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불교 7대 교서 에스페란토 번역과 에스페란토에서 여러 언어로의 번역을 진행하는 것 외에 에스페란토 국제선방과 세계에스페란토대회 원불교 분과모임에서 원무로서 역할을 해왔다. 에스페란토 국제선방은 2006년부터 매년 열리고 있으며 보통 국내외 참가자가 30-70명이다. 서울에서 열리는 102차 세계에스페란토대회를 계기로 올 여름 13차 국제선방에는 세계 20여 개국에서 120여 명이 참가했다. 국제선방에 필요한 50-60쪽 책자를 처음부터 지금까지 편집해오고 있으며 또한 기회 있을 때마다 참가해 원불교 교리 등을 알렸다. 

세계에스페란토대회는 매년 60여개국에서 에스페란토 사용자 2000여명이 참가하는 국제행사다. 원불교 에스페란토회는 내가 살고 있는 리투아니아 빌뉴스에서 2005년 열린 세계대회에서 처음으로 분과모임을 가졌다. 지금껏 11년째 꾸준히 이 모임을 해옴으로써 세계 에스페란토계에 원불교를 널리 알리고 있다. 행사에 필요한 안내지와 홍보 동영상 등을 편집하는 것이 내 몫이고 때로는 사회를 보거나 교리강연을 한다. 

* 1988년 교서 번역 당시의 작업 모습
* 2016년 교서 번역 당시의 작업 모습

그 동안 수십 편의 종법사 법문을 에스페란토로 번역했고 〈원불교신문〉 교리로 배우는 외국어 에스페란토란을 2009년부터 9년째 해오고 있다. 교서 번역 등으로 미뤄왔던 좌산상사의 〈정전 좌선의 방법 해설〉 책을 에스페란토로 완역해서 현재 컴퓨터 편집 중이다. 앞으로 에스페란토 국제선방에 유용하게 쓰일 것이다. 

앞으로의 계획은 우선 내년 상반기까지 〈대산종사법어〉를 에스페란토로 완역하는 일이다. 오래전에 여러 언어로 번역이 완료되었지만 아직 책으로 발간되지 못한 〈정전〉을편집해 세상에 내놓은 일도 중요하다. 이 일을 다 끝내면 정리해오고 있는 원불교 용어 에스페란토 단어집을 만들어 앞으로 글을 쓰거나 번역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고자 한다. 좀 더 욕심을 낸다면 좌산상사의 〈마음수업〉 책도 번역하고 싶다. 

지난 30여 년의 교서 번역을 되돌아보면 번역이 내 신앙이요 수행이었다. 즐겁고 보람찬 세월이었다. 단어 하나, 문장 하나를 두고 서너 시간 혹은 하루 내내 기쁘게 고민한 적도 있었다. 인터넷 시대가 와서 보다 더 쉽게 검색하고 연마할 수 있었다. 언어적으로 뛰어난 사람들에게 번역을 부탁했는데 "어떤 종교도 세상에 확산되는 것에 관여하고 싶지 않다"고 단번에 거절하는 사람도 몇몇 있었다. 직접 번역하고 컴퓨터 책 편집까지 하니 일처리가 빠르고 수월했다. 이제 눈도 침침해지고 건강도 예전 같지 않다. 50대 중반 나이에 7대 교서 번역을 끝낸 것이 무척 다행스럽다. 

교서를 번역할 때마다 의문되는 사항 하나하나 자상히 답해주신 좌산상사님의 지도와 보살핌에 이 자리를 빌어서 거듭 감사를 드린다. 번역 작업에 힘들거나 지칠 때 꿈에 나타나서 격려해주시면 새로운 힘을 얻어 나아갈 수 있었다. 2012년 여름 10일간 좌산상사님과 함께 에스페란토의 발생지인 바르샤바와 비아위스토크를 둘러보고 리투아니아 빌뉴스 우리 집에 모시게 된 것은 우리 가족에겐 큰 기쁨이었다. 2015년 4월 상사님으로부터 붕산(鵬山)이라는 법호를 받았다.

7대 교서 번역은 고정적인 직업이 없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직장에 매여 있으면 아무래도 번역에 필요한 많은 시간을 낼 수 없었을 것이다. 이상하리만큼 생계를 꾸리는데 별다른 걱정을 하지 않았다. 적은 것에 만족한 탓일까 아니면 천록이 나오는 탓일까. 때로는 해외통신원으로, 자유기고가로, 비디오저널리스트로 생계를 해결했다. 여러 해 전부터 여름엔 관광안내사로 일하고, 겨울엔 빌뉴스대학교에서 한국어를 가르치고 있다. 발트 3국을 여행하는 원불교 교도들을 종종 만날 때도 있다. 이제 생활 속에서 적공을 쌓고 틈나는 대로 세상을 돌아다니면서 원불교를 알리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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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년 종로교당에서 시작한 원불교 교전 에스페란토 번역과 윤문 작업은 세계 여러 나라를 거쳐서 총부 정역원 사무실에서 1998년 6월 드디어 마쳤다. 당시 번역에 많은 지도를 해주신 좌산종법사님은 에스페란토 교서를 통해 세계 여러 나라 언어로 번역할 것을 명하셨다. 

