할 수 있다. 현재 국회는 소추위원회를 설치해 관련자들을 조사하고 있다.

사건이 터지자 팍사스 대통령은 연루설을 강력히 부인하며 절대로 사임하지 않겠다고 단언했다. 자신은 대통령 선서와 헌법에 위반하는 행위를 결코 하지 않았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사건 초기 유명 정치대담 텔레비전 프로그램이 ARS 여론조사를 했을 때 대통령 보좌관들이 휴대전화로 600여통의 전화를 해 ‘대통령 지지’에 표를 던진 사실이 나중에 밝혀져 여론조작 의혹까지 받게 됐다. 급기야 대통령은 안보보좌관, 외교보좌관 등 최측근 보좌관 5명을 해임했다. 연루설이 나온 뒤부터 지식인, 종교지도자, 문학인, 자치단체장 등이 팍사스 대통령의 사임을 촉구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대통령을 역임한 알기르다스 브라자우스카스 총리는 “국가 이미지에 나쁜 영향을 미치는 정치광고는 이제 그만 하자. 나 같으면 사임하겠다”며 압박하고 있다.

팍사스 지방 순회하며 무죄 설파

팍사스 대통령은 방송사 및 중앙지의 인터뷰에는 전혀 응하지 않고 지방도시를 순회하며 대중에게 자신의 무죄를 설파하고 있다. 소추위원회에서 자신을 직접 변호하는 방법을 거부하고 대중을 설득하는 길을 택했다. 최근 우크메르게시에서 열린 그의 연설장에서는 극우세력 추종자들까지 합세해 팍사스 대통령을 비난하는 청년에게 주먹을 휘두르는 사태가 벌어졌다. 그는 “이 청년들은 돈에 매수된 사람들이다. 그리고 지방 출신이 초고속으로 대통령이 되자 시기하는 무리들이 득실거린다”고 주장했다. 그는 기존 언론매체를 통해서는 자신의 주장을 제대로 전달할 수 없다고 판단해 대통령실 자체 주간지를 발행하고, 대통령 주례방송연설을 계획하고 있다.

1월13일 그동안 팍사스 대통령의 권위가 얼마나 추락했는지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1991년 1월13일 소련군은 독립을 선언한 리투아니아의 주요기관을 점령하기 위해 무력 공격을 시도했다. 이 과정에서 13명이 총에 맞거나 탱크에 깔려 죽음을 당했다. 리투아니아는 이날을 ‘독립투사일’로 명명하고 매년 국회에서 기념식을 개최해왔다. 이 행사에서 팍사스 대통령의 연설이 있기 직전 다수 야당 의원들은 본회의장을 빠져나갔고, 대통령이 연설을 마쳤을 때 관례인 기립박수는 없었으며 의석은 쥐 죽은 듯 고요했다. 1월13일 훈장 수여식에서 한 수여자가 자신의 이름이 호명되자, “위선적인 대통령이 준 훈장을 받을 수 없다. 이는 리투아니아 독립을 위해 죽은 사람들에 대한 모독이기 때문이다”라고 말하기까지 했다. 

이러한 리투아니아 국내 정치상황을 이유로 최근 이탈리아 대통령과 슬로바키아 대통령은 각각 예정된 리투아니아 방문을 취소했다. 유럽의회는 비공식 외교채널을 통해 팍사스 대통령의 4월 유럽의회 본회의장 연설은 적절하지 않다는 견해를 보내왔다. 이처럼 팍사스 대통령의 탄핵소추와 사임 거부로 유럽연합및 나토 가입을 앞두고 있는 리투아니아는 외교적으로도 점점 고립돼가고 있다.

한편 리투아니아 네티즌들도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다. 러시아 마피아 연루설 인터넷 기사는 댓글이 2000개 이상 달릴 정도다. 팍사스 반대자들은 웹사이트(http://www.paksui-ne.tk/)를 구축해 팍사스를 히틀러에 비유하면서 배너, 플래시, 합성사진 등을 만들어 인터넷에 배포하고 있다. 대선자금, 측근비리, 외교노선, 언론취재 불응 등 대통령을 둘러싼 리투아니아의 현 정국상황이 한국과 유사한 면이 많아 앞으로 리투아니아 정국의 향방이 어떻게 전개될지 더욱 궁금하다. 

* 이 기사는 주간동아 2004년 2월 26일(제423호)자로 이미 보도된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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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티나 팔률료니테] 교도소 미인대회가 남긴 대박

빌뉴스=글 · 사진 최대석/ 자유기고가 chtaesok@hanmail.net

2002년 리투아니아 여성 전용 교도소에서 세계 최초의 ‘미스 여죄수’ 선발대회가 열린 적이 있다. 이 독특한 대회는 세계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리투아니아의 한 텔레비전 방송사가 “아름다움이 없을 것 같은 곳에서 아름다움을 찾으려고 한다. 소외되고 절망적인 여성들이 다시 어깨를 펴고, 높은 굽의 구두를 신고 미소를 배우도록 노력할 것”이라는 취지로 연 미인대회는 전 세계에 적잖은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당시 영예의 대상인 ‘미스 여죄수’로 ‘사만타’라는 가명으로 출전한 크리스티나 팔률료니테(22)가 뽑혔다. 그는 왕관과 상금 4천리타스(약 160만원)를 거머쥐었다. 왕관은 정화(淨化)를 의미하는 은, 악을 제거하는 데 도움을 준다는 석영, 죄수에게 자유를 상징하는 비취로 만들어졌다. 

“솔직히 이 보석왕관보다 자유가 나에겐 더 귀하다. 하루빨리 자유를 찾고 싶다”라고 수상 소감을 밝힌 그가 2003년 6월 3년 동안 그토록 그리워하던 사회로 돌아왔다. 상금을 밑천으로 샤울랴이에 작은 아파트를 샀고, 어린 딸 사만타(3)와 함께 새로운 보금자리를 틀었다. 미인대회로 얻은 유명세로 그는 이제 리투아니아의 인기 연예인 반열에 올랐다. 주위 사람들은 “이제 새로운 신데렐라가 탄생했다”며 그를 축하했다. 방송과 인터뷰를 통해 그의 미모와 처신을 지켜보던 리투아니아 최대의 화장품 회사 대표는 그를 특별 채용했다. 

크리스티나는 집단폭행 사건에 억울하게 연루되어 교도소 신세를 져야 했다. 그는 남자친구가 동료 세명과 함께 술집에서 폭행하는 현장에 뒤늦게 도착했다. 경찰이 출동하자 소년원과 교도소를 들락날락하던 남자친구는 크리스티나와 전과가 없는 동료 한명만 현장에 남기고 도망쳤다. 훈방으로 곧 풀려나올 것이라는 남자친구의 말을 믿었고, 또 그의 아이를 임신한 상태라 아빠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기로 마음먹었다. 변호사도 낙관했지만 판결은 기대와는 딴판이었다. 결국 감옥에서 딸을 낳고 함께 살았다. 그는 딸에게 가장 큰 죄책감을 갖고 있다. 

인생은 ‘새옹지마’라 했던가. 딸의 이름으로 출전한 기상천외한 교도소 미인대회에서 대상을 거머쥐었다. 잇따른 행복에 그는 “누구에게나 올 수 있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잘 잡았을 뿐”이라고 말했다. 그는 모르는 사람들로부터 새 집에 필요한 가전제품을 선물로 받고, 10대들이 자신이 근무하는 화장품 매장으로 찾아와 축하카드를 건네주는 따뜻한 정을 한아름 맛보고 있다. 논란이 많았던 교도소 미인대회는 그에게만큼은 확실히 인생역전 대박의 기회를 가져다주었다. 

* 이 기사는 한겨레21 제496호 2004년 2월 11일자로 보도된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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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트라스 다브리슈스] 늑대사냥꾼 “늑대와 춤을”

빌뉴스=글 · 사진 최대석/ 자유기고가 chtaesok@hanmail.net

리투아니아 북서쪽 텔쉐이 지방의 소나무와 전나무 등이 우거진 울창한 숲에는 요즈음 밤마다 “우~~~ 우~~~” 소리가 끊이지 않는다. 담력이 약한 사람에겐 밤하늘을 향해 울부짖는 이 늑대의 모습이 생각만 해도 소름 끼친다. 하지만 늑대의 울음소리가 정겹게 들리는 기인이 있다. 바로 이 숲과 야생동물을 보호하는 페트라스 다브리슈스(48)다. 

그는 늑대를 데리고 숲을 거닐고 함께 사냥을 하기도 한다. 새끼 때부터 키운 늑대는 그의 뜰에서 애완견처럼 살아간다. 그가 이처럼 늑대를 사랑하고 함께 살아가는 사연은 이렇다. 1982년 소련의 키르기스스탄과 타지키스탄 공화국 일대에 많은 늑대떼들이 산에서 내려와 가축을 공격하는 사건이 속출했다. 이어 포수들이 모집되었다. 자신의 뜻에 맞지 않은 세속의 공산주의가 싫었고, 또 10형제 집안에서 자란 다브리슈스는 중간 아이는 집에서 가급적 멀리 떠나 자신의 행복을 찾아야 한다는 옛말을 믿고 모집에 응했다. 이렇게 그는 텐산과 히말라야산에서 늑대 등을 사냥하며 7년을 산속에서 홀로 살았다. 

이후 리투아니아로 돌아와 “오랜 세월 동안 자연이 나를 먹여 살렸다. 이제 자연에 진 빚을 갚아야 할 때가 되었다”라고 마음먹고, 지방산림관리청 공무원이 되어 현재 14ha의 숲과 야생동물을 관리하고 있다. 5ha 숲에 우리를 쳐서 멧돼지·사슴·노루 등과 함께 한 식구처럼 살아가고 있다. 

2.5ha 숲엔 늑대를 기르고 있다. 그는 늑대를 사냥하면서 살았지만, 늑대의 지혜로움, 정의로움, 가족사랑, 위계질서에 매료되어 늑대를 기르면서 늑대에 대한 사람들의 일반적 편견을 깨는 꿈을 오랫동안 간직해왔다. 동화 속 늑대는 염소 등을 닥치는 대로 잡아먹는 포악한 동물로 정형화되어 있다. 하지만 늑대는 최소한 자신의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먹는다. 늑대는 물가의 여러 오리알을 발견하면 그 가운데 하나만을 깨먹는다. 배부르고 건강한 늑대는 절대로 다른 짐승을 공격하지 않는다. 그의 뜰엔 늑대와 염소가 사이 좋게 노니는 모습을 자주 목격할 수 있다. 

리투아니아에는 400여 마리의 늑대가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그는 몇해 전 한 리투아니아 사냥꾼의 올가미에 걸린 어린 늑대를 구출해 동물원에 보낸 뒤 다섯 마리의 새끼를 얻었다. 다브리슈스는 이 다섯 마리의 새끼들을 집안에서 정성스럽게 길렀다. 리투아니아에서 흔히 사용되는 “그는 늙은 늑대다”라는 말은 지혜로운 사람을 뜻한다. 어떤 사람은 늑대를 기르는 그를 아주 별난 괴짜라고 부르지만, 그는 “난 단지 자연의 친구일 뿐이다”라고 답한다. 

* 이 기사는 한겨레21 제495호 2004년 2월 4일자로 이미 보도된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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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대석 / 자유기고가 ·에스페란토번역가 ds@chojus.com 

바르샤바 중심가에서 남쪽으로 16킬로미터 떨어진 피아세츠노(Piaseczno)라는 작은 도시에 지난 10년간 아주 친하게 지내온 한 가족이 살고 있다. 62세인 남편(Wieslaw Jedrzejczak)은 폴란드인으로 광고회사에서 근무하다 몇 해 전에 퇴직을 하였고, 같은 나이인 부인(김순애)은 수대에 걸쳐 러시아에서 살아온 한국인으로 현재 프랑스 전자회사인 톰손(Thomson)사에 근무하고 있고, 68년생인 아들(Radoslaw, 한국이름은 동일: 東一)은 바르샤바공과대학교를 졸업하였고 전력설계회사에 다니고 있다.

부인은 1955년 폴란드로 유학을 와서 대학교에서 화학을 전공하였고, 대학교 동창생인 현 남편과 결혼을 하여 이곳에서 45년간 살고 있다. 방이 두 개인 10평 남짓 되는 아파트에 들어서면 복도의 나무벽에는 각국에서 방문한 친구들의 자필서명이 눈에 뛴다. 큰방에 들어가면 앞벽과 뒷벽을 가득 메운 책들이 인상적이다. 좁은 아들방에 들어서면 오른쪽 벽에는 한국에서 가져온 하회탈들이 줄줄이 걸려 있고, 왼쪽 벽 거의 전체는 열쇠고리들이 모래알처럼 빽빽이 걸려 있다. 

일반적으로 폴란드 사람은 하루 8시간 근로를 하고, 주 5일 근무를 한다. 직업에 따라 차이는 있지만 7시에 일을 시작하여 오후 3시에 일을 끝낸다. 따로 점심시간이 없고 11시경에 집에서 준비해 간 샌드위치로 요기를 한다.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 따뜻한 음식으로 점심식사를 푸짐하게 하고 저녁 8시경에 간단한 저녁식사를 한다. 토요일은 집청소, 세탁 등 집안일을 주로 한다. 일요일은 종교인이든 비종교인이든 집안일조차도 하지 않고 푹 쉰다. 여름시간이 적용되는 봄이나 여름에는 해가 길어 평일 오후나 주말에는 가족단위로 인근 공원이나, 호수, 숲속 등으로 나들이 가는 사람들이 많다.

일찍 퇴직한 남편은 5월부터 9월까지 거의 매일 아파트에서 4킬로미터 떨어진 텃밭(우리나라의 주말농장)에서 채소를 가꾸면서 시간을 보낸다. 주로 도시 아파트에 사는 사람들이 이 텃밭을 활용하고 있다. 이 한 개인이 차지하는 텃밭의 크기는 지역에 따라 다소 차이가 있지만 일반적으로 300평방미터(약 90평)이다. 이 텃밭은 집단적으로 도시의 외곽지대나 녹지대에 군데군데 조성되어 있다. 대부분 사람들은 이 텃밭에 조그마한 여름별장을 지어 놓고 있다. 이곳에 자두나무, 벚나무, 사과나무, 배나무, 호도나무 등을 심어 놓고, 감자, 양파, 마늘, 사탕무우, 오이, 토마토, 딸기, 상치 등을 가꾼다. 이 텃밭은 싱싱한 무공해 채소를 자급하는 데 큰 역할을 한다. 남편은 이외에도 중앙아시아와 한국에서 보내온 고추씨, 무우씨, 오이씨, 배추씨를 더 심는다. 특히 이곳에 심은 한국 오이는 달고 물이 많아 아주 맛있다고 한다. 

이 댁의 집안일은 세 사람이 분담한다. 아침식사 후 설거지는 남편이 하고, 점심식사 후 설거지는 아들이 하고, 저녁식사후 설거지는 부인이 한다. 주중 식사준비는 부인이 주로 하고, 주말에는 아들이 주로 한다. 집안청소는 아들이 도맡아 하고, 세탁은 남편이 하고, 다듬이질은 부인이 한다. 쓰레기는 아들이 늘 버린다. 또 다른 집에서는 자기가 먹은 식기는 자기가 씻는 것을 보았다. 이처럼 집안일을 어느 누구에게 일방적으로 부담하는 것이 아니라, 식구 모두가 나누어 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들은 식당에서 외식을 하는 일은 거의 없다. 친척이나 친구들이 모이더라도 집으로 초청을 하여 식사를 한다. 외식을 할 정도로 소득수준이 높지 않고, 또한 식당의 음식값이 집에서 하는 것보다도 몇 배로 비싸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초청을 받아 가면 자기가 마실 술이나 음료수는 가지고 가져가는 것이 상례이다. 친구들과 어울러 맥주집에 가더라도 술값 때문에 의리가 상하는 일도 없다. 왜냐하면 자기가 먹을 술은 자기가 사기 때문이다. 안주도 시킬 필요가 없다. 음식도 자기가 먹은 것은 자기가 낸다. 

이 세 식구는 모두 제각기 취미를 가지고 있다. 남편은 독서가 취미이다. 특히 역사, 정치, 인문지리 등에 관한 많은 책을 읽는다. 하루 평균 겨울철에는 6시간, 여름철에는 밭에서 채소를 가꾸면서 3시간 정도 독서를 한다. 부인은 우표를 수집한다. 어느 날 1965년부터 폴란드에서 발행하는 모든 우표를 수집한 다섯 권의 책을 나에게 보여주면서 폴란드우편사를 강의했다. 아들은 어릴 때부터 각종 열쇠고리를 모아왔다. 지금까지 수집한 세계 각국의 열쇠고리는 약 1400개이다. 평범한 열쇠고리부터 기발한 열쇠고리들이 수없이 많다.

이 댁뿐만 아니라, 이곳 사람들은 가족 구성원간 대화가 많다. 어릴 때 엄하신 아버지의 묻는 말에만 대답을 하던 나의 경험과 비교하면 정말 천양지차다. 이곳에서는 아들과 아버지는 거의 친구처럼 지낸다. 이들의 언어에 경어가 없는 것이 수평적 대화를 활성시키는 한 요인이 아닐까 생각한다. 이들은 대체로 말이 많은 편이다. 때로는 이들의 말많음이 나에게 도움이 되기도 한다. 무슨 일에 대해 물으면 상세하게 일러주기 때문이다.

한 평범한 가족의 사는 모습을 보면서 가장 느끼는 것은 우리처럼 버둥거리며 살지 않고 주어진 생활여건 속에서 여유를 가지면서 살아간다는 것이다. 조그마한 아파트이지만 더 큰 아파트를 이사가려고 악착같이 구두쇠로 살기보다는 한 달에 걸치는 여름휴가 때에는 휴양지에서 일광욕, 산림욕, 해수욕 등을 즐기면서 시간을 보낸다. 주말이면 가족들과 공원이나 숲속에서 산책을 하고, 혹은 텃밭에서 채소를 가꾼다. 음악회나 전시회에도 자주 간다. 이 덕분에 나는 한국에서는 보기 어려운 오페라를 여러 편 관람하였다. 지금은 공산주의체제가 무너지고 시장경제체제가 도입된 후 살아가는 방식도 점점 달라지고 있다. 

* 해피데이스 1999년 6월호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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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투아니아 새해 풍습 

새로운 한 해가 시작되는 첫날인 설날은 한민족의 최대명절이다. 설빔을 입고, 차례를 지내고, 세배를 하고, 덕담을 나누고, 떡국으로 세찬을 먹고, 윷놀이 등을 한다. 하루 종일 좋은 말을 많이 하고 들으면 일년 내내 그러하고, 좋은 음식을 배부르게 먹으면 일년 내내 배부르다고 한다. 

리투아니아의 설날 풍습은 어떠할까. 오늘날 새해 첫날은 양력 1월 1일이지만, 이는 19세기경 서유럽에서 도입되었다. 고대 리투아니아인들은 설날을 어느 특정한 일로 정하지 않고 한 해 농사 준비를 시작하는 시기와 동일시했다. 

지난 수세기 동안 리투아니아인들은 12월 24일에서 1월 6일 사이 새해 축제를 지냈다. 특히 성탄절 전야는 연중 밤이 가장 긴 날 중 하나이고, 성탄절은 지난해 끝이자 새해 시작을 의미하기도 했다. 

그래서인지 리투아니아인들에게 설날 풍습은 성탄절 풍습을 다시 반복하는 정도이다. 그믐날이 '작은 성탄절 전야'로 불려진다. 이날 옛 사람들은 잠을 자지 않고 새해를 기다리면서 다양한 점술과 놀이를 했다. 이들은 새해를 맞는 중요한 때를 잠으로 놓친다면 다가오는 일년 내내 게으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믐날과 설날의 최대 관심사는 미래를 알아보는 것이다. 처녀들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물음은 새해에 시집갈지, 누가 애인이나 남편이 될지 등이었다. 총각들 또한 가정을 이루는 일로 골몰했다. 어떤 처녀가 그에게 사랑에 빠질지, 착하고 아름답고 근면하고 부유한 아내를 얻을지 궁금하기 그지없었다. 

장년들은 수확은 풍성할지, 가축은 잘 자랄지, 폭우·폭풍·뇌우가 있을지 등을 알고 싶어했다. 노인들은 이 세상에서 일년을 더 살 수 있을지, 건강은 어떠할지 등에 많은 관심을 가졌다. 이를 위해 여러 가지 점술과 놀이가 행해졌다.

그믐날 물이 담긴 컵에 약간의 재를 넣고 휘젓고 난 후 컵 바닥에 남자 얼굴이 나타나는 지 살펴본다. 만약 나타나면 새해에 시집간다. 자정에 혼자 촛불 12개를 켜고 거울 앞에 앉아 거울을 응시한다. 남자 얼굴이 나타나면 시집간다. 머리를 문 쪽으로 하고 방바닥에 등으로 눕는다. 발을 위로 올리고 신발을 머리 너머로 던진다. 이때 신발 앞이 문 쪽을 보고 있으며 시집간다. 열매를 한 줌 집는다. 열매 수가 홀수이면 시집간다. 

그믐날 밤에 빗이나 자물쇠를 베개 밑에 놓는다. 꿈속에서 머리를 빗겨주거나 문을 여는 남자가 남편이 된다. 종이 12장에 각각 다른 남자 이름을 적고 열 세 번 째 종이는 백지로 놓아둔다. 이 종이들을 섞어 베개 밑에 놓는다. 설날 아침에 일어나 종이 한 장을 꺼내 햇빛으로 읽는다. 종이 적힌 이름의 남자에게 시집간다. 만약 백지이면 홀로 그 해를 보낸다.

젊은 남녀들이 탁자 주위에 모여 가운데 촛불을 밝힌다. 돌아가면서 남자 혹은 여자는 누가 그를 혹은 그녀를 사랑하는 지 묻고 조심스럽게 촛불을 불어 끈다. 이 때 모든 사람들은 가만히 앉아서 촛불 연기가 어느 쪽으로 흘러가는 지를 지켜본다. 연기 방향에 앉은 사람이 바로 질문자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연기가 곧 바로 위로 치솟으면 아무도 그 질문자를 사랑하고 있지 않다. 연기가 갑자기 아래쪽으로 방향을 틀면 방안에 있는 누군가 그 질문자를 미워하고 있다. 

또한 여러 가지 방법으로 운명을 점친다. 그믐날 사람들은 마른 나뭇가지를 눈 속에 꽂아놓는다. 설날 아침 자신의 나뭇가지가 넘어져 있으면, 그는 그 해 죽는다. 잠들기 전 소금을 침대 가장 가까이에 있는 탁자 위에 놓는다. 아침에 소금이 축축하면 그 해 죽고, 소금이 건조하면 계속 산다.

여러 물건을 탁자에 놓고 각각 접시로 덮어놓는다. 접시를 서로 섞어서 한 사람씩 순서대로 접시 하나를 열어본다. 물건마다 고유한 뜻이 담겨져 있다: 반지 - 결혼, 칼 - 사고, 연필 - 학업, 초 - 죽음, 호환 - 명예, 빵 - 만족, 새 - 사랑, 장난감 - 탄생, 열쇠 - 집. 자신이 선택한 물건이 새해 운세를 말한다. 


▲ 예년 같으면 늘상 있어야 할 눈이 오지 않고 있었다. 건데 바로 31일부터 계속 내리는 이 눈이 새해엔 풍년을 암시하려나? 게디미나스 성탑에서 바라본 빌뉴스 대성당 모습  
ⓒ2003 최대석 

날씨나 정황으로 새해의 운세를 예측한다. 설날 날씨가 맑으면 풍년이다. 몹시 추우면 부활절은 아주 따뜻하다. 아침에 온통 서리가 뜰에 앉으면, 좋은 해이다. 안개가 끼면, 전염병과 질병이 맹위를 떨쳐 사람들이 많이 죽는다. 함박눈이 내리면 젖소는 젖을 많이 낸다.

뜰에 까치가 많이 모여 지저귀면, 일년 내내 손님이 많고 행복하다. 첫 손님이 여성이면, 불운한 해이고, 남성이면 운이 좋은 해이다. 설날에 넘어지는 사람은 일년 내내 재수가 없다. 설날에 들은 첫 소식이 좋으면, 일년 내내 좋은 소식이 많다.

설날에 사람들은 서로 덕담을 나누었다. 총각들은 처녀들에게 새 베틀, 연인을 기원했고, 처녀들은 총각들에게 귀여운 여인, 보드카를 기원했다. 젊은이들은 선령(善靈), 악령(惡靈), 저승사자, 거지, 동물 모습 등을 한 옷을 입고 온 마을을 돌아다니며 마을 사람들에게 인사하고 풍작을 기원했다. 마을 사람들은 이들에게 음식물로 환대했고, 선물도 주었다. 

설날에 한 태도가 일년 내내 간다고 믿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다투거나 싸우지 않았고, 많이 웃으며 서로를 도와주었다. 부모들은 아이들에게 잔소리를 하거나 벌을 주지 않았고, 아이들은 착하게 행동했다. 부부는 서로의 앙금을 지우고 마음을 맞추기 위해 사과를 나누어 먹었다. 제마이티야 지방에서는 지난해의 잡귀들을 쫓기 위해 짚다발을 불태우기도 했다. 

오늘날 리투아니아인들은 옛 사람들이 진지하게 해오던 이러한 점술이나 놀이로 인생문제를 해결하고 미래를 예견하는 것을 실제로 믿지 않는다. 하지만 이러한 것을 통해 온 가족이 이웃이나 친구들과 함께 즐겁고 재미있는 시간을 보낼 수 있다. 요즈음 이러한 놀이 풍습마저도 점점 사라지고 있으며, 특히 많은 젊은이들은 그믐날 저녁부터 설날 아침까지 마음껏 먹고 마시고 춤을 추면서 보낸다. 

거울 속에서 미래 남편을 찾으려고 애쓰는 처녀의 간절한 모습, 마을 어른들을 찾아다니며 풍작을 기원하는 젊은이들의 예절 있는 모습, 앙금을 씻고 한 마음을 이루기 위해 사과를 나누어 먹던 부부의 정다운 모습 등을 이제 더 이상 찾아보기 힘들게 되어 아쉽기도 하다. 

* 이 기사는 오마이뉴스 2004년 1월 1일자로 이미 보도된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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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도나 야로니테] 하루종일 ‘삽질’하는 여인

빌뉴스=글 · 사진 최대석/ 자유기고가 chtaesok@hanmail.net

알도나 야로니테(73·여)씨는 순전히 삽질로 연못을 만드는 일이 취미다. 해가 뜨고 질 때까지 늪지대에 위치한 뜰에서 쉴 새 없이 삽질을 한다. 인근 요양소 식당 일을 하다 정년 퇴직한 그는 10여년 전 자신의 집 안 작은 텃밭만 가꾸는 일이 답답했다. 그래서 버려져 있는 국유지 늪지대에 조금씩 연못을 파고 주위를 조경하기 시작했다. 처음엔 국유지를 마음대로 사용한 죄로 벌을 받지 않을까 걱정이 되고 두려웠단다. 

주위 사람들은 뜻밖에도 조경을 한 그에게 아낌없는 찬사를 보냈고, 리투아니아 파비르제시 당국에서는 공산체제가 무너진 뒤 사유화를 추진하면서 할머니에게 아예 텃밭 인근 늪지대 2600평을 선사했다. 그는 약 2m 깊이로 한삽 두삽 흙을 파내 못을 만들고 안에 연꽃을 심었다. 주변에는 습지에 잘 자라는 화초를 심었다. 그는 지금까지 정원에 크고 작은 연못을 다섯개나 조성했다. 

그는 “이런 일을 하지 않았다면 자신도 은퇴한 노인들이 겪는 각종 질병으로 고생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연못 공원은 마을 주민들과 인근 요양소 환자들에게 개방되어 있다. 이른 봄부터 늦가을까지 수많은 화초들로 가득 찬 연못 정원은 이제 지역 명소로 자리잡았고, 신혼부부의 결혼식 사진 단골 촬영지가 되었다. 야로니테씨는 연못에 핀 연꽃을 방문객들이 찾아와서 지켜볼 때가 제일 행복하다고 한다. “여긴 원래 볼품없는 늪지대였다. 그래서 사람들이 노년에 나를 찾아와 산책할 수 있는 곳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이런 연못이 없다면 누가 늙은 나를 찾아오겠는가. 앞으로도 찾아오는 이들을 위해 새 못을 파고 더 아름답게 가꿀 것이다.” 놀랍게도 연못에는 많은 붕어들이 자라고 있었다. 그는 아마도 새끼 물고기나 알이 야생 오리에 붙어와 이곳에 보금자리를 튼 것으로 생각했다. 붕어는 남을 배려하는 삶을 살고 있는 야로티테씨에게 하늘이 준 식량인 듯했다. 

그는 지금껏 혼자 살아왔다. 왜냐고 물으니 “(사람은) 혼자 태어나, 혼자 살다가, 혼자 죽는 것 아니냐”고 반문했다. 그는 평생 가꿔온 연못 정원을 이웃집 대학생 아들에게 물려줄 생각이다. 포클레인으로 한나절이면 팔 수 있는 연못을 삽으로 짧게는 몇 개월, 길게는 몇년 걸려 파왔다. 그는 “기계로 속히 연못을 팔 수도 있지만, 우선 혼자 삽질을 하는 것이 더 큰 의미가 있고 건강에도 좋으며, 더욱이 그런 기계를 빌릴 경제적 여유가 없었다”고 말했다. 

* 이 기사는 한겨레21 제484호 2003년 11월 13일자로 이미 보도된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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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변국 EU 가입 예정으로 소외감 커져 … 주민들, 러시아에 “독일로 복귀시켜달라” 

최대석 / 리투아니아 통신원 ds@chojus.com

칼리닌그라드 항구에서 훈련중인 러시아 함대. 칼리닌그라드는 러시아의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다.  

10월9일 유럽연합 집행위원회는 동유럽과 지중해 주변 10개국의 유럽연합 가입 준비가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다고 발표했다. 2004년에 유럽연합 가입이 예정되어 있는 10개국은 헝가리, 폴란드, 체코, 슬로바키아, 슬로베니아,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말타, 키프러스다. 

이어 유럽연합 정상들은 10월25일 브뤼셀에서 회원 확대와 관련된 발전기금 협정에 최종 합의했다. 유럽연합 의장국인 덴마크의 안데르스 라스무센 총리는 “이번 정상회의는 성공적이었고, 역사적인 유럽연합 확대를 향한 중요한 전진이었다”고 평가했다. 

그러나 유럽연합과 각국 지도자들의 합의와는 달리, 유럽연합 확대가 가입 희망국가 국민들의 전폭적 지지를 받지는 못하고 있다. 유럽연합 웹사이트에 올라 있는 여론조사 결과에 따르면 슬로바키아 69%, 폴란드 66%, 슬로베니아 55%, 에스토니아 54%, 리투아니아 53%, 말타 51%, 라트비아 44%, 체코 44%의 국민만이 해당국가의 유럽연합 가입을 지지하고 있다. 이중에서도 에스토니아, 리투아니아, 라트비아의 발트 3국은 유럽연합 가입으로 인해 인접한 강국인 러시아와의 관계가 악화되지 않을까 염려하고 있다. 예를 들면 칼리닌그라드를 둘러싼 유럽연합, 폴란드, 리투아니아 그리고 러시아 간 비자문제 같은 예민한 문제들이 산적해 있다. 

러 본토와 600km 떨어진 특수성

칼리닌그라드는 발트해에 접해 있는 러시아연방 491개 주(州) 중 한 주로 1945년 포츠담회의에 따라 독일 영토에서 러시아 영토로 편입되었다. 이 지역은 러시아 본토에서 떨어진 고립 영토다. 북동쪽 국경은 리투아니아, 남쪽은 폴란드 서쪽은 발트해에 접해 있다. 15,100km2에 인구는 약 100만명. 가장 가까운 러시아 본토인 프스코프 시에서 600km나 떨어져 있다. 하지만 칼리닌그라드는 러시아의 유일한 발트해 부동항(不凍港)이자, 러시아와 동유럽을 잇는 항구라는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폴란드와 리투아니아 사이에서 샌드위치 신세인 칼리닌그라드는 두 나라가 2004년 유럽연합에 가입하면 유럽연합에 떠 있는 ‘러시아의 섬’이 될 것이다. 현재 칼리닌그라드 주민들은 폴란드, 러시아, 리투아니아 3국 간 무비자 협정으로 세 나라를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다. 그러나 유럽연합은 솅겐조약에 따라 유럽연합 비회원국 국민들이 회원국을 여행할 때 반드시 비자를 받도록 요구하고 있다. 

러시아는 폴란드와 리투아니아가 유럽연합에 가입하더라도 지금처럼 칼리닌그라드 주민들이 비자 없이 본토로 통행할 수 있도록 해줄 것을 요구해왔다. 반면 폴란드와 리투아니아는 유럽연합의 규정대로 비자를 받아야 한다는 입장이다. 유럽연합 역시 기존의 비자체제를 고집해왔다. 한편 칼리닌그라드 주민들은 주민들대로 ‘인근 국가들이 모두 유럽연합에 가입한다면 우리는 더욱 소외감을 느낄 것이다. 이 참에 차라리 독일로 복귀시켜 달라’는 주장을 펴, 러시아의 심기를 건드리기도 했다. 

팽팽한 논란으로 좀처럼 접점을 찾기 어려웠던 이 비자문제는 10월25일 유럽연합 정상들이 한 발 물러나면서 일단락됐다. 칼리닌그라드의 주민이 다른 러시아 지역을 왕래할 수 있는 ‘통행증’을 발급받도록 하는 임시방편에 합의한 것이다. 

칼리닌그라드 문제는 유럽연합과 러시아 간 관계를 결정짓는 중요한 출발점이다. 경제적으로 안정된 유럽연합 회원국과 상대적으로 낙후되어 있는 비회원국 간의 관계를 어떻게 이끌어갈 것인가, 이는 확대를 시도하고 있는 유럽연합이 꼭 해결해야 할 중요한 과제이기도 하다. 