첫 결실은 스페인어였다. 7개 언어에 능통하고 이슬람 신학과 아랍어를 가르치는 스페인 사람 리카르도 알베르트 레이나 교수를 소개받았다. 1999년 7월 총부에서 윤문 작업을 마친 〈정전〉은 8월 한국어-스페인어 원불교 〈정전〉 자문판으로 발간되었다. 〈대종경〉은 2004년 번역이 완료되었다. 2003년 9월 좌산종법사님의 훈증 아래 일주일 동안 삼동원에서 윤문 작업이 이루어졌고 김장현 교도(고원국 교무 정토)와 일본에서 공부한 비센테 아야 세고비아 박사도 참여했다. 스페인어 〈원불교 교전〉 자문판은 2005년 발간되었다.

* 포르투갈어로 원불교 교전을 번역한 제랄도 박사(왼쪽), 좌산 종법사(가운데), 필자(오른쪽)
* 스페인어로 원불교 교전을 번역한 리카르도 박사(왼쪽), 윤문에 참가한 세고비아 박사(오른쪽)

포르투갈어 번역자는 에스페란토 학술원장이자 포르투갈어 교수인 브라질 사람 제랄도 마토스 박사이다. 포르투갈어 사전을 비롯한 많은 저서를 남긴 언어학자인 그는 2001년 4월 정전 번역을 시작해서 2004년 만덕산 훈련원에서 윤문을 마쳤다. 2005년 11월 상주선원에서 18일간, 그리고 2009년 1월 브라질 쿠리치바에 있는 그의 집에서 10일간 윤문 작업이 이뤄졌다. 마침내 2009년 포르투갈어 〈원불교 교전〉과 한국어-포르투갈어 원불교 정전 자문판이 발간됐다.

그는 2012년 〈정산종사 법어〉 번역을 시작해 2013년 10월 상파울로 교당 봉불식을 기해서 마치기로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안타깝게도 봉불식 3일을 앞두고 뇌혈관 장애로 입원해야 했고 다음해 3월 23일 세상을 떠났다. 좌산상사님은 지중한 인연으로 여겨 제랄도 박사의 영전에 법문을 내려주셨다. 그의 일생 마지막 작업이 된 〈정산종사 법어〉 번역은 또 다른 유능한 브라질 사람 파울로 비안나 박사가 이어 받아서 2014년 12월 번역을 완료했다. 비안나 박사는 2016년 〈불조요경〉 번역까지 마쳤다. 개교 백주년 성업을 맞아서 에스페란토에서 번역된 포르투갈어 〈원불교 교전〉, 〈정산종사 법어〉, 〈불조요경〉은 내가 컴퓨터 책 편집을 해서 포르투갈어 원불교 교서로 2016년 발간되었다. 책 편집 시 상파울로 교당 김생운 교무가 많은 도움을 주었다.

아랍어 정전 번역은 리카르도 박사가 맡아서 2010년 처음 진행했다. 하지만 여러 사정으로 번역을 다 마치지 못했다. 번역에 많은 경험이 있는 바레인 치과의사 와엘 후사인을 소개받았다. 그는 리카르도 박사의 번역본을 참조하면서 2013년 3월 시작해 12월 정전 번역을 마쳤고 이어서 2016년 대종경 번역까지 다 해냈다. 아랍어 원불교 교전과 다른 언어에서 번역된 아랍어 정산종사 법어, 원불교 교사, 원불교 성가 선곡집 컴퓨터 책 편집도 내가 맡아서 했다. 러시아어 원불교 성가 번역에도 에스페란토가 많은 기여를 했다. 원불교 성가 전곡이 책으로 발간된 언어는 영어와 에스페란토 두 언어뿐이다. 러시아 에스페란토인 모이세이 브론쉬테인이 2009년 번역을 시작해 2014년 성가 50곡 번역을 마쳤다. 2013년 7월과 11월 번역자를 리투아니아로 초청해 번역을 윤문했다. 러시아어 성가 번역에는 원신영 교무와 비다 최예네가 많은 역할을 했다. 내가 컴퓨터 악보 편집까지 한 러시아 원불교 성가 선곡집이 2014년 발간됐다.

이외에도 에스페란토 원불교 정전이 번역되어 책으로 발간된 언어는 체코어(번역자 카렐 크라프트, 2006년)와 리투아니아어(번역자 라이뮤스 스트라즈니쯔카스, 2006년)이다. 번역이 완료된 언어는 이탈리아어(번역자 크리스티나 데 조르지, 2007년), 불가리아어 (번역자 루먀나 토도로바, 2003년) 폴란드어 (번역자 보이치에흐 우사키에비츠, 2004년) 그리고 몽골어(번역자 발드누즈 도르즈, 2003년)이다. 이와 같이 에스페란토는 원불교 교서 번역의 매개 언어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 출처: 원불교신문 http://www.won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118531

* 교화자의 삶 5 - 교서 번역은 내 신앙이요 수행

* 교화자의 삶 4 - 에스페란토, 교서 번역 매개 언어 역할 톡톡히

* 교화자의 삶 3 - 7대 교서 에스페란토 번역에 30년 세월 ②

* 교화자의 삶 2 - 7대 교서 에스페란토 번역에 30년 세월 ①

* 교화자의 삶 1 - 일생 일로( 一路) 이끈 신문 기사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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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불교교전〉 번역을 완성한 후 정산종사 탄생백주년을 맞아 〈정산종사법어〉를 2000년 1월부터 시작해 4월에 에스페란토 초벌 번역을 마쳤다. 