* 이 기사는 주간동아 2002년 11월 28일(348호)자로 이미 보도된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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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투아니아 ‘독재자들 동상’ 처리 발상의 전환… 조각공원 만들어 관광객 인기몰이 

<최대석/ 리투아니아 통신원> chtaesok@hanmail.net

리투아니아의 수도인 빌뉴스 중심가에 위치한 루키쉬켸스 광장 중앙에는 10여년 전까지 레닌 동상이 우뚝 서 있었다. 1952년 세워진 이 거대한 동상은 1991년 리투아니아가 소련으로부터 완전히 독립할 무렵까지 난공불락의 공산주의를 상징하듯 버티고 있었다. 비단 빌뉴스뿐 아니라 구 소련이 건재하던 시절의 동유럽 국가 도시에는 어디나 마찬가지였다. 사람들은 이 동상 앞에 늘 싱싱한 꽃을 바쳤고, 찬양의 시를 낭송했다. 

하지만 지금 그 자리는 모두 텅 비어 있다. 구 소련을 이루고 있던 연방 국가들이 제각기 독립하면서 어제의 우상들은 사악한 점령자나 동족을 핍박한 매국노로 전락했다. 이념체제를 상징하는 이들 동상과 조각상은 시민들의 손에 의해 철거되었다. 

리투아니아를 비롯한 발트해 3국 역시 마찬가지였다. 발트해 3국은 소련에 의해 여느 나라 못지않은 고통을 당했다. 제1차 세계대전 후 독립국가를 형성한 리투아니아는 1940년과 1944년 붉은 군대에 점령되어 반세기 동안 소련의 지배를 받았다. 당시 36만명이 사망했거나 시베리아로 강제 추방되었다. 44만명은 조국을 등지고 외국으로 떠났다. 공산체제가 무너지자 가장 먼저 옛 소련의 조각상들이 수난을 당한 것은 당연한 귀결인지 모른다. 

처음에는 많은 사람들 반대 

청동이나 철골 콘크리트로 된 이 거대한 조각상들은 철거 후 수년 동안 교외의 구석진 곳에 방치되었다. 일부는 부서지기도 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이 조각상들의 처리는 큰 골칫거리가 되었다. 급기야 1998년 리투아니아 정부는 옛 소련 시절의 대표적 조각상 42개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에 관한 아이디어 공모전을 개최하기에 이르렀다. 

이 공모전에서 리투아니아 남부의 사업가 빌류마스 말리나우스카스(63)가 기발한 제안을 했다. 말리나우스카스가 소유하고 있는 6만평의 숲에 이들 조각상을 모아 전시하는 공원을 세우자는 것이었다. 이 공원은 지난해 만우절에 ‘그루타스 공원-소련조각박물관’이라는 이름으로 정식 개관했다. 

그루타스 조각공원의 개관은 열띤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수많은 리투아니아인들을 시베리아로 추방한 장본인들의 동상을 다시 세운다는 사실에 적잖은 사람들이 반대 의사를 표시했다. 이에 대해 설립자인 말리나우스카스는 “이 공원의 설립 취지를 이해하는 데는 어느 정도 시간이 흘러가야 하고, 세대가 바뀌어야 한다”고 말했다. 말리나우스카스 자신의 친척들도 시베리아 강제수용소로 추방되어 사망했다고 한다. 

그루타스 공원은 빌뉴스에서 남서쪽으로 120km 떨어진 그루타스라는 작은 마을 숲 속에 위치해 있다. 이 공원은 숲과 늪으로 되어 있어 시베리아와 유사한 자연환경을 가지고 있다. 공원 입구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이 철로에 전시된 화물열차 한 칸이다. 이 화물칸은 소련 점령시대에 리투아니아 거주자들을 시베리아로 짐짝처럼 옮기던 화물열차의 일부다. 공원 둘레에 쳐진 높은 철조망과 군데군데 있는 경비초소는 시베리아 강제수용소 모습을 연상케 한다. 

지금 이 조각공원에는 64개의 조각상이 전시되어 있다. 보는 이로 하여금 억지로라도 감탄과 경배를 자아내게 만든 듯한 이 거대한 조각상들은 리투아니아 전역에서 가져온 레닌, 스탈린, 빈짜스 미쯔케비츄스-수카스(리투아니아 공산당 초대 서기장), 마리톄 멜니카이톄(유명한 여성 빨치산) 등이다. 또 ‘어머니’ 등 이념적인 이미지를 연상케 하는 조각도 적지 않다. 그러나 ‘청년 공산주의자 네 명’과 같은 조각은 ‘술 취한 청년 세 명이 만취한 한 명을 부축하고 택시를 잡는 장면’이라는 현대적 우스개로 더 유명해졌다. 안내자의 설명에 따르면 이 조각상들은 모두 당대의 유명한 조각가들이 만든 작품으로 예술성도 뛰어나다고 한다. 

공원에는 조각상뿐만 아니라 구 소련 시절에 큰 마을 어디에나 세워져 있던 ‘문화회관’이 지어져 있다. 문화회관 내부에는 소련 시절의 각종 자료들과 예술작품이 전시되어 있다. 공원 설립에 열렬히 반대했던 저명 인사들의 조각상들도 눈길을 끈다. 이들은 본인의 뜻과는 상관없이 자신들이 증오하는 레닌 등 공산주의자들의 동상과 함께 같은 숲 속에서 ‘동거’하게 된 셈이다. 이 지역 출신 국회의원이자 전직 보건부 장관으로 조각공원 설립을 맹렬하게 반대했던 워자스 갈디카스의 조각상에는 ‘구 소련의 조각상을 가장 유명하게 한 사람을 위해’라는 유머러스한 문구가 적혀 있다. 공원 내 식당에서는 소련 시절에 주로 먹던 음식을 판매한다. 물론 이 같은 과거사에 관심이 없는 아이들과 젊은층을 위한 놀이터와 작은 동물원도 마련돼 있다.

‘오욕의 역사’ 살아 있는 교육장 

공산체제가 무너진 후 대부분 동유럽 국가들은 공산주의자들의 조각상을 파괴함으로써 일종의 ‘한풀이’를 했다. 지난날 당했던 가혹한 억압에 대한 복수인 셈이다. 이 그루타스 조각공원을 제외하면 공산체제 당시의 이념적 역사물을 수집해 전시한 박물관은 전무하다. 그 결과 그루타스 조각공원은 오늘날 관광객들에게 큰 인기를 얻고 있다. 필자가 방문한 날도 공원 입구 넓은 주차장에는 승용차와 대형 관광버스들로 빈자리를 찾기 힘들 정도였다. 

1999년 실시한 여론조사에서는 60% 이상의 리투아니아인들이 이 같은 공원의 필요성에 대해 찬성하는 의사를 밝혔다. 처음에는 냉소적인 시각으로 바라보던 사람들도 지금은 조각공원의 역사적, 교육적 가치를 인정하고 있다.

교사인 리야나씨(34)는 “소련의 강압적인 점령시대를 겪어보지 못한 청소년들이 그 당시 상황을 어느 정도 엿볼 수 있고 체험할 수 있다”는 말로 조각공원의 의의를 평가한다. 또 한때 공산주의에 심취했다는 민다우가스씨(36)는 “아이들에게는 볼거리를 주고, 우리 어른들에게는 옛 시절에 대한 향수를 느끼게 한다. 나도 한때는 청소년 공산당원이었다. 공산주의는 아름다운 이념이지만, 실현하기 불가능하다”는 견해를 밝혔다. 

한국 사회도 옛 조각상 철거에 대한 적지 않은 시비를 겪고 있다. 나중에 복원되었지만 2000년 서울 영등포 문래공원의 박정희 흉상이 민족문제연구소 등 시민단체 회원들에 의해 철거되었고, 친일행적을 한 적이 있는 인사들의 동상이 철거된 예도 있다. 36년간 한민족을 억압하고 통치한 조선총독부 청사도 현재는 사라졌다. 그러나 역사적인 유물을 파괴한다고 해서 그 오욕의 역사까지 지울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리투아니아는 옛 조각상을 파괴하는 대신 광장에서 숲 속으로 자리를 옮겨 보존하는 방식을 택했다. 후손들은 이 동상을 보며 수치스러운 역사를 반복하지 않도록 다짐하는 역사 교훈의 장으로 삼을 것이다. 

* 이 기사는 주간동아 2002 년 8월 22일(348호)자로 이미 보도된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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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군 1946~47년 독일서 몰수한 30만3천톤 수장 … 해변서 용기 발견 ‘공포의 바다’로 돌변 

<최대석/ 리투아니아 통신원>chtaesok@hanmail.net

지난 6월5일 낮 12시30분쯤. 리투아니아 항구도시 클라이페다의 스밀티네 해변에서 일광욕을 즐기던 한 여성이 파도에 떠밀려온 이상한 용기(容器)를 발견하고 경찰에 신고했다. 길이 2m, 지름 30cm로 표면에 해골 그림과 함께 ‘Yp럕ite’(이페리트)이라는 글씨가 적힌 이 용기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발트해에 수장된 화학무기 중 하나로 밝혀졌다. 만약 호기심 많은 어린이나 악의를 품은 사람이 이를 먼저 발견했다면 어떤 결과가 생겼을지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수심이 얕은 발트해에 위험한 화학무기를 대량으로 수장했다는 사실은 1990년대 초기부터 전문가들 사이에 간간이 알려져 왔었다. 그러나 화학무기가 해변에서 발견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그만큼 일반인들이 느끼는 충격은 클 수밖에 없다. 한때 청정해역의 대명사였던 발트해는 이제 공포의 바다로 변하고 있다. 

“실제는 더 많은 양 버려졌을 것” 

발트해에서 발견된 이페리트는 제1차 세계대전중인 1915년 독일이 프랑스 전선에서 처음 사용한 발포성 독가스다. 이후 영국 이라크 독일 러시아 등이 주로 생산했다. 눈과 폐를 손상시키고 화상이나 발포 증세도 나타나는 이 독가스는 5g이면 인명살상도 가능할 만큼 위험한 무기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인 1946년과 47년, 연합군은 독일로부터 약 30만3000톤에 달하는 화학무기를 몰수했다. 이 무기들의 처리문제는 결코 간단치 않았다. 엄청난 환경 재앙을 몰고 올 수도 있는 무기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전쟁에서 승리한 영국 미국 소련은 유럽 분할을 둘러싼 정치문제에 온 정신이 쏠려 있어 환경 따위에는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결국 연합국은 몰수한 화학무기를 서로 분할한 후, 대서양의 깊은 바다 밑에 수장하기로 협약했다. 자료에 따르면 영국이 4만2000톤 혹은 6만5000톤, 소련이 3만5000톤을 인수하고, 나머지는 미국 몫이 되었다. 

그러나 세 나라는 대서양 대신 가까운 발트해를 선택했다. 화학무기를 실은 배를 대서양까지 몰고 나가는 것이 힘들다는 이유에서였다. 또한 몰수한독일 무기뿐만 아니라 자신들이 보유하고 있던 화학무기도 함께 수장했기 때문에 실제로 발트해에 버려진 양은 더 많을 것으로 추정된다. 

영국과 미국은 화학무기를 배에 실어 덴마크와 스웨덴 사이의 카테가트 해협과 덴마크-노르웨이간의 스카케라크 해협에 배와 함께 가라앉혔다. 수심 200m 미만인 이 지역은 현재도 선박의 왕래가 빈번하고 고기잡이가 성행하는 곳이다. 소련은 배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아예 3만5000톤 분량의 폭탄과 포탄을 그대로 바다 밑에 산포(散布)했다. 독물질이 든 폭탄이 터진 장소는 보른홀름섬 인근의 스웨덴 해역과 라트비아 항구도시 리예파야에서 남서쪽으로 70마일 떨어진 해역이다. 과거 소련은 수십년간 이 해역에서 고기잡이를 금지해 왔다. 

영국과 미국 국방부는 1997년 이 작전과 관련한 자료의 비밀유지 기한을 2017년까지 연장했다. 하지만 러시아인들이 비밀의 막(幕)을 조금 열어주었다. 그들은 수장된 화학무기의 이름과 양, 그리고 수장된 장소도 공개했다. 러시아측 자료에 따르면 현재 발트해 밑바닥에는 이페리트, 루이사이트, 사린가스, 비소 등 총 14가지에 달하는 화학무기가 가라앉아 있다. 

발트해에 있는 이 화학무기 쓰레기장에 대해 전문가들의 의견은 다소 엇갈린다. 리투아니아 환경부 소속 해양연구센터 소장인 알기르다스 스타케비추스는 ‘례투보스 지뇨스’지와의 인터뷰에서 “발트해는 넓은 바다이므로 이들 무기가 가라앉아 있다 해도 독물질이 많이 희석되었을 것이다. 우리는 해수 표본을 채취해 바다 오염을 측정하고 있는데 아직 오염은 허용 기준치를 넘지 않고 있다. 또 프랑스 어류학자들이 리투아니아 해변에서 잡힌 어류를 조사했지만 별다른 변화를 찾지 못했다”고 말했다. 반면 전직 러시아 함대의 부사령관 텡기즈 보리소프는 “어부들의 저인망에 화학무기 폭탄이 걸릴 위험이 있다. 얼마 전 러시아 잠수함들이 이 인근을 조사했는데 특수 잠수함 표면에는 아교풀처럼 무엇인가 더덕더덕 붙어 있었다. 그것은 부식된 포탄에서 나온 이페리트였다. 보른홀름섬 근처 약 40m 수심에서는 많은 양의 사린가스가 발견되었다”면서 문제의 심각성을 경고했다. 

수년 내 엄청난 재앙 초래 우려 

지난 90년대 중반부터는 발트해의 화학무기 수장 지역에 대해 몇 차례의 현장조사가 이루어졌다. 가장 최근에는 지난해 12월부터 올해 1월 사이에 러시아, 폴란드 그리고 인근 몇몇 국가 과학자들이 주축이 되어 조사를 벌였다. 이들은 바다 밑바닥에 가라앉은 배에서 화학물질이 새고 있다는 사실과 함께 심하게 부식된 포탄이 분해되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기준치를 200배나 넘는 비소량을 함유한 물과 토양 표본도 있었다. 몇몇 전문가들은 이대로 방치하다가는 수년 내에 대대적으로 독물질이 분출되는 엄청난 재앙을 초래할 수도 있다고 우려하고 있다. 

상상만으로도 무시무시한 이 예측이 현실이 될 경우, 발트해 연안 국가들은 환경 재앙뿐 아니라 경제붕괴를 맞을 가능성이 크다. 어업은 발트해 연안 국가들의 경제에서 큰 몫을 차지한다. 발트해의 연간 어획량은 250만톤에 달한다. 발트해의 어획금지 조치는 곧 국내 생산의 감소로 이어지고 연쇄적인 경제문제가 발생할 것이다. 이는 연안 국가뿐 아니라 유럽연합, 나아가 세계 경제에 큰 파장을 가져올 수도 있다. 

물론 발트해 연안 국가들이 미국 영국 러시아 등 당시 연합군 국가들에 피해보상을 요구하는 방법도 있다. 그러나 이는 2억5000만 유럽인에게 체르노빌 원전사고나 9·11 테러 이상의 공포와 심리적 공황상태를 야기할 것이다. 또 수심이 얕은 발트해에 수장된 거대한 양의 화학무기가 전 세계적으로 알려지면서 테러리스트들의 표적이 될 가능성도 없지 않다.

55년 동안 바다 밑에서 잠자고 있다가 파도에 밀려온 이페리트 용기는 그동안 소극적으로 대처한 국가들에 이 문제의 심각성을 인식시키는 좋은 계기가 되고 있다. 관련 국가들의 원수뿐 아니라 유럽연합과 나토가 이제 적극적인 행동을 취하려는 분위기다. 한편 이번 사건으로 화학무기 생산 중단, 사용금지 및 폐기 등에 대한 세계인의 요구가 더욱 거세질 전망이다. 

수장된 화학무기는 일반인들에게도 현실적인 위협으로 다가오고 있다. 이페리트 용기 발견을 보도한 리투아니아 언론사의 인터넷 독자 의견란에는 발트해 해변 대신 해외나 내륙 호수로 여름휴가를 가겠다는 글이 많이 올라와 있다. 화학무기를 제조한 나치 독일이나 이를 경솔하게 바다에 수장한 연합국측에 대한 원망과 분노의 글도 적지 않다. 올 여름 청정해역으로 이름난 발트해를 찾는 피서 인파는 현저하게 줄어들 것이 분명하다. 

* 이 기사는 주간동아 2002 년 6월 27일(340호)자로 이미 보도된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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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 … 국회의장 … 여성 운전자와 접촉 사고 

<최대석/ 리투아니아 통신원> chtaesok@hanmail.net

최근 리투아니아의 고위층 인사 세 명이 탄 승용차가 잇따라 접촉사고를 당했다. 공교롭게도 가해자는 모두 일본 자동차인 마쓰다를 모는 여성 운전자였다. 

첫 사고는 지난해 12월13일에 일어났다. 이날 아침 발다스 아담쿠스 리투아니아 대통령을 태운 전용차는 경찰관과 경호원 차의 호위를 받으며 집무실로 가던 중이었다. 그런데 대통령궁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아로세날로 거리에서 마주 오던 마쓰다가 중앙선을 넘어 대통령 전용차를 들이받았다. 

마쓰다를 운전한 라사 바넬리에녜(23)는 앞에서 달리던 차가 갑자기 멈추자 급히 건너편 차선 쪽으로 운전대를 돌렸다. 그 순간 공교롭게도 건너편 차선에서 선두에 달리던 경찰관 차가 막 지나가고 바로 뒤에 대통령 전용차가 오고 있었다. 이 접촉사고로 바넬리에녜는 벌금 150리타스(4만5000원)를 물었다. 

두 번째 사고는 1월8일 빌뉴스 외곽에서 일어났다. 출근하는 아르투라스 파울라우스카스 리투아니아 국회의장을 태운 BMW 740 전용차가 2차선 도로에서 마주 오던 차와 경미한 접촉사고를 냈다. 쌍방의 잘못으로 판정된 이 사고로 운전자 리라 그리니톄(24)와 국회의장 승용차 운전사는 각각 벌금 100리타스(3만원)를 물었다. 

마지막으로 1월18일 빌뉴스 시내에서 라이무톄 밀비디에녜(38)가 몰고 가던 차가 아르투라스 포빌류나스 리투아니아 올림픽위원장의 BMW 525 리무진을 들이받았다. 골목에서 튀어나온 마쓰다가 아직 제설작업이 안 된 거리를 저속으로 달리던 BMW를 들이받아 난 사고였다. 운전사가 사고 수습을 위해 교통경찰을 기다려야 했기 때문에 포빌류나스 위원장은 300m 떨어진 집까지 눈길을 걸어가야 했다.

비록 경미한 접촉사고였지만 대통령과 국회의장을 태운 전용차가 교통사고를 당했다는 것은 ‘제왕적 권력’으로 표현되는 한국 사회에서는 도저히 이해하기 힘든 일. 하지만 이 사고 후 대통령 경호를 강화해야 한다는 소리도, 경호 담당자가 징계를 받았다는 소리도 듣지 못했다. 오히려 사고를 낸 여성 운전자들이 대중매체의 주목을 받아 유명해졌다. 

* 이 기사는 주간동아 2002 년 2월 14일(322호)자로 이미 보도된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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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걱! 모래를 밥으로 냠냠 … ‘리투아니아 엽기녀’ 

<최대석/ 리투아니아 빌뉴스 통신원> chtaesok@hanmail.net

리투아니아 북서 지방의 작은 마을에 사는 스타니슬라바 몬스트빌례네씨(54·여) 는 벌써 3년째 거의 모래만 먹으면서 살고 있다. 믿기 어려운 일이지만 그녀에게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음식은 바로 모래다. 

몬스트빌례네씨 자신도 이러한 비정상적인 식성을 잘 설명하지 못한다. 모래를 먹기 전 그녀는 여러 가지 병으로 고생했다고 한다. 허리가 아프고 혈압도 높고 잇몸에서 피가 나는가 하면, 소화도 잘 되지 않았다. 마을 의사는 그녀에게 뇌종양 말기라는 진단을 내렸다. 

어느 날 몬스트빌례네씨는 평소처럼 젖소의 젖을 짜기 위해 숲길을 따라 목축장으로 가고 있었다. 길 옆에 있는 모래굴에 우연히 눈길이 쏠렸다. ‘어머, 정말 아름다운 모래네! 한번 주워봤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줍기만 할 것이 아니라 맛을 보라고 부추기는 어떤 신비한 힘을 느꼈어요. 그때를 회상하면 지금도 입안에 군침이 가득 돌 정도인걸요.” 

처음 먹어본 모래는 너무 맛있었다. 그 후 그녀는 주위의 따가운 시선에도 불구하고 조금씩 모래를 먹기 시작했다. 의사들은 빈혈이 생기거나 위에 상처가 날 것이라며 그녀를 말렸다. 식구들도 완강히 반대했다. 

그런데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다. 그때까지 그녀를 괴롭힌 현기증이 사라지고 혈압과 시력이 좋아졌다. 잇몸 출혈과 탄산증(呑酸症)도 사라지고 치아마저 깨끗해졌다. 의사들의 진단에 따르면 혈색소량도 증가했다고 한다. 그녀는 모래로 인해 자신의 몸이 건강해졌다고 믿고 있다. 의사들은 의아한 표정만 지었을 뿐, 모래가 그녀의 병을 고친 이유에 대해서는 아무도 설명하지 못했다. 

몬스트빌례네씨는 언젠가 정신없이 건초 작업을 하느라 그만 모래 먹는 것을 잊어버렸다. 그러자 다시 복부에 통증이 왔다. 이 같은 경험으로 그녀는 모래의 치료 효과에 대해 확신하게 되었다. 

몬스트례네씨는 보통 일주일에 20kg 정도의 모래를 먹는다. 먹고 싶을 때마다 손으로 모래를 주먹밥처럼 뭉쳐 꼭꼭 씹어 먹는다.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것은 도토(陶土)가 섞인 모래다. 집 근처에 있는 숲 속 떡갈나무 아래 모래굴에서 일주일 분량의 ‘식량’을 채취해 온다. 그녀는 이 모래가 ‘초콜릿처럼 맛있다’고 한다. 

요즈음 몬스트례네씨는 가는 곳마다 모래를 관찰하고 맛을 본다. 지금은 주식이 모래이고 가끔 빵과 수프를 먹는 정도다. 그녀는 모래가 자신에게 건강뿐만 아니라 힘과 안정감을 준다고 굳게 믿고 있다. 한 이웃은 유명세를 타기 위해 그런 기행을 하는 것 같다고 말하지만, 아무리 유명세가 좋다 하더라도 모래를 먹고 살 수 있는 사람이 세상에 몇이나 될까. 

* 이 기사는 주간동아 2002 년 1월 3일(316호)자로 이미 보도된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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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기만타스] 아파트를 탈출한 ‘타잔’

빌뉴스=글·사진 최대석/ 자유기고가 chtaesok@hanmail.net

영화 속의 ‘타잔’과 흡사한 인물이 리투아니아에 살고 있다. 알기만타스 아르치마비추스(61)는 벌써 30년째 울창한 숲 속에서 살고 있다. 리투아니아 제2의 도시인 카우나스에 있는 자신의 안락한 아파트를 버리고 겨울철에는 지하벙커에서, 여름철에는 나뭇가지와 나뭇잎으로 만든 움막에서 생활하고 있다. 

이전에 그는 재봉사 일을 했다. 하지만 도시의 소음과 먼지, 냄새 그리고 소란스런 대화와 만원버스 등이 싫어 쉬는 날이면 늘 배낭을 메고 자연 속을 헤맸다. 울창한 소나무 숲과 많은 호수로 유명한 이그날리아 지역 도보여행에 참가한 뒤 그는 자연에 완전히 매료되어 도시생활을 청산했다. 하지만 그의 갑작스런 숲 속 등장은 인근 마을 주민들에게 경계의 대상이 되었다. 그들은 이 이방인을 노숙자나 마약복용자로 여겼다. 심지어 마을 술꾼들은 그를 찾아가 술친구가 돼달라고 청하기도 했다. 마을에 안 좋은 일이 생기면 사람들은 당장 이 이방인에게 의혹의 눈길을 보냈다. 그는 여러 차례 경찰서에 불려가 절도나 살인 혐의자로 추궁을 받았다. 

하지만 그는 이런 곤욕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숲 속을 떠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야생생활을 즐겼다. 또 동물들도 그를 잘 따랐다. 다람쥐와 담비가 소나무 꼭대기에 만든 그의 움막에 함께 둥지를 틀고 살기도 했다. 순록도 소리만 지르면 언제라도 그에게 달려올 정도였다. 그는 순록 등 위에 안장을 얹고 말처럼 타고 다니기도 했다. 숲 속에 살면서 채식주의자로 사는 법도 배웠다. 그는 주로 나무열매, 나뭇잎, 풀 등을 먹었다. 그가 가장 좋아하는 음식은 비타민C를 대량으로 함유하고 있는 쐐기풀이다. 이 풀은 피부에 닿으면 바늘에 찔린 것처럼 따끔따끔해 사람들이 아주 기피한다. 그는 이 풀을 뜯어 빵처럼 뭉쳐서 혀에 닿지 않도록 꼭꼭 씹어먹는다. 그가 가장 좋아하는 음료수는 말린 사과꽃잎으로 만든 차다. 

그는 ‘리투아니아 사진작가협회’ 회원이기도 하다. 초라하지만 자신의 사진전시관을 숲 속에 세워 방문객들에게 볼거리를 하나 더 제공하고, 지하벙커에는 사진인화 작업실까지 차렸다. 때로 자연을 주제로 시를 쓰기도 한다. 그는 “숲 속은 외롭지 않다. 금수초목들이 곁에 있고, 물이 흐르고, 새들이 노래하기 때문”이라며 “앞으로 숲 속 생활 체험장을 만들어 청소년들에게 자연사랑을 가르치고 자신의 경험을 전해줄 것”이라고 말했다. 최근 그는 혼자만의 은둔생활을 접고, ‘리투아니아 타잔’을 찾아오는 아이들을 위한 봉사생활을 시작했다. 

* 이 기사는 한겨레21 제475호 2003년 9월 18일자로 이미 보도된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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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뉴스에서 열린 노래축제의 떠들썩한 현장… 
통일의 역사를 주제로 민족애 고취 


빌뉴스=글·사진 최대석/ 자유기고가 chtaesok@hanmail.net

19세기 중반 유럽에 대중 노래부르기 운동이 싹트기 시작했다. 1843년 스위스 취리히에서 유럽 최초로 노래축제가 열렸는데, 이것이 대규모 아마추어 합창단과 음악단체 합동공연의 효시다. 이 전통은 1935년까지 92년간 지속되었다. 독일에서 1845년, 에스토니아에서 1869년, 라트비아에서 1873년에 각각 대형 노래축제가 처음 열리기 시작했다. 리투아니아는 러시아의 억압으로 다른 나라보다 늦은 1924년에야 비로소 노래축제를 처음 열었다. 음악·노래·무용 등에 종사한 사람들이 모두 한자리에 모여 관객들과 함께 하나가 되는 대형 축제를 벌였다. 리투아니아인은 초기부터 노래축제를 통해 민족의식을 자각하고, 민족결속을 다지며, 조국애를 함양하고, 민족문화를 전승하고자 했다. 

리투아니아 민족 노래축제는 고대 그리스의 올림픽 정신에 기반을 두고 4년마다 여름철에 개최된다. 노래축제는 이미 오래 전부터 리투아니아 민족의 가장 큰 여름행사로 자리매김했다. 올해는 16번째 행사로 6월30일∼7월6일에 리투아니아 수도 빌뉴스에서 열려 무용인·가수·악사·민속예술인 등 모두 2만8천명이 참가하는 대규모 공연을 했다. 미국·캐나다·브라질·오스트레일리아·독일·라트비아·폴란드·러시아·우크라이나 등지에서도 리투아니아 노래와 춤을 애호하는 리투아니아인 1천여명이 참가했다. 


사진/ 7000명이 출연한 리투아니아 전통춤 공연 한 장면(왼쪽) [실제 사진 설명은 7000명이 출연한 리투아니아 전통춤 공연 한 장면]. 행사 내내 도심 곳곳에서 즉석 노래와 춤 공연이 끊임없이 이어졌다(오른쪽).


전통의상 패션쇼 인기폭발 

21세기 들어 처음 여는 이 노래축제는 리투아니아 역사와 상호 주제를 결부한 첫 행사였다. 민다우가스 대공은 리투아니아 땅을 통일한 뒤 1253년 7월6일 왕으로 즉위했다. 그는 리투아니아 최초의 왕이자 마지막 왕이었다. 이후 리투아니아는 다시 대공 체제로 수세기를 내려왔다. 이번 노래축제는 그의 왕위 즉위식 750년을 기념하여 그의 동상을 리투아니아 국립박물관 앞 광장에 세웠고, 그의 이름을 딴 다리도 개통했다. 민다우가스 왕은 오늘날 리투아니아 민족 통합의 상징으로 떠오르고 있다. 

이번 노래축제는 19세기 리투아니아 민족 전통의상 패션쇼로 시작되었다. 패션쇼는 입장료가 100∼400리타스(약 4만∼16만원)인데도 많은 사람들이 관람해 대성황을 이루었다. 리투아니아 전통의상은 주로 아마(亞麻)를 이용해 베틀로 짠 천으로 만들었다. 의상 무늬도 바늘로 수를 놓은 것은 드물고 거의 다 베로 짠 것들이었다. 리투아니아 아욱쉬타이티야·제마이티야·주키야·수발키야 지방에서 입은 전통의상 86벌이 선보였다. 이들 네 지방의 전통 복장은 구성은 큰 차이가 없으나 모양은 현저하게 다르다. 비옥한 땅을 가진 수발키야 의상은 고급스럽고 정교하다. 치마에 작은 창 무늬가 새겨져 있고 비교적 엷은 색을 띠고 있다. 아욱쉬타이티야 의상과 제마티야 의상은 리투아니아 표현을 빌리면 ‘주야지차’(천양지차라는 뜻임)다. 전자는 흰 머리수건과 무늬가 적은 치마로, 후자는 붉은 머리수건과 다양한 색의 치마로 특징지어진다. 이날 패션쇼는 특히 출연자들이 무언극 형태로 재미있게 촌극을 해 관객들의 환호를 받았다. 

캉클레스의 아름다운 선율 

또 리투아니아 최고의 뮤지컬로 평가받는 <악마의 신부(新婦)>가 빙기스 공원 야외공연장에서 현대적으로 각색되어 공연되었다. <악마의 신부>는 리투아니아의 고대 민담을 근거로 1974년에 제작된 리투아니아 최대 흥행 영화이자 첫 영화 뮤지컬이다. 이 뮤지컬은 천사가 되었지만 호산나를 노래하는 것을 지겨워한다는 이유로 땅에서 살도록 명령을 받은 장난꾸러기 악마의 이야기를 다루었다. 악마는 풍차 방앗간의 딸과 사랑을 추구하는데, 이 과정에서 등장하는 유쾌하고 비극적인 장면 속에 리투아니아 시골풍경이 모두 담겨 있다. 공연장에 나온 관람객 2만여명은 30여년 전을 회상하며 뜨거운 박수갈채를 보냈다. 

사진/ 자라세이 시에 온 율리야·테레사 쌍둥이 자매(8살)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빌뉴스 옛 시가지의 넓은 세레이키쉬케이 공원과 게디미나스 성 주변에는 행사기간 중 하루종일 노랫소리와 춤이 끊이지 않았다. 국내외에서 온 리투아니아 민속앙상블 250개가 곳곳에 자리잡고 각 지방 민속노래와 춤을 공연했다. 이들 주위에서는 띠를 짜는 등 민속예술 장인들이 솜씨를 뽐냈다. 대부분 민속앙상블은 남녀노소로 이루어졌다. 전통의상을 입고 할아버지, 할머니와 아이들이 함께 노래하고 춤추는 모습에서 수세기의 리투아니아 문화가 주변 강대국의 억압 속에서도 고스란히 자손 대대로 전해 내려올 수 있었던 이유를 엿볼 수 있다. 고대부터 리투아니아인은 혼자 노래하는 것보다는 함께 노래 부르는 것을 더 좋아한다. 이들은 남들이 자신들의 노래를 들어주는 것보다는 자신들이 함께 노래 부르는 것에 더 주의를 기울인다. 

1579년 세워진 유서 깊은 빌뉴스대학교 정원도 캉클레스의 아름다운 선율과 관람객들의 뜨거운 시선으로 가득 찼다. 이날 70개 음악학교, 5개 음악고등학교, 2개 음악대학교의 교수와 학생들이 캉클레스 대연주를 했다. 캉클레스는 현악기로 리투아니아의 민속음악을 특징짓는 가장 큰 요소 중 하나다. 보리수, 단풍, 떡갈나무 등으로 만들며 0.1∼1mm 굵기의 철사가 현(鉉)을 이루고 있다. 현의 수는 다양하다. 작은 캉클레스의 장중한 합주 소리를 들으니 소수민족의 몸 속에 꿈틀거리는 민족에 대한 높은 자긍심을 헤아릴 수 있었다. 

노을이 아직 서쪽 하늘에 걸려 있는 여름밤, 4500명이 참가한 노래와 춤 공연은 참으로 인상적이었다. 캉클레스를 비롯한 민속악기 오케스트라의 반주에 맞춰 춘하추동을 주제로 다양한 춤들이 선보였다. 봄철에 타는 그네가 한국의 단오절을 연상케 해 가슴에 와 닿았다. 리투아니아 사람들은 봄철에 그네를 타면서 그해의 성공도를 예측한다. 즉, 자기가 구른 그네의 높이가 그해의 성공도를 말해준다. 여름철 숲 속의 요정들이 치는 나무 방망이 소리는 꼭 한국의 옛 어머니들이 두드리는 빨래 방망이 소리 같아 몹시 정겨웠다. 나막신을 신고 추는 춤도 압권이었다. 

인류의 문화유산으로 

이번 노래축제는 과거와는 달리 7일간이나 지속되었다. 마지막 날이 민다우가스가 왕으로 즉위한 지 750주년이 되는 기념일이라 의미가 더욱 컸다. 이날 주제도 ‘조국을 위한 왕관’으로 정했다. 이날 오후 많은 국내외 단체들이 마지막 행사인 대합창 축제에 참가하기 위해 대성당 광장에서 빙기스 공원까지 장관을 이루며 거리행진을 해 연도에 나온 많은 시민들과 관광객들에게서 갈채를 받았다. 이 합창에는 어린이 합창단 220개, 성인 합창단 200개, 오케스트라 71개 등 모두 1만8천명이 참가했다. 웅장한 소리가 늦은 저녁노을에 붉게 물들어갔다. 