2000년 7월 완도 조실에서 번역상 어려운 사항에 대해 좌산 종법사의 가르침을 받았다. 그해 자문판이 발간되었지만 다시 여러 해 작업을 걸쳐 마침내 2011년 12월 윤문 작업을 완성했다. 특히 윤문할 때 정역을 담당하고 있던 류정도 교무와 전자편지로 방대하게 의견을 나눴다. 

성가는 2004년 9월 번역을 시작해 이듬해 4월 초벌 번역을 마쳤지만 200곡 모두를 컴퓨터 악보에 가사를 넣어야 했다. 다듬고 다듬어서 2006년 7월 컴퓨터 악보 작업까지 완성해 9월 리투아니아에서 에스페란토 원불교 〈성가〉가 인쇄되었다. 성가는 가장 어려운 번역 중 하나였지만 참으로 즐거웠다. 리듬과 운율을 맞춰야 하고 또한 음악구절과 가사구절을 맞춰야 했다. 또한 컴퓨터 음악 프로그램을 능숙하게 다룰 줄 알아야 했다. 

이렇게 한 것을 다시 노래를 불러서 자연스러운지를 확인해야 했다. 여기에 음악을 전공한 아내가 절대적인 도움이 되었다. 그의 도움 없이는 성가 번역은 불가능한 작업이었다.

〈예전〉은 2012년 5월 번역을 시작해 2014년 5월 마쳤다. 에스페란토 국제선방 참가 차 2014년 1월 한국 방문시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나 다른 번역과 상충되는 부문을 좌산 상사에게 여쭤서 해결했다. 

예전 번역을 하면서 가장 마음 아팠던 것은 그 동안 〈예전〉 원불교 용어 번역을 정리한 파일이 정말 귀신이 곡할 정도로 컴퓨터에서 사라져버렸다. 다행이 종이로 된 것이 있었다. 

〈교사〉는 2014년 7월 번역을 시작해 2015년 2월 마쳤다. 에스페란토로 번역하면서 영어 번역본을 참조하는 한편 의견까지 쓰느라 많은 시간이 소요됐다. 이때는 의식적으로 일일이 원불교 용어 번역 파일을 만들어나갔다. 진작 교서 번역 처음부터 이 작업을 하지 않는 것이 많이 후회가 되었다. 교사 또한 상사원에서 머물면서 어려운 부분을 해결했다. 

〈불조요경〉은 2015년 3월 번역을 시작해 2016년 2월 윤문까지 다 마쳤다. 처음에는 고형본을 번역했으나 나중에 나온 지침에 따라 원불교본을 그대로 또 다시 번역해야 했다. 번역량은 상대적으로 적지만 여러 언어 기존 번역본들을 참조하면서 참으로 많은 공부를 해야 했다. 

원불교100주년기념성업의 일환으로 원불교 교서 10대 언어 번역 사업에 에스페란토가 포함되었다. 1985년 정전 번역에 참여하기 시작한 후 〈정전〉, 〈대종경〉, 〈정산종사법어〉, 〈불조요경〉, 〈예전〉, 〈교사〉, 〈성가〉가 한 사람에 의해 에스페란토로 일관되게 번역되었다. 

정전 번역을 마지막으로 여겼는데 어떻게 하다 보니 꼭 31년만에 7대 교서를 혼자서 다 번역하게 되었다. 각 번역서마다 용어와 인명은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설명을 달았고 여러 교서 번역을 거치면서 초기에 선택한 번역어 단어들을 다듬어 갈 수 있었다. 

* 에스페란토 교서를 봉정한 대만 교도 아벵고 박사
* 10개 언어 원불교 교서 봉정
* 원불교 100주년 기념대회에 참가한 국내외 에스페란티스토들

수많은 국내외 인연들의 도움이 있었는데 특히 좌산 상사님의 관심과 격려 없이는 이룰 수 없는 일이었다. 이 모든 번역은 리투아니아 에스페란토인 안타나스 그린체비츄스가 교정을 봤고 에스페란토인 아내 또한 많은 조언을 해주었다. 

번역뿐만 아니라 7대 교서 컴퓨터 편집까지도 인쇄소에 맡기지 않고 내가 직접 다 했다. 

이는 컴퓨터 편집을 마치는 순간까지 윤문하고 오탈자를 직접 찾을 수 있게 해주었다. 

2016년 3월 때마침 55세 생일을 맞아 컴퓨터 편집을 완성하는 기쁨을 누렸다. 원불교100주년기념대회를 맞이해 2016년 〈교전〉, 〈정산종사법어〉, 〈불조요경〉을 묶어서 에스페란토 〈원불교 교서〉, 그리고 〈예전〉과 〈교사〉를 묶어서 책이 발간되었다. 

이렇게 나온 에스페란토 교서는 여러 언어로 번역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 회에 기술하고자 한다.

* 출처: 원불교신문 http://www.won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118429

* 교화자의 삶 5 - 교서 번역은 내 신앙이요 수행

* 교화자의 삶 4 - 에스페란토, 교서 번역 매개 언어 역할 톡톡히

* 교화자의 삶 3 - 7대 교서 에스페란토 번역에 30년 세월 ②

* 교화자의 삶 2 - 7대 교서 에스페란토 번역에 30년 세월 ①

* 교화자의 삶 1 - 일생 일로( 一路) 이끈 신문 기사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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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종로교당 이광정 교감님의 격려 속에 1985년 5월 청년회 내 에스페란토 소모임 '일원회' 정기총회에서 홍성조, 육철 중심으로 〈정전〉 번역을 본격적으로 실행하기로 했다. 나는 8월 행정고시 2차 시험을 치룬 후 사요부터 번역함으로써 참여했다. 

"우리말로 편찬된 경전을 세계 사람들이 서로 번역하고 배우는 날이 멀지 아니할 것이니"라는 전망품 3장을 실현시키는 일꾼이 돼야겠다고 다짐하면서 번역에 몰입했다. 이는 정말 아쉬운 시험 결과가 방황을 극복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1986년 2월 법위등급까지 번역을 마쳤다. 그해 8월 에스페란토 원불교 안내서가 발간돼 제5차 한·일 청년세미나 참가자와 본회를 방문하는 외국인들에게 원불교를 알리는 데에 기여했다. 이때 '일원회'가 '원불교에스페란토회'로 단체명이 변경됐다. 

* 1988년 에스페란토 정전 발행 봉고법회
* 1998년 수위단회 에스페란토 교전 교서감수회의
* 1998년 에스페란토 교전 발행 봉고법회
* 1998년 에스페란토 교전 발행 봉고법회

종로교당 청년회 회장을 맡은 1987년부터 1990년 6월 헝가리 에스페란토 유학을 떠날 때까지 교당에서 살면서 교당 일과 청년 활동을 함께 했고 이광정 교감님의 교리 지도를 받으면서 〈정전〉 에스페란토 번역을 윤문했다. 4년에 걸쳐 총 2천 시간 11차례 윤문 과정을 거쳐 1988년 3월 에스페란토 〈정전〉 교서감수회의가 총부에서 두 차례 열렸다. 이때 회의에서 고산, 숭산, 구타원 종사님들을 목전에서 뵙게 되었다. 당시는 컴퓨터가 없어서 종이에 손글씨로 번역해 한 단어 한 단어를 타자기로 옮겨 쳐야 했다. 그해 9월 11일 5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중앙총부 대각전에서 에스페란토 〈정전〉발행 봉고법회가 열렸다.

에스페란토 〈정전〉은 한국 종교 경전 중 최초의 에스페란토 번역서이다. 에스페란토 언어 능력, 교리 이해 능력 그리고 번역상의 표현 능력이 두루 필요하다. 이광정 교감님은 완벽하지 않더라도 일단 세상에 내놓아야 한다고 하시며 격려를 해주셨다. 큰 일을 끝냈으니 다시 고시 준비에 몰입해보자고 마음을 다잡아봤지만 여전히 원불교 활동과 에스페란토 활동을 이어갔다. 

1989년 한국에스페란토 청년회장까지 맡아 8월 일본에서 열리는 세미나에 참가하면서 한 달간 에스페란토로 일본 곳곳을 둘러보았다. 에스페란토가 살아있는 언어임을 실감한 이 여행이 내 인생에 획기적인 전환점을 만들어주었다. 박사 과정 진학, 고시 재도전, 취업, 출가 등 장래에 대한 고민 속에 늘 교서 번역에 대한 애착이 자리 잡았다. 

〈대종경〉 번역을 시작하면서 무엇보다도 에스페란토 어학 실력을 높여야겠다고 결심했다. 에스페란토 운동이 활발하고 일정기간 동안 체계적으로 교육을 받을 수 있는 불가리아를 시작으로 3년간 에스페란토 세계여행을 계획했다. 수위단회 중앙으로 계시던 좌산 상사의 지원이 큰 힘이 되었다.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에스페란토 학과를 둔 엘테대학교 교수를 만났다. 그가 대학원 진학을 권유하자 여행으로써 얻는 언어 능력보다는 대학원에서 체계적으로 공부해서 얻는 언어 능력이 훨씬 더 가치 있을 것이라 믿고 입학했다. 이렇게 공부하면서 〈대종경〉 번역 작업을 이어가서 1887년 에스페란토가 공표된 폴란드 바르샤바에서 1992년 10월 〈대종경〉 번역을 완성했다. 한국에스페란토협회 사무국장과 대회조직위원으로서 1994년 서울 세계에스페란토대회를 성공적으로 마친 후 다시 유럽으로 가서 학위논문을 마치는 한편 〈대종경〉 번역을 윤문했다. 1997년 6월부터 1년간 좌산 종법사님의 배려로 총부 성불당에 살면서 〈정전〉과 〈대종경〉 전체 윤문 작업을 했다.