노래축제를 통해 민족문화의 전통을 면면히 잇고자 하는 리투아니아인의 노래 사랑과 함께 민족애와 조국애를 느낄 수 있었다. 이제 노래축제는 리투아니아 민족 정체성의 최고 문화표현으로 자리잡고 있다. 노래축제의 중요성을 인식한 리투아니아·라트비아·에스토니아 등 발트 3국은 최근 유네스코에 이 노래축제를 ‘인류구전 및 무형유산 걸작’으로 선포해줄 것을 요청했다. 이렇게 되면 노래축제는 한층 높은 위상을 정립하고, 국내외로부터 더 많은 문화관광객을 유치하는 데도 기여할 것이다. 

* 이 기사는 한겨레21 제469호 2003년 7월 23일자로 이미 보도된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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佛 유명 연예인 커플 마리와 캉타, 리투아니아 호텔서 말다툼하다 참변

빌뉴스=글·사진 최대석 통신원/ chtaesok@hanmail.net

프랑스 여배우 마리 트랭티냥의 사고사는 리투아니아에 큰 충격을 주었다.  

리투아니아와 프랑스 사회 모두를 큰 충격 속에 몰아넣은 사건이 발생했다. 바로 프랑스 유명배우 마리 트랭티냥(41)이 리투아니아의 수도 빌뉴스 호텔방에서 연인인 가수 베르트랑 캉타(39)와 다투다 뇌를 다쳐 사망한 사건이다. 

마리 트랭티냥은 프랑스의 대표적인 영화인 가족 출신 배우다. 아버지는 1960년대 영화인 ‘남과 여’의 남자 주인공인 전설적인 배우 장 루이 트랭티냥이고 어머니는 영화감독인 나딘 트랭티냥이다. 마리 트랭티냥은 부모의 영향으로 어릴 때부터 배우로 활동하며 지금까지 55편의 영화에 출연했다. 국내 영화팬들도 영화 ‘뽀네트’의 여주인공이던 마리를 기억할 것이다. 

숨진 마리는 영화 ‘뽀네트’의 여주인공

마리의 연인인 베르트랑 캉타는 프랑스 록그룹 ‘검은 욕망’의 보컬리스트. 16살에 가수로 데뷔한 그는 2001년에 앨범 ‘얼굴들’로 100만 장의 판매고를 기록한 인기가수다. 캉타는 반(反)세계화 집회에서 공연하는 등 진보적 사회운동에도 적극 참여하고 있다. 

마리 역시 여성운동에 열심이었다. 영화에서 상처받은 여성이나 사회로부터 소외된 여성상을 감동적으로 연기했던 마리는 지난해 영화감독인 전남편과 이혼하고 캉타와 동거해왔다. 캉타는 리투아니아 현지 방송사와의 인터뷰에서 “음악보다 마리를 더 사랑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두 사람은 6월 초부터 리투아니아에서 체류해왔다. 프랑스 TV 방송사와 리투아니아 영화제작사가 합작·제작하는 프랑스 여류 소설가 가브리엘 시노니의 삶을 그린 2부작 텔레비전 영화 ‘콜레트’에서 마리가 주연을 맡았기 때문이다. ‘콜레트’(시노니의 필명)는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초까지 남성 지배적인 사회 속에서 여성들이 겪는 고뇌를 그린 영화로 마리의 어머니인 나딘 트랭티냥이 감독을 맡았다. 

사건의 전모를 특집으로 다룬 리투아니아 주간지 ‘엑스트라’.
  
7월 말까지 촬영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남은 촬영 장면은 콜레트가 결혼을 하고 남편이 그를 배신하는 마지막 장면뿐이다. 마리는 촬영 내내 어머니 나딘, 함께 출연하는 아들 로만, 그리고 연인 캉타와 함께 유서 깊은 빌뉴스의 구시가지에 있는 도미나 플라자 호텔에 묵었다. 

그런데 영화촬영 종료를 불과 3일 남긴 7월27일 아침 7시30분, 혼수상태에 빠진 마리가 빌뉴스대학 응급병원으로 이송되어 왔다. 심한 뇌출혈이었다. 의료진은 즉각 뇌수술에 들어갔다. 연인인 캉타 역시 과음과 신경안정제 과다복용으로 병원에서 치료를 받아야 하는 상태였다. 

경찰의 조사에 따르면 사고는 병원에 오기 서너 시간 전에 일어났다. 사고 전날 밤, 두 사람이 술을 마시면서 말다툼을 하던 중에 마리가 캉타에 밀려 넘어지면서 머리를 다친 것이다. 

27일 수술 후에도 마리는 깨어나지 못했고 프랑스에서 전문의가 급파되어 29일 두 번째 뇌수술이 이뤄졌다. 하지만 의료진은 소생 가능성이 없다는 판정을 내렸다. 마리의 부모는 딸이 고국인 프랑스에서 눈감을 수 있게 해주고 싶다고 말했다. 31일 특별기편으로 프랑스에 온 마리는 결국 8월1일 숨을 거두었다. 그는 6일 수천명의 애도 속에서 파리 페르라세즈 묘지에 묻혔다. 

한편 캉타는 현재 리투아니아에 억류되어 과실치사나 살인 혐의로 조사를 받고 있다. 리투아니아 형법에 따르면 과실치사는 최소 5년에서 최고 15년까지 형을 선고받는다. 그는 이 사건이 아주 불행한 우발적 사고이며, 자신은 마리를 폭행하지 않았다는 주장을 되풀이하고 있다. 프랑스 사회는 그가 프랑스 법에 따라 조사받고 처리되길 희망한 것으로 알려졌다. 

정확한 사고경위는 추후 양국 검찰의 정밀조사에 의해 밝혀지겠지만, 평소 진보적 사회활동에 앞장서 왔던 유명배우와 가수 사이에서 일어난 사고의 파장은 리투아니아와 프랑스 모두에서 쉬 가라앉지 않을 듯싶다. 

* 이 기사는 주간동아 2003 년 08월 21일(398 호)자로 이미 보도된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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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투아니아에선 최근 애견이 사람을 무는 사건 빈발해… 위험한 개의 소유 및 확산 금지 법안도 준비 

빌뉴스=글·사진 최대석/ 자유기고가 chtaesok@hanmail.net

최근 리투아니아는 개 때문에 골머리를 앓고 있다. 

개가 사람을 물어 큰 상처를 입히는 사건들이 꼬리를 물고 이어지자 애견이 골칫거리로 전락하고 있다. 가장 비극적인 사건은 지난 5월27일 리투아니아의 유일한 항구도시이자 3대 도시인 클라이페다에서 일어났다. 미국산 피트불 테리어가 9개월 된 여자 어린이를 물어 숨지게 한 것이다. 어린이의 부모는 돈을 벌기 위해 지난 3월부터 멀리 노르웨이에서 일을 하고 있었으며, 곧 집으로 돌아올 예정이었으나 비보를 접하게 돼 사람들의 마음을 더욱 아프게 했다. 더구나 어린이를 문 개는 부모가 애지중지하면서 태어날 때부터 6년 동안 기른 개였다. 


사진/ 애견을 데리고 산책 나온 리투아니아 아이들. 최근 개에 물려 9개월 된 여자아이가 숨지는 사건이 발생했다.

9개월 된 여자 어린이 숨져 

사고 당일의 모습은 이랬다. 그날 아침 할머니는 평상시와 마찬가지로 손녀를 무릎에 앉히고 밥을 먹이고 있었다. 주위에는 개가 거닐고 있었다. 손녀는 무심코 빵 조각을 바닥에 떨어뜨렸다. 빵조각을 줍기 위해 허리를 굽히는 순간, 옆에 있던 개가 아이의 목덜미와 머리 뒷부분을 물었다. 할머니가 고함치며 개를 손녀로부터 떼려고 애썼으나 소용이 없었다. 개는 꽉 문 입을 열지 않았다. 부엌문으로 개를 세게 짓누르자 그때서야 손녀를 놓아주었다. 할머니의 애타는 도움 요청에 이웃 주민들이 몰려왔고, 구급차도 도착했다. 하지만 손녀는 이미 거친 숨을 멈춘 뒤였다. 

‘누아라스’ 동물보호센터 직원들도 급히 출동해 개에게 수면제 주사를 놓았다. 마취에서 깨어난 뒤 개의 이상증세를 발견할 요량으로 개 보호소에 데려갔다. 하지만 어쩐 일인지 개는 깨어나지 못했고 다음날 죽은 채 발견되었다. 당사자는 물론 이웃사람들도 이 믿을 수 없는 사건에 큰 충격을 받았다. 그동안 사고를 낸 개는 사람들과 다정하게 지냈고 어린이들도 잘 돌봐왔기 때문이다. 어린이가 울 때는 가까이 달려와 옆에 쪼그리고 앉아 위로해주기도 했다. 개를 잘 알고 있던 한 이웃사람은 이 기이한 현상을 축적된 우울증과 시기심이 한순간에 폭발한 때문으로 분석했다. 1년 전 자신을 몹시 아껴주던 할아버지가 사망하자 우울해졌고, 이어 할머니가 손녀에게 더 관심을 보이자 시기심이 일어났을 것이라는 설명이다. 

리투아니아에서 피트불 테리어가 사람을 공격해 상처를 입힌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2년 전 9살짜리 어린이의 다리를 물어 중상을 입힌 적도 있다. 4년 전에는 학교로 가던 10살 어린이를 물어 머리·얼굴·사지 등에 중상을 입혔다. 이 개는 곧이어 18살 아가씨와 그를 구하고자 달려든 아버지를 물었다. 나중에는 자신의 주인까지 물어 결국 동물병원에 실려갔다. 이처럼 최근 개가 사람을 무는 사건들이 하루가 멀다 하고 발생하자 개 공포심이 리투아니아 전역을 감싸고 있다. 빌뉴스에서는 5살 어린이가 옆집 개에게 심하게 물려 다리뼈가 부러지고 온몸에 상처를 입었다. 얼마 뒤 파네베지스에서는 같은 5살 어린이가 언니 친구집에 놀러갔다가 개에게 공격당해 코와 윗입술이 심하게 뜯겼다. 긴급 출동한 의료인들이 뜯겨나간 부분을 찾았으나 허탕을 쳤다. 알고 보니 개가 모든 것을 삼켜버렸던 것이다. 그 개는 그날 저녁 집주인에게 사살당했다. 

개 호텔은 문전성시 

사진/ 리투아니아에서는 재갈이 물려지지 않은 개가 거리를 활보하는 모습을 흔히 볼 수 있다.

플룽게에서는 한 남자 어린이가 개의 공격을 받아 거의 죽다시피했다. 카우나스에서는 아주 온순한 개가 주인의 78살 어머니 손을 물어 심한 상처를 입혔다. 그는 평소 개에게 자주 밥을 주었고, 개도 그를 잘 따랐다. 사고 당일 개에게 고기 뼈다귀를 주기 위해 가까이 가는 순간, 바람이 세게 불어 뼈다귀가 담긴 봉지가 땅에 떨어졌다. 이것을 주우려는 찰나 개가 손을 문 것이다. 

이처럼 평소 친근한 애견이 갑자기 공격적으로 변하는 사건이 빈번히 발생하자 리투아니아 사람들이 개에 대해 경계심을 넘어 공포심마저 느끼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현상일 것이다. 특히 다소 사나운 개를 기르는 사람들은 자신의 개가 언제, 어디서, 어떤 사고를 칠지 몰라 안절부절못하고 있다. 따라서 일부 개주인들은 자신의 애견을 집에서 기르는 것을 포기하고 있다. 

사정이 이렇게 되자 클라이페다에 위치한 개 호텔인 ‘누아라스’에는 개를 맡기러 온 사람들이 평소보다 다섯배나 늘어 연일 문전성시를 이루고 있다. 대부분의 개주인들은 그동안 온갖 정성을 쏟아 길러온 개들을 맡기면서 눈물을 흘리며 생이별을 하고 있다고 ‘누아라스’ 관계자는 전했다. 그는 사람들이 실제 이상의 과장된 두려움을 갖고 있는 것 같다고 덧붙였다. 전문가들에 따르면 비극적인 사건은 흔히 개보다는 주인의 잘못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많고, 개의 행동은 대개 주인의 행동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리투아니아는 2001년 5월 위험한 개의 소유·이동·판매·조련·사육 등에 관한 법을 새로 도입했다. 이 법에 따르면 개 소유자는 관할 관청에 등록해야 하고, 내무부에서 마련하는 교육강좌를 이수해야 하며, 개 등록증과 예방주사 확인증을 항상 소지해야 한다. 특히 위험한 개를 집에서 기르려면 별도 허가를 받아야 한다. 당연히 등록되지 않은 위험한 개의 소유는 법으로 금지되어 있다. 

사진/ “오랫동안 우리 도시를 더럽히는 것을 그냥 내버려둘 것인가?”라는 문구가 적힌 광고판이 도심 개 배설물의 심각성을 말해준다.

문제는 가령 클라이페다에는 약 3천 마리의 애견이 있는 것으로 추정되지만, 실제로 등록되어 관찰을 받는 개는 681마리에 지나지 않다는 점이다. 따라서 거리에 주인과 함께 산책하는 개라도 광견병 유무를 알기는 쉽지 않다. 게다가 개 관리 비용도 만만치 않다. 개 등록비가 10리타스(약 4천원)이고, 달마다 맞혀야 하는 예방주사비가 5리타스(약 2천원)다. 이 비용을 아끼기 위해 개주인들은 등록을 기피하는 경향이 있다. 이런 탓에 클라이페다에서는 평균적으로 연 300여명이 개에 물려 병원치료를 받는다. 

도심은 개 배설물 천지 

일반적으로 개 소유자는 벌금만 물고 극소수 피해자만 법원에 소송을 제기하고 있다. 국회의원인 알로이자스 사칼라스는 현재 법안 수정을 준비하고 있다. 그는 리투아니아에 위험한 개의 소유 및 확산을 전적으로 금지하고자 한다. 많은 사람들은 재갈을 물리지 않고 맹견을 산책시키는 주인에게 중한 벌금을 부과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견해를 내놓고 있다. 이들은 이렇게 엄격하게 법을 집행해야 개 공격의 공포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고 믿는다. 개 등록비를 독일처럼 개의 위험성 정도에 따라 차등으로 물리는 방안도 거론되고 있다. 

다른 한편 개 배설물 처리도 골칫거리다. 위험한 개를 관리하는 문제와 더불어 개 배설물 처리 문제도 점차 심각하게 대두되고 있다. 녹지대가 많은 도심에 개주인들이 개똥을 그대로 방치해놓아 도시 미관을 해칠 뿐 아니라 보는 사람들에게 심한 불쾌감을 주고 있다. 따라서 프랑스의 파리처럼 개 화장실을 따로 두든지, 체코 프라하처럼 개똥 전용 쓰레기통을 설치하지는 못할지라도 개주인들이 책임지고 배설물을 수거하도록 강제하는 법을 수립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 이 기사는 한겨레21 제469호 2003년 7월 23일자로 이미 보도된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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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마귀고기 먹기 운동’벌이는 리투아니아 사람들… 축제 열어 지역경제에 활력 불어넣기도 

빌뉴스=글·사진 최대석/ 자유기고가 chtaesok@hanmail.net

우리나라 속담에 무엇인가를 잘 잊어버리는 사람을 가리켜 “까마귀고기를 먹었나”라는 말이 있다. 정말 까마귀고기를 먹으면 잘 잊어버릴까. 이 속담대로라면 건망증에서 벗어나려는 사람이나 잊으려고 애쓰는 사람 모두에게 까마귀고기가 특효약인 셈이다. 이를 위해서든 아니든 주위에 까마귀고기를 먹는 사람들을 찾아볼 수는 없다. 그러니 이는 “까맣게 잊었다”는 말을 까마귀의 까만색에 빗대어 나온 속담일 것이다. 

민족 서사시에 까마귀 먹었다는 기록도 

사진/ 까마귀 요리법은 수백 가지에 이른다. 가장 쉽고 맛있는 요리법은 끓여서 당근과 함께 오래 달이는 것이다.


리투아니아에서도 까마귀고기를 먹는다는 말은 지금까지 전혀 듣지 못했다. 더욱이 리투아니아 사람들도 까마귀고기 먹는 것을 비정상적으로 생각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하지만 최근 일부 사람들이 까마귀고기를 즐겨 먹는다는 사실이 언론에 알려져 큰 화젯거리가 되고 있다. 더군다나 몇 세대 전까지만 해도 리투아니아 사람들은 까마귀고기를 전통적으로 먹어왔다는 사실이 문헌을 통해 밝혀졌다. 

옛 음식풍습인 ‘까마귀고기 먹기 운동’을 주창하고 있는 사람은 바로 전직 검사출신인 안드류스 구진스카스(45)다. 그는 13년 전 우연히 늙은 사냥꾼으로부터 까마귀를 사냥해 까마귀고기 요리를 장만하는 법을 배웠다. 까마귀고기를 시식해보니 너무 맛이 좋아 이후 계속 먹어오면서 주위 사람들에게도 권했다. 처음에는 “같이 까마귀고기를 먹었다는 말을 다른 사람, 특히 아내에게 하지 말라”고 부탁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차차 까마귀고기에 대한 주위의 편견이 사라졌고, 이것을 즐기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동호회도 결성되었다. 