이때 총부 교무님들과 수많은 문답과 의견교환을 했고 기회 있을 때마다 종법실에 찾아가 의문사항을 하나하나 지도를 받았다. 수위단회 교서 감수위원회의를 거쳐 1998년 6월28일 에스페란토 원불교 교전 출판 봉고식이 열렸다. 이렇게 나온 에스페란토 교전은 여러 언어로 번역되는 계기가 되었다.

* 출처: 원불교신문 http://www.won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118368

* 교화자의 삶 5 - 교서 번역은 내 신앙이요 수행

* 교화자의 삶 4 - 에스페란토, 교서 번역 매개 언어 역할 톡톡히

* 교화자의 삶 3 - 7대 교서 에스페란토 번역에 30년 세월 ②

* 교화자의 삶 2 - 7대 교서 에스페란토 번역에 30년 세월 ①

* 교화자의 삶 1 - 일생 일로( 一路) 이끈 신문 기사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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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기85년(2000년) 4월12일 처음 원무 사령장을 받았다. 현재 유럽 리투아니아에서 살면서 국제어 에스페란토를 통한 해외교화와 정역사업을 진행해 오고 있다. 

앞에는 넓은 들과 푸른 동해, 뒤에는 높은 산, 옆에는 맑은 강이 그림처럼 어울려진 마을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초등학교 5년 대구로 전학한 후 대한불교 진각종 종립학교인 중학교에 들어갔다. 일주일에 한 번 열리는 '심학' 수업에 교리를 배우고 선을 하는 데 참 재미있고 즐거웠다. 

고등학교에 진학하자 스스로 신앙처를 찾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종종 주말에 진각종 심인당이나 천도교 교당을 찾아가곤 했지만 갈 때마다 문이 닫혀 있었다. 문을 두드리고 들어가 관심이 있어서 왔다고 말하기엔 용기가 부족했다. 잠시 문 앞에서 서성거리다 돌아오곤 했다. 기회는 전혀 기대하지 않은 곳에서 나타났다. 

고등학교 2학년 때인 원기64년(1979) 5월 중간고사가 끝나는 날이었다. 같은 교실에서 본 마지막 시험이 끝나자 3학년 선배 몇 명이 2학년생들에게 원불교에 한번 같이 가볼 것을 권했다. 서성로교당이었다. 시험이 끝나 홀가분했고 한국인이 세운 종교라는 짧은 설명에 흔쾌히 따라 갔다. 이렇게 처음 접한 원불교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낯설지가 않았다. 특히 하얀 벽에 걸린 검은 일원상이 그 어떤 신앙 대상의 형상보다 성스럽게 다가왔다. 

그해 7월 대구교구 대법회 시 대산종법사가 서성로교당에 들렀다. 막 입교한 학생 교도로 멀리서나마 종법사님을 뵐 수 있는 것은 큰 행운이었다. 학생회 법회가 열리는 토요일이 몹시 기다려졌다. 학교 시험이 끝나면 한동안 책 읽기를 즐겨했다. 이제는 그 책이 위인전이나 문학소설에서 교전, 교서, 선진열전 등 원불교 서적으로 바꿔졌다. 학교 친구들에게 누구나 쉽게 공감하는 〈대종경〉 내용들을 전해준 기억도 새록새록 난다. 고등학교 3학년생이 되면 보통 대학 입시 준비로 법회에 나오지 않았다. 그런데 이런 시기일수록 더욱 법회에 나가 힘을 얻는 것이 필요하다고 굳게 믿었다. 학생회를 이끌어가는 후배들에게 눈치가 보였지만 열성적으로 토요일 법회에 나갔다. 학력고사에서 예상보다 좀 더 높은 점수를 받았다. 고3임에도 열심히 법회에 나간 덕분이 아닐까. 점수는 전국 명문 대학들의 웬만한 학과는 다 갈 수 있을 정도였다.