18세기 후반에 쓰여진 크리스티요나스 도넬라이티스의 리투아니아 민족 서사시 <메타이>(사계)에 왕이 농노에게 까마귀 사냥을 명했다는 구절이 나온다. 역사학자에 의하면 1721년 프리드리히 왕은 농작물 피해를 막기 위해 농노들에게 까마귀 12마리, 참새 12마리를 의무적으로 사냥할 것을 명했다. 귀족들은 이보다 더 많은 양을 사냥해야 했다. 리투아니아 사람들은 사냥한 것을 그냥 버리기 아까워서 맛을 보다가 먹게 되었다. 

이는 과거 리투아니아의 성탄절 전야 전통음식 중 하나가 참새고기 갤런틴(고기의 뼈를 뽑고 향미를 넣어 삶아 국물과 같이 응결시킨 찬 음식)이었고, 봄철 방목시기에 주로 먹은 음식이 까마귀고기였던 것과 무관하지 않다. 겨울철엔 참새 잡기가 쉽고, 봄철엔 까마귀 잡기가 쉽기 때문이다. 옛 소련은 봉건시대에 리투아니아 사람들이 곤궁해서 까마귀를 먹었다는 식으로 부정적으로 가르쳤다. 물론 잦은 전쟁과 질병 등으로 가난이 닥쳤을 때 까마귀고기를 먹었겠지만, 이는 <메타이>에 나오는 “시골 곡간에는 돼지고기와 닭고기 등이 넘쳐났다”라는 기술과 배치된다. 

어쨌든 현대의 리투아니아 사람들은 까마귀고기 먹는 것을 별미로 바라보는 것보다 우선 역겨워하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까마귀고기 먹기 동호회의 노력으로 이제 이러한 시각이 점점 사라지고 주민들은 조상들이 즐겨 먹던 음식을 하나둘씩 맛보기 시작한다. 구진스카스는 야심찬 계획을 세우고 한 단계 한 단계 실행해가고 있다. 일단 그는 까마귀에 얽힌 농담, 민담, 사냥 및 요리법 등에 관해 곧 책을 펴낼 준비를 하고 있다. 

요리 먹으면 여권과 비자 준다 

사진/ 파크뤄위스군 까마귀 축제 참가자들이 ‘HAV(해학·맥주·까마귀) 공화국’ 여권까지 발급받아 공개적으로 ‘까마귀고기 먹기 운동’에 동참하고 있다.

까마귀 사냥철은 보통 5월 하순이나 6월 초순이다. 이때가 초봄에 부화된 어린 까마귀들이 둥지에서 나와 나뭇가지에 앉아 비행을 막 배우는 시기다. 구진스카스에 의하면 까마귀는 세상에서 가장 영리한 다섯 생물 중 하나로 다 자라면 잡기가 아주 어렵다. 미리 감지하고 하늘 높이 날아가버리기 때문이다. 바람이 아주 세게 분 뒤 숲 속에 가면 나무 위에서 떨어져 날지 못하는 어린 까마귀를 솔방울 줍듯 주워올 때도 있다. 총을 쏴서 잡기도 하고, 나무를 흔들어 떨어지는 까마귀를 잡기도 한다. 발트해 연안에 있는 큐르슈 지방에서는 그물로 잡기도 한다. 

구진스카스는 까마귀가 농사에 피해를 준다는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이라도 하듯 잡은 까마귀 위 속에 있는 곡식알을 “하나둘” 세기 시작했다. 하지만 너무 많아 더 이상 셀 수 없었다. “곡식 한알이 빵 하나다”라고 말하면서 그는 농민들이 자신에게 감사의 표시뿐 아니라 총알이라도 지급해야 마땅하다고 덧붙였다. 한편 도시의 쓰레기더미 위에서 먹이를 찾고 있는 까마귀가 연상돼 까마귀고기가 인체에 해로울 것이라고 믿는 사람들에게 그는 어린 까마귀의 위 속 내용물을 보여주는 것으로 자신의 확신을 대신한다. 

까마귀 가죽을 깃털과 함께 그대로 벗겨내는 데는 불과 몇분밖에 안 걸려서 닭요리를 장만하는 것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쉽다. 내장을 드러내고 찬물에 식초와 함께 담가놓는다. 구진스카스는 까마귀 요리법을 수백 가지나 알고 있다. 가장 쉽고 맛있는 요리법은 끓여서 당근과 함께 오래 달이는 것이다. 기름에 튀겨도 된다. 그는 “까마귀고기는 맥주 안주로 최고다!”라고 힘주어 말한다. 

올해부터 구진스카스는 ‘까마귀고기 먹기 운동’을 공개적으로 전개하기 시작했다. 그의 제안을 받아들인 리투아니아 중부 북쪽에 위치한 파크뤄위스군과 손잡고 지난 6월7~8일에 까마귀 축제를 열었다. 이 축제에 공무원, 유명인사, 언론종사자, 유지 등 300여명을 초청해 까마귀고기 시식회를 열었다. 특히 ‘바르나스’(까마귀라는 뜻)라는 성을 지닌 사람들도 초청되었다. 이 이색적인 모임을 취재하기 위해 행사장은 국내외의 많은 취재진들로 붐볐다. 

파크뤄위스군은 농업이 주된 사업이었으나 경쟁력을 점점 잃어가자 지역경제에 활력을 불어넣을 방안으로 이 사업을 지원하고 있다. 더군다나 이 지역은 리투아니아에서도 해학(Humoras)과 맥주(Alus)로 유명하다. 여기에 까마귀(Varnas)를 덧붙여 매년 여름 ‘HAV공화국’을 선포하고 국내외 관광객을 유치할 계획이다. 요나스 워자파이티스(58) 파크뤄위스 군수는 “이제 농업에는 기대하기 힘드니, 까마귀 축제를 우리 군의 유명 관광상품으로 개발해 지역경기를 살리고자 한다”고 자신의 구상을 피력했다. 

“어린 까마귀는 최고의 맛” 

사진/ ‘까마귀고기 먹기 운동’ 주창자인 안드류스 구진스카스가 축제를 위해 까마귀를 사냥하고 있다. 

참석자 대부분은 처음 먹어보는 까마귀고기를 닭고기·토끼고기·오리고기 등과 비교하면서 맛이 아주 좋다고 평했다. ‘까마귀’라는 성을 가진 부부는 “처음 까마귀고기를 먹는 것에 겁나지 않느냐”라는 질문에 “전혀. 우린 26년간 매일 서로 맛을 보고 있기 때문에 이미 까마귀고기가 맛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라고 답해 이 지역 사람들의 해학스러움을 쉽게 느낄 수 있었다. 비타우타스 유르가이티스(45·수의사)는 “한마디로 우리 선조들이 먹었던 까마귀고기는 완벽한 음식이다. 까마귀에 대해 나쁘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우선 정신과의사를 방문해야 할 것이다. 맛은 요리를 어떻게 하느냐에 달렸지만 어린 까마귀고기는 최고다”라고 극찬했다. 

이날 까마귀고기를 먹은 사람들은 HAV공화국 여권을 발급받았고, 먹었음을 증명하는 비자도 받았다. 이제 이들은 더 이상 까마귀고기를 먹는 것이 수치스러운 일이 아니라 조상들이 먹었던 음식을 먹는 떳떳한 일로 생각하게 되었다. 까마귀고기 먹기를 주창하는 구진스카스는 “까마귀고기를 먹는 것에만 그치지 말자. 까마귀는 서로 상대방의 눈을 쪼지 않는 신사의 새다. 우리도 서로 도우면서 화목하게 살아가자”라고 강조한다. 

물론 까마귀 관광상품의 성공 여부에도 큰 관심이 있지만, 이 옛 음식 풍습이 되살아나 머지않은 장래에 까마귀고기가 스스럼없이 리투아니아 사람들의 식탁에 오를 날이 올까 사뭇 궁금해진다. 

* 이 기사는 한겨레21 제466호 2003년 7월 2일자로 이미 보도된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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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뉴스/최대석[자유기고가] chtaesok@hanmail.net
 
나폴레옹 군대와 러시아 군대가 맹렬한 포격전을 벌였다. 이어진 격렬한 백병전. 백마를 타고 질풍같이 내달리며 전투를 지휘하는 사람은 영락없는 나폴레옹의 모습이었다. 리투아니아 빌뉴스 중심가를 흐르는 네리스강의 넓고 푸른 강변에는 200년 전 나폴레옹 군대의 함성이 다시 울려퍼졌다. "나폴레옹 만세! 프랑스 만세!" 

지난 5월 31일과 6월 1일 빌뉴스에서 각각 열린 나폴레옹 군대 전투 재현과 당시 군인들의 유골 매장식 장면이다. 2001년 11월 빌뉴스 아파트 건축 현장에서 나폴레옹 군대의 유골 약 3,000구가 발굴되면서 일기 시작한 나폴레옹 추모 열기가 이날 절정을 이뤘다. 유럽 각국에서 온 취재진으로 성황을 이뤘고, 이를 계기로 전유럽 통합을 꿈꿨던 나폴레옹에 대한 유럽인의 관심이 새삼 고조되고 있는 것이다. 



추모식 행사 각국서 취재진 몰려 
빌뉴스에는 나치 독일 점령 시대나 소련 치하에서 희생된 자들의 유골이 대거 묻혀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아파트 건축 현장에는 유골과 함께 나폴레옹 얼굴이 찍힌 단추와 주화, 군화 및 군복 조각, 결혼반지, 십자가 등이 함께 발견됨에 따라 이들 유골은 1812년 러시아 침공에 참가한 나폴레옹 군대 군인의 유골로 확인되었다. 

역사학자들은 이 집단 매장지는 최대 규모라고 평하고, 빌뉴스 반경 100㎞에 약 8만 명의 나폴레옹 군대의 군인이 묻혀 있을 것으로 추정한다. 집단 매장지 발굴은 그동안 밝혀지지 않았던 나폴레옹의 러시아 원정 의혹을 풀어주었다. 특히 외부 손상이 없고 잔뜩 웅크린 유골이 많이 발견되면서 혹독한 추위가 원정 실패의 요인이라던 당시 나폴레옹의 주장을 입증해주었다. 

발굴된 유골은 리투아니아의 국가 지도자-독립 영웅-유명인 등이 묻혀 있는 국립묘지 격인 안타칼나스 묘지에 매장됐다. 6월 1일 열린 제막식에는 리투아니아 국가 지도자와 각국 대사와 일반 시민이 대거 참여했다. 프랑스의 나폴레옹 추모단체에서도 50명이 참석했다. 

사각형 묘 주변에는 흰 대리석을 깔고 나폴레옹 군대와 함께 러시아 원정에 참가한 11개국을 의미하는 사각기둥을 세웠다. 리투아니아 국회의장 아르투라스 파울라우스카스는 추모사에서 "우리나라 민요에는 '프랑스인들이 이 땅에 와서 우리를 구해주었네'라는 가사가 있고, 여러 노래에 파리와 몽마르가 등장한다"며 프랑스인에 대한 리투니아인의 오랜 호감을 표현했다. 주 리투아니아 프랑스대사 장 베르나르드 하트는 "다민족으로 구성된 나폴레옹 군대의 군인이 이제 이곳에서 편히 쉴 수 있게 해준 리투아니아 정부에 감사한다"고 말했다. 리투아니아 전 국회의장 비타우타스 란드스베르기스는 "유럽을 재편 통일시키고, 예속된 민족을 해방시키고, 그들에게 통일된 나폴레옹 법전을 주고자 한 나폴레옹의 포부는 역사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고 자신의 견해를 밝혔다. 

유골 매장식 일환으로 거행된 1812년 전투 장면 재현에는 당시 나폴레옹 군대와 러시아 군대가 입었던 군복과 사용했던 무기들로 무장한 400명이 참가했다. 나폴레옹 역할은 러시아 군역사협회장이자 상트페테르부르그 대학교와 파리 소르본 대학교 교수인 올레그 소콜로프가 맡았다. 이 재현 행사에는 리투아니아-폴란드-라트비아-백러시아-우크라이나-러시아에서 온 역사학자 등이 대거 참가했다. 



민요에도 나올 만큼 프랑스에 호감 
어린이와 여성도 등장해 관람객의 눈길을 끌었다. 실제로 나폴레옹 군대에는 여성도 있었다. 모스크바에서 온 타트야나는 "여성은 군인에게 포도주를 주는 일, 사망한 군인의 귀중품을 걷는 일, 부상한 군인을 돌보는 일 등을 했다"며 "러시아에는 역사 재현을 취미로 하는 사람이 아주 많다"고 말했다. 

이들은 6월 1일 유골 매장식을 끝난 후 나폴레옹 군대의 빌뉴스 입성식과 환영식도 재현했다. 빌뉴스에 입성한 후 시청 광장에서 빌뉴스 시장으로부터 상징적인 열쇠를 건네받는 나폴레옹은 "나폴레옹 만세! 프랑스 만세!"를 외쳤다.  

1812년 6월 말에서 12월 말까지 비록 짧은 기간이지만 리투아니아 사람은 이 시대를 프랑스 시대로 부른다. 비록 실현되는 않았지만 리투아니아인에게 이 짧은 시기는 나폴레옹의 도움으로 잃어버린 국가를 재건하고자 하는 희망의 시대로 기술된다. 지난 5월 10~11일 실시된 국민투표에서 유럽연합 가입을 전폭적으로 지지한 리투아니아인에게 나폴레옹이 시도한 유럽통합은 이날 더 큰 의미를 심어주었다. 

러시아 원정군 임시수도 
동유럽의 넓은 영토를 차지하고 있던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국가는 1795년 프러시아-오스트리아-러시아로 각각 분할되어 역사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두 민족은 나폴레옹의 도움으로 국가 재건을 시도했다. 1806년 나폴레옹은 프러시아 원정에 이겨 1807년 바르샤바공국을 세웠다. 1809년 오스트리아를 정복한 나폴레옹은 프랑스를 도운 바르샤바공국의 영토를 더욱 넓혔다. 이로 인해 그 지역에 영향력을 행사하던 러시아와 관계가 악화되었고, 마침내 유럽 대부분을 점령한 나폴레옹은 러시아 원정에 나섰다. 

1812년 6월 24일 나폴레옹은 50만 명의 대군을 직접 이끌고 국경선인 리투아니아 카우나스 네무나스강을 건넜다. 빌뉴스에 도착한 나폴레옹은 7월 1일 리투아니아대공국을 수립했다. 리투아니아인은 나폴레옹 군대를 해방군으로 극진히 맞았고 군대를 조직해 나폴레옹의 모스크바 진격을 지원했다. 나폴레옹은 이 원정 중 빌뉴스를 임시 수도로 선정했고, 이곳에 프랑스 국무장관을 상주시켰다. 나폴레옹 군대는 행진해 계속해 9월 14일 모스크바에 도달했다. 

러시아 군대는 주로 전략전인 후퇴 및 방어작전을 펴면서 측면 공격으로 맞섰다. 또 미리 마을과 도시에 불을 지르고 땅을 황폐화시켜 나폴레옹의 주된 원정 전략인 현지 보급을 불가능하게 했다. 모스크바에 도착한 나폴레옹 군대는 황폐한 도시에서 피곤-배고픔-화재-다가오는 추위 등으로 많은 고통을 겪었다. 5주 동안 모스크바에 머물면서 평화협정 체결을 고대한 나폴레옹은 성과가 없자 퇴각을 명령했다. 

러시아 군대는 지쳐 퇴각하는 나폴레옹 군대를 후방과 측면 공격해 엄청난 손실을 입혔다. 50만 명으로 출발한 군대가 12월 빌뉴스로 돌아왔을 때는 5만 명밖에 되지 않았다. 이들은 영하 30도의 추위-부상-질병-배고픔으로 등으로 수없이 죽어갔다. 이 원정에서 살아남은 자는 1만 명에 불과했다. 

이때 죽은 군인의 유골에 대해서는 뚜렷한 증거가 없었다. 기록에 의하면 러시아 군대가 나폴레옹 군대를 뒤쫓아 빌뉴스에 들어왔을 때 곳곳에 널려 있는 시체 처리가 가장 큰 골칫거리였다. 언 땅을 팔 남자가 부족했다. 처음에는 시체를 태웠지만 악취와 연기를 견딜 수가 없어 이를 중지했다. 

* 이 기사는 뉴스메이커 제530호 2003년 6월 27일자로 이미 보도된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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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유럽 국가들, 유럽연합 가입 묻는 찬반투표 실시… 리투아니아의 진땀 나는 투표 독려 작전 

지난 4월16일 그리스 아테네에서 유럽연합(EU) 회원국 정상들이 모여 동구권과 지중해 주변 10개국의 신규가입을 정식으로 승인했고, 관련국가 수반들은 이 가입조약에 서명했다. 서명은 해당 국가 국민으로부터 동의를 받아야 유효하게 된다. 2004년 5월1일 가입할 예정인 10개국은 헝가리, 폴란드, 체코, 슬로바키아, 슬로베니아,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몰타, 키프로스다. 

과반수 안 되면 무효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경제적 재건과 군사적 위협해소 등을 위해 1952년 6개국(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벨기에, 네덜란드, 룩셈부르크)이 오늘날 유럽연합의 기초인 유럽석탄철강공동체를 정식으로 발족했다. 1957년 로마조약 체결로 유럽경제공동체와 유럽원자력공동체가 설립되었다. 1973년 영국, 덴마크, 아일랜드가 유럽경제공동체에 가입해 회원국은 9개국으로 확대되었다. 1981년 그리스, 1986년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가입하여 회원국은 12개국으로, 1995년 오스트리아, 핀란드, 스웨덴이 가입하여 다시 15개국으로 확대되었다. 

요즈음 동구권은 정식 가입을 위한 마지막 단계인 자국민의 동의를 얻기 위한 국민투표가 나라마다 연이어 이루어지고 있다. 후보국 중 가장 먼저 국민투표를 실시한 국가는 지중해에 있는 몰타였다. 지난 3월8일 투표참여율이 92.5%로 지극히 높았지만 53.5%으로 가까스로 유럽연합 가입에 찬성했다. 3월23일 슬로바키아는 60% 투표참여율에 89.61%가 대대적으로 지지했다. 이어 4월12일 헝가리는 46.5%의 저조한 투표참여율이었지만 83.76%가 찬성했다. 

과반수 미만의 헝가리의 투표참여율은 국민투표를 앞둔 리투아니아에 커다란 경각심을 불러일으켰다. 리투아니아 헌법에 의하면 과반수가 참여하지 않으면 국민투표가 자동으로 무효가 되기 때문이다. 리투아니아 정부기관과 정당, 비정부단체 등 유럽연합 지지자들은 대대적인 홍보운동을 전개했다. 특히 중고등학생들도 “부모님, 저를 위해 투표하세요”라며 학교마다 홍보행사를 개최했고, 거리행진을 하기도 했다. 

5월8일 빌뉴스 대성당 광장에는 유럽연합 가입을 지지하는 가수들의 무료 야외 노래공연이 열렸다. 유명가수 안드류스 마몬토바스는 “리투아니아를 유럽연합에 가입시키는 것이 아니라 유럽연합을 리투아니아에 가입시키자”라고 말해 관람객으로부터 큰 박수를 받았다. 한 관람 시민 마르티나 암브로자이테는 “지리적으로 유럽의 중앙에 위치한 리투아니아는 반드시 유럽연합의 회원국이 되어야 한다”며 가입을 확신했다. 

국민투표 전 실시한 여론조사에서는 66.3%가 가입을 지지하고, 13.3%만 반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따라서 투표율만 50%가 넘으면 리투아니아의 가입은 당연시되었다. 투표참가율을 높이기 위해 리투아니아 정부는 이례적인 조처를 취했다. 투표일을 5월10∼11일 이틀로 정했고, 투표시간을 아침 6시에서 저녁 10까지로 늘렸다. 투표에 참여한 사람에게는 ‘아쉬 발사바우’(나는 투표했다)라고 쓰인 스티커를 가슴에 달아주었다. 또한 전국으로 방송되는 텔레비전 방송화면 밑에 실시간으로 제공되는 투표참여율을 표시하게 했다. 

투표하면 음료수·초콜릿 드려요 

유례없는 홍보운동을 편 뒤 5월10일 첫째 투표일의 결과는 리투아니아 전국을 침통하게 했고, 사람들은 좌절감에 빠졌다. 5월8일 노래공연장에 역대 대통령이 모두 나와 투표참여를 촉구할 때 롤란다스 팍사스 대통령의 등장에 휘파람을 불며 냉대하던 모습이 필자에게 떠올랐다. 투표결과 23.02%가 투표에 참여했다. 이는 아주 비관적이었고, 다음날에도 이런 식으로 간다면 이번 국민투표는 무산될 것이라는 우려가 팽배해졌다. 

사태가 예상외로 심각하게 전개되자, 5월10일 밤 팍사스 대통령은 특별담화를 발표했다. 그는 텔레비전에 나와 “무관심을 버리고 투표하러 오기를 충심으로 부탁한다. 자신과 리투아니아의 미래를 위해 투표하러 오라. 1990년 우리가 최초로 소련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했을 때처럼 지금 이웃 나라인 라트비아, 에스토니아 그리고 기타 국가들이 우리를 주목하고 있다. 정부가 가입조약에 서명했지만 최후결정은 바로 여러분 손에 달렸다”고 절박하게 호소했다. 

첫쨋날 저조한 투표참여율에 충격을 받은 리투아니아 대형 유통업체인 빌냐우스 프레키보스 마르케트는 기발한 투표참여 유인책을 마련했다. 전국에 산재한 직영매장인 미니마, 메디아, 막시마, 트마르케트에서 투표에 참여한 사람이 다른 물건과 함께 리투아니아 맥주 500cc 한병, 1.5ℓ 음료수 한병, 세탁세제 한 봉지 혹은 리투아니아 생산 초콜릿 한개를 살 경우 가격에 관계없이 이를 1젠타스(한화 약 4원)에 팔기로 했다. 이 유인책으로 둘째 투표일인 5월11일 각 매장은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텔레비전 화면 자막으로 내보낸 실시간 투표참여율 소식도 유럽연합 지지자들이 마지막 순간까지 노력을 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둘쨋날 오전에도 여전히 투표율이 저조하자 텔레비전을 시청하던 올가 체스나우스키에네는 다급하게 전화기를 잡고 아직 투표하지 않은 일가친척, 친구들에게 “미래를 위해” 투표하라고 호소했다. 이날 오후쯤 투표참여율이 거의 50%에 다가서자 사람들의 얼굴에 희망의 빛이 보이기 시작했다. 

첫쨋날 투표참여 저조로 무산위기에서 벗어나 밝은 표정으로 제노나스 바이가우스카스 선거관리위원장이 이날 저녁 초반 개표결과 압도적으로 가입을 찬성한 것으로 나타났다고 밝혔다. 공식 국민투표 결과는 총 63.3%가 참여해 91.04%가 찬성을 했다. 이 압도적 지지에 팍사스 대통령은 “리투아니아 국민이 시민사회의 시험을 통과한 것을 기쁘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리투아니아 지도자뿐만 아니라 국민도 찬성에 몰표가 나온 것에 몹시 놀라워했다. 

근래 리투아니아인들의 정치 무관심이 점점 높아지자 일부 정치인들은 이번 국민투표가 과반수에 미달되어 무산될 것이라고 공공연히 밝혔다. 그 대표적인 사람이 90년대 초 국무총리로 역임했고 현재 한국 리투아니아 명예영사로도 활동하고 있는 알렉산드라스 아비샬라다. 수염을 기르는 그는 텔레비전 토론 프로그램에 참석해 동석한 국회의원에게 국민투표 통과 여부를 놓고 애지중지한 수염깎기 내기를 했다. 국민투표가 유효하게 되자 그는 자신의 예측이 잘못되었음을 받아들였고, 비록 장난스러운 약속이지만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 공개적으로 면도를 했다. 

내기에 진 뒤 수염 깎은 정치인 

소련에서 분리 독립한 리투아니아의 이번 국민투표 통과는 비슷한 운명의 길을 걸어온 이웃나라 라트비아와 에스토니아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칠 것으로 전망된다. 또한 후보국 중 최대 인구국으로 리투아니아처럼 저조한 투표율을 우려하고 있는 폴란드에도 긍정적인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앞으로 국민투표 예정일은 폴란드 6월7∼8일, 체코 6월13∼14일, 에스토니아 9월14일, 라트비아 9월20일 등이다. 키프로스는 아직 국민투표 계획을 세워놓지 않고 있다. 

이들 10개국 모두 국민투표를 통과하면 2004년 유럽연합은 25개 회원국으로 역사상 가장 넓은 확대를 이루게 된다. 지중해와 과거 철의 장막에 속한 옛 공산권 국가들이 대거 가입함으로써 유럽연합은 동서간 화합과 안정 속에 공동번영을 꾀하게 된다. 새로운 시장개척, 고용창출, 자유로운 인력이동 등으로 경제성장이 기대된다. 다른 한편 약소민족 문화와 언어의 사멸위기가 어느 때보다 높아지고, 민족주권 붕괴에 대한 우려가 더욱 커질 것이다. 어쨌든 확대된 유럽연합이 세계 인류의 평화와 발전에 더 크게 기여하기를 기대해본다. 

* 사진(상): 이번 국민투표에는 많은 부모들이 아이들과 함께 투표장에 왔다. 그들은 자신을 위해서라기보다는 “아이들의 미래를 위해서” 찬성표를 던졌다.
* 사진(중): 리투아니아 선거관리위원회는 투표한 사람에게 ‘AS BALSAVAU’(나는 투표했다)라는 스티커를 가슴에 붙여주었다. 이 스티커는 투표한 사람에게 자긍심을 심어주었다.
* 사진(하): 5월12일 오전 11시 투표참가율 35.38%를 알리는 텔레비전 뉴스. 밑에 있는 큰 자막은 ‘50%가 되기 위해서는 아직 14.62%가 부족하다’는 의미다.


빌뉴스(리투아니아)=글·사진 최대석 | 자유기고가 

* 이 기사는 한겨레21 제460호 2003년 5월 29일자로 이미 보도된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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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투아니아에서 세계 최초로 열린 ‘미스 여죄수’ 선발대회… 수상자들 “출옥하면 연예인 되겠다” 

지난 11월14일 발트해 3국 중 하나인 리투아니아에 특이한 행사가 열렸다. 행사 장소는 수도 빌뉴스에서 북서쪽으로 150km 떨어진 파네베지스시 중심가에 위치한 교도소였다. 이 교도소는 리투아니아의 유일한 여성 전용 교도소다. 영국의 독일의 , 폴란드의 한국의 한국방송, 문화방송 프랑스의 등 60개 언론·방송사가 취재하는 등 이 행사는 리투아니아 국내외로부터 비상한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세계 최초로 열린 교도소 ‘미스 여죄수’ 선발대회였다. 

리투아니아 상업 TV방송사 방송관계자는 10월 중순 아주 특이한 발상을 했다. 여성 재소자를 대상으로 미인대회를 개최하는 것이었다. “우리는 아름다움이 없을 것 같은 곳에서 아름다움을 찾으려고 한다. 우리는 소외되고 절망적인 여성들이 다시 어깨를 펴고, 높은 굽의 구두를 신고 미소를 배우도록 노력할 것이다”라고 아루나스 발린스카스 방송 사회자는 말했다. 

뜻밖의 제안을 받은 케스투티스 슬란차우스카스 교도소장은 이 행사가 자칫하면 사회의 웃음거리가 될 것 같아 주저했지만 기획의 진지성과 상금 등을 보아 받아들었다. 이 교도소에는 여성 재소자 367명이 수감되어 있고, 이들은 주로 봉제 노역을 한다. 방송 관계자와 사법당국 고위 공직자가 교도소를 방문하자 여성 재소자들은 처음엔 혹시나 사면이 있을까 하여 몹시 기뻐했다. 하지만 미인대회를 기획한다는 소리에 모두 실망했다. 이 행사가 암울한 감옥생활에 다소 위안을 주고 그들의 남은 인생에 희망을 줄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하는 데는 3~4일이 걸렸다. 

참가자격에 키, 몸무게, 결혼 여부, 나이 등 아무런 제한을 두지 않았다. 단지 중죄를 짓지 않은 재소자에 한하고, 죄명과 본명을 밝히지 않아도 되도록 했다. 17살에서 31살까지 모두 39명이 신청했다. 1차 서류심사로 16명을 선발했고, 비공개로 진행된 예선에서 8명을 선발했다. “우리는 그렇게 추한 사람이 아님을 보여주기 위해 이번 미인대회에 참가하게 되었다. 자신에게 자신은 감옥에 절대로 갈 일이 없다고 약속하지 말라”라고 나데즈다(19)는 결선 진출 소감을 피력했다. 

여죄수 미인대회 결선은 11월14일 오후 3시에서 6시까지 3시간에 걸쳐 열렸다. 이 행사는 다음날 < LNK >를 통해 리투아니아 전역으로 녹화 방송되었다. 이날 사회를 맡은 아루나스 발린스카스는 “오늘은 리투아니아, 아니 세계에서 역사적인 날이다. 이 행사를 기획하면서 우리는 이 행사가 세계 최초임을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라고 말했다. 케스투티스 슬란차우스카스 교도소장은 인사말에서 “20년 동안 이곳에서 일을 해왔지만 오늘처럼 특이한 일을 해보기는 처음이다. 교도소는 사회의 선과 악 둘 다 반영한다. 처음으로 우리 교도소는 추한 면이 아니라 아름다운 면으로 사람들의 관심을 끌고 있다”고 강조했다. 

170석이 채 안 되는 교도소 강당은 심사위원, 교도관, 언론·방송사 취재진으로 가득 찼다. 장소가 협소해 여죄수 96명만이 제비뽑기로 참관할 수 있었다. 결선 진출에 실패한 한 재소자는 대회 며칠 전 이미 형이 만료되어 출옥해야 했으나, 본인의 부탁으로 교도소에 남아 이 대회를 참관했다. 이들은 처음 긴장된 모습이 역력했으나, 갈수록 긴장이 풀어졌다. 유명가수들의 막간공연 때마다 함께 노래를 부르고 율동에 맞춰 일어나 춤을 추기도 했다. 

이날 결선에 참가한 여죄수는 모두 8명이었다. 이 중 가장 나이가 어린 빅토리아(17)는 여러 차례 다른 도시에 심문을 받으러 다니느라 연습을 제대로 하지 못해 실제로 7명이 경쟁했다. 이들 중 라우라(20)는 4개월 된 아들, 사만타(21)는 1년9개월 된 딸과 함께 교도소에서 생활한다. 참가자들은 3주 동안 노역 대신 하루 4시간씩 무대 걷기, 노래, 연기 등을 지도받았다. 의상은 리투아니아 일류 디자이너가 디자인했고, 분장도 전문가들이 맡아했다. 

장소가 교도소이고 대상이 재소자라는 것만 빼고는 일반적인 미인대회와 크게 다른 바 없었다. 먼저 야회복을 입은 참가자들이 자기 소개를 했다. 이어 자기의 이미지와 어울리는 역사적 인물이나 유명인을 묘사하는 연기를 했다. 이날 클레오파트라, 마돈나, 카르멘, 제나(Xena), 타트야나(푸슈킨 시의 주인공), 카우보이 등이 등장했다. 

가죽 재킷과 검은색 수영복, 모피 외투와 흰색 수영복은 사회의 어둠과 밝음을 투영하는 것 같았다. 리투아니아 유명가수 기티스 파쉬케비추스와 함께 부르는 노래 시합이 이어졌다. 특히 잉가(31)의 노래솜씨는 대단해 출옥 뒤 파쉬케비추스와 함께 공동 앨범 제작을 꿈꾸고 있다. 마지막으로 결혼식 신부복 시합이 있었다. 

심사위원회는 리투아니아 방송·예술 분야 권위자 다섯명으로 구성됐다. 우선 네티즌 1만여명이 참가해 뽑은 ‘미스 포토’상은 나데즈다가 받았다. 영예의 대상인 ‘미스 진’에는 사만타가 선발되어 왕관과 상금 4000리타스(약 140만원)를 받았다. 상금 2500리타스(약 88만원)의 ‘선’에는 잉가, 상금 1천리타스(35만원)의 ‘미’에는 타트야나가 선발됐다. 나머지는 각각 500리타스(약 18만원)를 받았다. 

이 상금과 왕관은 수상자가 출옥할 때까지 은행에 예치된다. 영구 소유하는 ‘미스 여죄수’의 왕관은 은(銀)에다 비취와 석영으로 장식되어 있다. 광물학자들은 은은 정화를 의미하고, 석영은 악을 제거하는 데 도움을 주고, 비취는 죄수에게 자유를 상징한다고 설명한다. 한 대회 관계자는 “이 상금액은 출옥하는 재소자에게 조금이나마 경제적 보탬이 될 것이고, 또한 미인대회 입상으로 얻은 인기로 이들이 쉽게 일자리를 얻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아직 2년을 더 감옥살이해야 하는 사만타는 출옥하면 사진모델이 되고 싶어한다. 사만타는 “믿기 어려운 이 상이 내 인생을 더 나은 쪽으로 변화시키길 바란다. 하루빨리 자유를 찾고 싶다. 솔직히 이 왕관보다 자유가 나에겐 더 귀하다”라고 수상소감을 밝혔다. 네티즌 사이에 가장 큰 인기를 얻은 나데즈다는 “2년 뒤 출옥하면 화장술을 배우고 결혼해 아이를 가지고 싶다. 다시는 이곳으로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라고 다짐했다. 

행사를 끝까지 지켜본 케스투티스 슬란차우스카스 교도소장는 아주 만족해했고, 내년에도 미인대회 개최를 허락할 것인가라는 질문에 “이번 대회가 성공했으니 반대할 이유도 없지 않은가”라고 반문했다. 사회자이자 이번 행사 핵심기획자인 아루나스 발린스카스는 “이번 행사는 세계에서 처음으로 열렸지만, 마지막은 아닐 것이다. 우리는 현재 ‘미스 유럽 여죄수’의 개최에 대한 몇몇 제안을 받아놓고 있다”라고 말했다. 