*1986년 에스페란토 원불교안내서 발행 기념

이맘때인 1981년 2월 16일자 〈원불교 신문〉(당시 원불교신보)에 교리를 에스페란토로 번역해 해외교화에 기여하고 있다는 종로교당 청년회의 활동 기사를 읽었다. 무슨 마력에 끌린 듯 '에스페란토'와 '종로교당'이 뇌리에 각인되었다. 서울에 가면 종로교당을 다녀 에스페란토를 배워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결국 이 기사는 장차 고등고시에 합격해 국가와 사회에 기여해보겠다는 큰 꿈을 안고 서울로 향한 지방 청년을 전혀 엉뚱한 인생길로 안내하고 말았다. 종로교당에 다니자마자 에스페란토에 입문했다. 고시 공부에 치우친 단조로운 대학 생활에 에스페란토 학습과 청년회 활동은 좋은 활력소가 되었다. 세상 사람들을 분열시키는 원인이 언어와 종교라는 인식의 토대 하에 공통 언어로 그 분열과 분쟁을 없애고 인류가 한 가족임을 확신시키고 나아가 모든 민족 간 상호이해와 세계평화를 이루기 위해 에스페란토를 세상에 내놓은 자멘호프 박사의 숭고한 뜻에 고개가 절로 숙여졌다. 이러한 언어로 새 시대 주세성자인 소태산 대종사의 가르침을 세계만방에 널리 전하는 데 기여해야겠다는 뜻을 세웠다. 고시를 준비하는 가운데에서도 거의 모든 에스페란토 합숙에 참가해 언어능력을 향상시켰고 또한 외국인들과의 서신교환을 통해 에스페란토와 호흡을 같이 해왔다. 신앙생활에도 추호도 갈등이 없었다. 종로교당 청년회를 다니면서 김이현·이광정·김법종·이혜정 교무님을 맞이했다.

* 출처: 원불교신문 http://www.won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118322

* 교화자의 삶 5 - 교서 번역은 내 신앙이요 수행

* 교화자의 삶 4 - 에스페란토, 교서 번역 매개 언어 역할 톡톡히

* 교화자의 삶 3 - 7대 교서 에스페란토 번역에 30년 세월 ②

* 교화자의 삶 2 - 7대 교서 에스페란토 번역에 30년 세월 ①

* 교화자의 삶 1 - 일생 일로( 一路) 이끈 신문 기사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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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차 에스페란토 세계대회

참 나를 찾는 수행공부 하고 싶어


102차 에스페란토 세계대회에 참석한 최요가일래(15·법명 원실) 교도는 한국인 아버지와 리투아니아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현재 리투아니아 빌뉴스(Vilnius)에서 살고 있다. 그의 아버지는 에스페란토 <원불교전서>를 정역한 최보광 원무로 가족들은 모두 알뜰한 교도다.

원불교 국제선방에 두 번째로 참석하게 된 그는 "국제선방 프로그램 중에서 가장 좋았던 것이 명상시간이었다. 처음 좌선을 해보게 됐는데, 오직 나를 찾아가는 시간이었고, 바깥의 경계에서 나를 자유롭게 할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고 명상에 대한 감상을 전했다. 

이어 그는 "이 프로그램에 참여하면서 내가 바라는 것은 참 나를 깊이 찾아가 보는 것이다. 그 동안에는 명상이라는 경험을 해보지 못했는데, 이번에 기회가 됐을 때 깊은 수행을 해보고 싶다"며 "명상은 내 마음을 편하게 해주고 나를 착한 사람으로 만들어 주는 것 같다. 세상에 좋은 사람으로 살아가고 싶다"고 말했다.

에스페란토를 배우게 된 계기에 대해 그는 "부모님들이 에스페란토로 만나게 돼 어릴 때부터 자연스럽게 에스페란토를 익혔다"며 "에스페란토뿐 아니라 어릴 때부터 한국어를 아버지에게 배웠고, 리투아니아어를 어머니에게 배웠다. 아버지와는 한국어 외에는 다른 언어를 사용하지 않는다. 나는 내가 한국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한국이 내 나라라고 생각한다"고 설명했다.

그는 이번 에스페란토 세계대회 축제 무대에서 한국 노래 '세월이 가면'을 불렀다. 세계대회에서 에스페란토 언어배우기와 한국문화와 세계문화체험 시간 등 참여 프로그램에서 주로 활동을 하게 됐다. 그는 "한국에서 많은 친구들을 만나게 돼 좋았다. 한국말을 더 배울 수 있는 기회가 됐고, 아빠의 고향땅을 다닐 수 있어서 행복했다"고 전했다.

* 원불교 신문 유원경 기자 - 2017년 월 11일

* 출처: http://www.won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118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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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브랜드위원회 블로그에서는 국가브랜드에 대한 공감대를 높이기 위해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 또는 일반 국민들이 바라본 국가브랜드의 모습을 담는 참여공간을 운영합니다. 이들이 이야기 하는 국가브랜드 이야기, 함께 공감해보실까요? ^^


[108편] 다문화 가정의 언어 교육, 이렇게 한번 해보세요~ – 초유스



금요일 학교 수업을 마친 딸아이 요가일래는 친구 집에 놀러 갔습니다. 마침 그 근처에 있는 은행에 볼일을 본 후, 딸아이를 만나 함께 집으로 돌아왔죠. 만나자마자 딸아이는 가방에서 공책을 꺼냅니다.



“아빠, 이 공책 친구 동생이 선물을 줬어.”

“왜?”

“여기 봐. 한글이 있잖아. 하무타로.”

“그런데 하무타로가 무슨 뜻이지? 혹시 햄토리가 아닐까?”

“집에 가서 한번 확인해보자.”


공책의 뒷면을 살펴보니 인도네시아에서 제작된 공책이었습니다. 일본어로 햄토리가 일본어 철자가 아니라 왜 한글로 써져 있을까 궁금했지만, 딸아이가 이를 한글로 알아보고, 또한 이 한글 덕분에 공책까지 선물로 받게 된 것에 보람을 느꼈습니다. 이는 딸아이 잉태부터 지금까지 한국어만 사용한 결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특히 교실에서 유일하게 딸아이만 한국어를 말할 수 있다는 것에 대해 커다란 자긍심을 가지고 있죠.


우리는 한국이 아니라, 유럽 리투아니아에 살고 있는 다문화가정입니다. 아내는 리투아니아인이고, 딸아이는 현재 초등학교 5학년생이죠. 우리 가족에 대해 사람들이 가장 궁금해 하는 사항 중 하나는 바로 자녀의 언어입니다. 보통 우리 집을 방문하는 한국 손님들은 딸아이에게 무슨 언어로 말을 걸어야 할지 머뭇거리게 됩니다. 영어로 “한국어 할 줄 아니?”라고 물으면 딸아이는 “편하게 한국어로 하세요.”라고 답하는데요. 대부분의 사람들은 깜짝 놀라는 모습을 보여주죠.




이런 원칙으로 5개 언어 구사


외국에 사는 다문화 가정 자녀에게 한국어를 가르치는 일은 쉽지가 않습니다. 다행히 딸아이는 구사 능력에 차이가 있지만 5개 언어(리투아니아어, 한국어, 영어, 러시아어, 에스페란토)를 말할 수 있습니다. 아내와는 한국어도, 영어도, 리투아니아어도 아닌 에스페란토로 만났어요. 우리 부부의 일상 언어는 에스페란토입니다. 이런 언어 환경 속에서 딸아이가 5개 언어를 말할 수 있게 된 것은 아래와 같은 원칙에 충실했기 때문입니다.



모태부터 지금까지 아빠는 무조건 한국어로만 말한다. 만 1세경부터 한국어 비디오테이프를 그냥 틀어놓았다. 자연스럽게 보도록 하기 위해서다. 만 3세경부터 한국어 인터넷 학습 사이트를 초등학교 1학년 때까지 활용했다.


모태부터 지금까지 엄마는 무조건 리투아니아로만 말한다(철칙: 부모 중 어느 한 쪽이 절대로 두 언어를 섞어서 말하지 말 것. 즉 아빠가 한국어를 사용하기도 하고 리투아니아어도 사용하다 보면 아이는 자기가 더 편하다고 느끼는 언어만을 쉽게 사용하게 됨. 혹은 한 문장에 두 언어를 섞어서 사용하는 경우도 생김).


소련으로부터 독립한 후 리투아니아에는 탈러시아 정책으로 영어가 러시아어를 대체하고 있다. 하지만 가까운 장래에 러시아어가 다시 중요한 언어로 부각될 것이라 생각해 러시아어 어린이집에 3년을 다니도록 했다.


영어 만화 채널을 아주 어렸을 때부터 자유롭게 보도록 했다. 어린이집에 갔다 오면 잘 때까지 거의 영어 채널만 틀어놓는다. 영어가 자연스럽게 노출되면서 아이가 자연스럽게 익히도록 했다. 이 습관으로 지금도 딸아이는 영어 채널을 즐겨본다.


부모는 항상 에스페란토를 사용한다. 아이는 부모 대화를 들으면서 자연스럽게 이 언어를 습득한다.



아이에게 전해주는 가장 쉽고도 값진 선물은 자신의 모국어


현재 한국에도 다문화 가정이 꾸준히 늘고 있고, 한국인이 다문화 가정을 이루어 해외에서 사는 사람들도 과거보다 훨씬 많아지고 있는 추세입니다. 어디든 다문화 가정이 안고 있는 어려움 중 하나가 바로 외국인 배우자와 자녀의 언어 문제인데요. 아이가 자라면 가르치거나 배울 수 있다고 미루지 말고, 아예 모태부터 한국어만으로 대화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입니다. 그렇게 되면 아이의 모국어는 현지어와 한국어 2개가 됩니다.



예를 들어 엄마가 베트남이고 한국에 산다면, 엄마는 늘 아이에게 베트남어로 말함으로써 자신의 모국어를 잊어버리지 않고, 또한 아이가 자라서 엄마의 부모나 친척들과 대화를 할 수 있게 하는 것이죠. 이런 가운데 아빠도 조금씩 베트남어를 배워갈 수 있습니다. 한국에 산다고 한국어만 아이에게 전하지 말고, 외국인 배우자의 언어도 존중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이 글을 쓰고 있는데 "초유스의 동유럽" 블로그에 한국어가 별로 이득이 없는 불어권에 사는 한 분이 조언을 구해왔습니다. 그는 곧 태어날 아이의 언어 교육을 고민하고 있었는데요. 다음과 같은 조언을 했습니다.