이 미인대회를 놓고 네티즌 간에도 열띤 논쟁이 붙었다. “정말 아름다운 여성들이네. 좋은 일로 감옥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 너무 슬플 뿐. 어떤 죄로 몇년 형을 받아 감옥살이를 하는지를 공개하는 것이 공정한 투표를 위해 필요하다.”(ID xx) “이들의 말이 진솔하기를 믿고 싶다. 이 행사가 이들의 암울한 오늘을 위안하는 좋은 기회가 되길 바란다.”(ID Ilona) “가장 아름다운 여죄수는 자신의 아이를 목 졸라 죽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아마 나중에는 가장 아름답게 똥을 누는 국회의원 선발대회가 열릴 수도 있겠다.”(ID Monika) “이들로 인해 피해를 본 사람들이 대회를 지켜보는 심정을 방송사는 한번 생각해보았는지 묻고 싶다.”(ID Laura) “이 대회는 인간존엄성을 격하시키는 꼴이다. 방송사는 시청자을 끌기 위해 별짓을 다한다.”(ID Austeja) 

사진(상): 파네베지스 교도소에서 열린 '미스 여죄수' 선발대회. 미스 여죄수 진 사만타(가운데), 선 잉가(오른쪽), 미 타트야나(왼쪽).

사진(하): 가죽 재킷을 걸치고 수영복 심사에 임하는 여죄수들. 이날 의상은 리투아니아 유명 디자이너가 디자인했다. 


이 기사는 한겨레21 제436호 2002년 11월 28일자로 이미 보도된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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팍사스 대통령 당선 예언 롤리쉬빌리 파문 확산 …  인사개입 소문 국가 이미지 실추

요즈음 리투아니아에서는 ‘초자연적인 치료능력’을 가진 역술인과 현직 대통령의 관계가 화제를 일으키고 있다. 롤란다스 팍사스 대통령이 모두의 예상을 뒤엎고 리투아니아 대통령에 당선된 것은 지난 1월5일. 당선이 확정된 후 팍사스 대통령 당선자의 부인은 공개 인터뷰에서 “한 역술인이 남편이 이긴다고 예언해 당선을 확신했다”고 말했다. 

이어 2월26일 TV로 생중계된 대통령 취임식에서 팍사스 대통령은 한 여인에게 여러 번 입맞춤을 했다. 그가 바로 그루지야 출신의 역술인 레나 롤리쉬빌리였다. 롤리쉬빌리는 취임 축하미사에서도 팍사스 대통령 부부 뒷자리, 퇴임하는 아담쿠스 전 대통령 부부 바로 옆에 앉았다. 시청자들은 국회의장, 국무총리보다 앞자리에 앉은 이 여인의 정체에 궁금증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사실 이번 리투아니아 대통령선거는 이변의 연속이었다. 지난해 12월22일 열린 대선 결과 아담쿠스 전 대통령이 35.06%, 팍사스가 19.4%의 표를 얻었다. 그런데 과반수 득표자가 없어서 1월5일 결선투표를 한 결과 팍사스가 55%의 표를 얻어 45%를 얻는 데 그친 아담쿠스를 누른 것이다. 대부분의 정치인들이 아담쿠스를 지지했고, 그의 승리를 낙관하던 상황이었다. 

46세의 팍사스 대통령은 1997년 빌뉴스 시의원으로 정치활동을 시작했다. 그는 불과 5년 남짓한 정치경력 중에 두 번이나 빌뉴스 시장과 국무총리를 역임했다. 96년 롤리쉬빌리는 당시 건설회사 사장이었던 팍사스에게 이러한 미래의 정치역정을 예언해주었다고 한다. 이 일을 계기로 팍사스 부부는 롤리쉬빌리와 두터운 교분을 맺게 되었다. 

신비한 치료능력을 가진 사람으로 소문난 롤리쉬빌리는 화장지를 아픈 부위에 놓고 손에서 나오는 따뜻한 기를 보내 환자를 치료한다고 한다. 그는 팍사스 외에도 현 정부의 적지 않은 고위 공직자들과도 교분을 맺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문제는 롤리쉬빌리가 고위직 임명에 개입했다는 의혹이 만연하다는 점이다. 리투아니아 최대 일간지인 ‘레투보스 리타스’에 따르면 고위직 후보자들은 임명되기 전에 롤리쉬빌리를 먼저 만나야 했다고 한다. 클레멘사스 림쉐리스 국회의원은 “고대나 중세처럼 리투아니아에는 무당과 부족이 있고, 부족장이 무당의 말을 들어야 하는 시대가 온 것 같다. 무당의 말에 지도자의 운명이 달려 있다”고 비꼬았다.

클라이페다 부시장을 지낸 안타나스 리그누가리스 역시 비판적이다. 그는 자신도 롤리쉬빌리에게 치료를 받았지만 아무 효과를 보지 못했다며 “롤리쉬빌리는 저명 정치인들을 이용하고 있다”고 일침을 가했다. 리투아니아 로마 가톨릭의 최고위 성직자인 아우드리스 워자스 바츠카스 추기경도 “악마의 일이다”라고 비판했다.

대통령 취임 후 한 달이 지나도록 이 스캔들은 가라앉지 않고 오히려 국내외로 퍼져갔다. 언론들은 롤리쉬빌리를 제정 러시아 시대에 정치를 좌지우지했던 라스푸친 신부에 비교하고 있다. 영국의 BBC 방송은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와 유럽연합(EU) 가입을 앞둔 리투아니아가 이같이 시대착오적인 스캔들로 국가 이미지를 떨어뜨리고 있다며 우려했다. 결국 침묵으로 일관하던 팍사스 대통령은 3월13일 “롤리쉬빌리와의 관계는 사적인 것이며 그는 국사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는 해명 성명을 발표했다.

대다수 사람들은 개인적인 교분을 맺는 것은 대통령의 자유지만 취임식 공개석상에서 입맞춤을 하는 등 롤리쉬빌리의 존재를 대중 앞에 드러낸 것은 한 나라의 지도자로서 경솔한 행동이었다고 생각한다. 한편 롤리쉬빌리 스캔들은 사회주의 체제 붕괴 이후 심리적 불안감이 팽배해 있던 리투아니아 사회에 신비주의에 대한 동경을 부추기는 부작용까지 낳고 있다.

* 이 기사는 주간동아 제 375호 2003년 4월 3일자로 이미 보도된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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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인 ‘지우네 스기하라’탄생 100주년을 기념하는 행사가 최근 리투아니아 수도 빌뉴스에 성대하게 열렸다. 스기하라는 제2차 세계대전 중 수천명의 유대인들에게 일본 통과사증을 발급해 이들의 목숨을 구했다. 수 많은 유대인들을 나치로부터 구해낸 독일인 산업가 오스카 쉰들러에 견주어 '일본의 쉰들러'로 알려진 스기하라는 1900년에 태어나 1986년에 사망했다. 쉰들러 부부의 유대인 구조활동은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이 '쉰들러 리스트'로 영화화해 오스카상을 수상하는 등 큰 인기를 끌었었다. 

[사진설명]-(위)기념식수를 하는 미망인 유키코 스기하라, 리투아니아 대통령 발다스 아담쿠스, 일본대사, 리투아니아 외무부장관(앞줄 왼쪽으로부터)
/ 빌뉴스 스기하라기념비와 갓 심어진 벚꽃나무 

지난 10월 2일 빌뉴스를 동서로 가르는 네리스강(江) '발타스 틸타스'(흰 다리라는 뜻) 부근 경관 좋은 언덕에 열린 이 행사에는 리투아니아 대통령 발다스 아담쿠스, 일본 대사 쇼헤이 나이토, 스기하라 미망인 유키코 스기하라(88세), 와세다대학교 관계자 등 200여명에 이르는 일본의 정치인과 예술인, 리투아니아의 정치인과 학생들이 참여했다. 이들은 리투아니아어, 일본어, 영어로 쓰여진 약력과 함께 스기하라 기념비를 제막했고, 그 주변에 100그루의 벚꽃나무를 심었다. 

"리투아니아와 일본에 있어 나무에 대한 존경은 인간애와 문명의 보편적 가치에 대한 존경처럼 지대하다. 리투아니아에 심어지는 이 일본 나무들의 뿌리는 두 나라 국민간 친선을 더욱 강화하는 데 도울 것이다"라고 아담쿠스 대통령은 축사를 하였고, "스기하라의 영웅적인 행동은 61년 전 유대인을 구했을 뿐만 아니라 리투아니아와 일본간 우호관계를 위한 토대를 마련해주었다"라고 나이토 대사는 말했다. 

이 벚꽃나무는 일본 북부지방에서 직접 가져온 것이었다. 원래 280그루가 도착할 예정이었으나, 동경에서 코펜하겐으로 운송되는 과정에서 나머지는 유실되었고, 108그루만 무사히 도착했다. 

스기하라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는 이 벚꽃나무는 스기하라 기념비 부근뿐만 아니라 그의 이름을 딴 거리, 그가 거주하며 근무했던 카우나스(리투아니아 제2의 도시, 당시 리투아니아 임시 수도) 옛 일본영사관 정원, 리투아니아 대통령궁 정원, 텔세이 일본정원 등에 심어졌다. 이로써 빌뉴스는 유럽에서 오스트리아 빈, 독일 베를린에 이어 일본 벚꽃나무 공원이 조성된 세 번째 도시가 되었다. 

기념식이 끝날 무렵 일본 학교와 자매결연을 맺은 리투아니아 학생들이 '행복의 새' 종이학이 달린 오색 풍선 100개를 가을 하늘로 날렸다. 이어 식수(植樹)를 마치자 하늘에는 유르기스 카이리스가 일본 음악에 맞춰 절묘하고도 환상적인 묘기 비행을 연출했다. 

그는 지난 해 일본에서 열린 세계묘기비행대회에서 우승을 해 일본인들에게 널리 알려진 인물. 빌뉴스 로투쉐(구시청건물)에는 일본에서 가져온 대형 아름다운 벚꽃사진들과 종이 접기 작품들이 전시되었고, 저녁에는 경축 폭죽이 터트려졌다. 

1939년 8월 나치독일과 소련이 상호불가침의 이름 아래 동유럽에서의 영향권 행사를 분명히 하기 위해 몰로토프-리벤트로프 조약(1939)을 체결했다. 그 해 9월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하자 독일의 영향권에 놓여 있던 리투아니아는 독일의 폴란드 공격에 참가하기를 거부했다. 이에 리투아니아는 소련의 영향권으로 편입되었고, 1940년 소련은 군대로 리투아니아를 점령하여 소비에트화를 시작했다. 

이 격변의 시기인 1939에서 1940년 스기하라는 리투아니아 일본영사관 부영사로 근무했다. 독일 나치의 대학살에 공포를 느낀 리투아니아, 폴란드 심지어 독일 출신 유대인들은 일본 영사관으로 몰려갔다. 그 당시 소련은 일본의 사증을 받으면 자국을 통과시키겠다고 했다. 

영사관 밖에서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어진 얼굴로 두려움에 떨며 기다리고 있는 수 많은 유대인들을 바라보면서 스기하라는 깊은 고민에 빠졌다. 본국 정부에 사증 발급 허가를 요청하는 전보를 쳤고, 독일과 동맹을 맺은 일본 정부는 사증을 발급하지 말라는 지시를 했다. 

하지만 스기하라는 이 훈령을 무시하고 양심의 소리에 따라 유대인들에게 약 6,000개의 통과사증을 발급했다. 이 스기하라의 '생명의 사증' 덕분에 많은 유대인들은 소련과 일본을 거쳐 제3국으로 안전하게 피난할 수 있었다. 

1941년 독일은 리투아니아를 침공해 1944년까지 리투아니아 총 유대인수의 95%인 약 25만명을 학살했다. 빌뉴스에서 남쪽으로 10km 떨어진 파네레이에서 나치는 1941-1944년에 약 10만명을 대량학살했고, 이 중 7만명이 유대인이었다. 이로써 유대인은 세계에서 가장 주목할만한 유대인 공동체 하나를 잃게 되었다. 

이후 리투아니아는 빌뉴스의 한 거리를 지우네 스기하라로 이름지었고, 그가 살았던 옛 일본영사관을 스기하라기념관으로 운영하고 있으며, 10월 2일에는 스기하라 기념우표를 발행하는 등 스기하라의 용감한 인도적인 행동에 깊은 감명과 경의를 표하고 있다. 

또한 그의 행동은 오늘날 리투아니아인들이 일본과 일본인에 대한 우호적인 태도를 갖는 데 큰 계기를 마련해주었다. 특히 올해는 일본이 소련으로부터의 리투아니아 독립을 인정하고 외교관계를 맺은 지 10년이 되는 해로 더욱 의미가 깊었다. 

1947년 일본으로 귀국한 그는 '훈령위반'으로 해임되었고, 오랫동안 그의 유대인 구원 행적은 일본 국민들 사이에선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다만 이것을 우익 단체들이 일본은 제2차 대전 때 유대인을 도왔다"며 자신들의 과거를 왜곡하는데 이용했다. 마침내 스기하라는 탄생 100주년을 맞아 지난 해 명예를 회복했다. 

일본 정부는 지난 해 10월 10일 그의 삶을 기리는 조촐한 기념식을 열었고, 도쿄 외교사료관에 스기하라씨의 공적을 기리는 현판을 세웠다. 전쟁이라는 극한 상황에서 국가와 민족에 관계없이 인간을 구한 스기하라의 용기 있는 인도적 행동은 오늘날 시대에도 소중한 귀감이 되어야 할 것이다. 

* 이 기사는 하니리포터 2001년 10월 25일자로 이미 보도된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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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4월 13일 제16대 국회의원 273명을 뽑은 선거에 지금까지도 우리나라는 선거사범수사가 종결을 짖지 못하고 야당의 편파수사와 여당의 공정수사가 대립을 하고 있다. 국회의원 40명이 재판결과에 따라 당선무효가 될 수 있다고 한다. 사상 최대 규모로 선거법위반자가 기소되었다. 열 여섯 번 국회의원 선거를 치렀지만, 아직도 공명선거가 자리잡지 못한 것이 바로 한국 선거문화의 현주소이다. 

지난 10월 8일 리투아니아에는 141명을 뽑는 제3대 국회의원 선거가 있었다. 총유권자 260만명 중 58.62%가 투표에 참가하였다. 1990년 소련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한 후 지금까지 리투아니아는 임기 4년인 국회의원 선거를 세 번 치렀다. 이번 선거에 선거법을 위반하여 검찰에 고소나 고발된 사건이 아직 없다. 겨우 세 번을 치른 리투아니아의 선거문화는 열 여섯 번을 치른 우리나라의 것보다 훨씬 앞서 있다. 

이번 선거에는 야당인 좌파 사회민주연대(민주노동당+사회노동당+신민주당+리투아니아·러시아연합)가 51석을 얻어 다수당이 되었다. 하지만 이 다수당의 기쁨은 일일천하로 끝나고 말았다. 바로 좌파세력의 집권을 막기 위해서 중도파 세력들이 연대를 구성하였기 때문이다. 

리투아니아에는 다수당이 국회와 행정부의 권력을 장악한다. 중도파 세력이 연대를 구성하자, 사회민주연대가 51석을 얻는 데 가장 큰 공헌을 한 전직 대통령 알기르다스 브라자우스카스는 백의종군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국회의원에 입후보자하지 않았고, 만약 사회민주연대가 집권할 경우 국무총리로 내정되어 있었다. 

지난 12일 자유연합(롤란다스 팍사스: 34석), 신연합(아르투라스 파울라우스카스: 29석), 중도연합(로무알다스 오졸라스: 3석), 그리고 현대기독민주연합(비타우타스 보구시스: 1석)이 연대 합의문에 서명을 하였고, 67석으로 집권세력이 되었다. 이들 네 개 정당은 지난 여름부터 선거 후 연대할 것을 구두로 합의하였다. 

신정치불럭으로 불리어지는 이들 연대세력은 무소속 출신인 현 대통령 발다스 아담쿠스로부터 비공식적 후원을 받고 있다. 비록 과반수 71석을 차지하지는 못했지만 이들은 국회의장(아르투라스 파울라우스카스)과 국무총리(롤란다스 팍사스) 자리를 차지하였다. 

하지만 이 신정치블럭의 전도(前途)는 그렇게 밝은 편은 아니다. 우선 안정의석수인 71석의 과반수를 아직 확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또한 연대한 각 정당의 정책이 여러 분야에서 일치하지 않기 때문이다. 바로 이 불일치하는 부분에서 어떻게 상호이해 속에 공통분모를 창출하느냐가 리투아니아 정국 안정에 큰 관건이 된다.

이번 선거에서 최연소 당선자는 26세이고, 최고령 당선자는 76세이다. 141명 중 15명이 여성의원으로 전체의 10.6%를 차지하고 있다. 지역구에서 6명, 정당비례제로 9명이 당선되었다. 좌파의원이 8명, 자유주의자가 3명, 사회주의자가 2명, 보수주의자가 2명이다. 제3대에는 지난 제2대 여성의원수 25명보다 10명이나 줄어들었다.

* 이 기사는 하니리포터 2000년 10월 27일자로 이미 보도된 내용이다.
Posted by 초유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