저는 부모가 자녀에게 주는 가장 쉽고도 값진 선물은 바로 언어(모국어)라고 생각합니다. 그 선물이 많으면 많을수록 좋겠지만, 실속도 있어야 하죠. 특히 서양 언어권에 사는 사람이 동양 언어 하나쯤 말할 수 있다면(꼭 경제적인 것만이 아니라), 그 이득은 참으로 많을 것입니다. 부부간 언어는 혼용해도 되지만, 적어도 아이에게는 혼용하지 마시고 쭉 한 언어만 사용하면 좋은 결과를 얻을 것입니다. 특히 한국에 있는 부모님이 손자나 손녀가 한국에서 사는 아이처럼 한국말을 한다면 정말 기쁘고 자랑스러워할 것이에요. 먼 훗날 아이는 한국어를 모국어로 가르쳐준 엄마에게 감사하리라 믿습니다. 우리 가정의 언어 교육 예가 다문화 가정을 이루는 사람들에게 좋은 참고가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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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 시계 방향으로 리투아니아의 전통 현악기 캉클레이를 연주하는 악사, 캉클레이 축제에 참여한 어린이들과 한국예술단의 민속놀이 행진
                                            

EU(유럽연합)의 강소국이자 자연이 아름다운 나라 리투아니아의 봄은 공원이나 학교, 숲의 나무들에 새집들을 달아주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봄이 되면 남쪽에서 날아오는 새들을 보호하기 위해 ‘새들의 날’을 정해 철새들이 자신들의 고향으로 다시 돌아오는 날을 기념하고 있다.


그날은 3월 10일. 올해도 국민들은 혹시나 꽃샘추위가 닥쳐 찾아온 철새들이 번식하는데 지장이 있을까 염려하면서 새 새집들을 만들어 나무에 매달아 주며 안전하고 편하게 둥지를 틀고 알을 낳게 배려했다. 또 이 즈음부터 달아두었던 헌 새집들을 찾아보고 부서지거나 너무 낡은 것을 보수해주기도 한다.

이렇게 자연을 사랑하는 국민들이 사는 나라 리투아니아이지만 아직 한국에는 그렇게 잘 알려진 곳이 아니다.

새 새집을 달아주는 봄맞이 행사

발트해의 동쪽에 접해 있는 리투아니아는 1009년 처음으로 유럽 역사 연대기에 등장했다. 14세기 말 발트해에서 흑해에 이르는 넓은 영토를 차지해 유럽에서 가장 큰 나라가 되기도 했지만, 1795년 러시아·프러시아·오스트리아가 주도한 3국 분할 때 러시아와 프러시아에 점령된 후 세계지도에서 잠시 사라지기도 했다. 그러다가 1918년 독립하지만, 다시 2차 대전을 계기로 1940년 소련에 편입돼 반세기 동안 지배를 받는 불운을 겪는다.

1990년 재독립을 선언하고, 1991년 유엔과 2004년 EU 회원국으로 가입했다. 발트해 연안 3국 중 가장 큰 나라지만 면적은 6만5천 평방킬로미터로 한반도 면적의 1/3보다 조금 작고 인구는 340만 명이다.

국토 대부분이 평야와 구릉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숲과 강, 호수들로 이루어져 무척 아름답다. 특히 0.5헥타르 이상의 면적을 지닌 호수가 2천830개로, 호수의 나라로 불린다.

손에 닿을 듯한 뭉게구름이 떠있는 파란 하늘과 그 아래 펼쳐진 푸른 초원 그리고 작은 언덕 위의 집들은 이곳에서는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다. 기후는 해양성과 대륙성이 혼합돼 한국에 비해 겨울은 좀 더 춥고, 여름은 훨씬 덜 더운 편이다.

수도 빌뉴스는 1989년 프랑스 국립지리연구소의 발표에 의하면 지리적으로 유럽 대륙의 정 중앙에 위치해 있다. 인구는 55만 명, 리투아니아인, 폴란드인, 러시아인, 벨로루시인 등이 사는 다민족 도시다.

1323년 게디미나스 대공에 의해 수도로 정해졌는데, 수세기 동안 동과 서를 잇는 교차점에 위치한 빌뉴스는 전쟁, 점령, 파괴에도 불구하고 비교적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1991년 독립한 후 문화유산을 복원하는 한편 마천루를 세워 고대와 현대가 조화된 도시로 변모를 거듭하고 있다.


                      
고대와 현대가 조화된 도시

빌뉴스 구시가지 359헥타르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될 만큼 고풍스럽고 아름답다. 1천500여 개 건물이 거리와 골목길, 뜰로 연결돼 있는데, 동유럽에서 가장 큰 규모로 알려졌다.


나폴레옹이 호주머니에 넣어 가져가고 싶다고 한 후기 고딕 건축의 걸작인 ‘안나 성당’을 비롯해 성지순례지로 손꼽히는 르네상스식 ‘새벽의 문’, 내부 장식이 아름답기로 유명한 ‘베드로-파울로 성당’, 고딕·르네상스·고전 양식 등이 조화를 이룬 ‘빌뉴스 대학교’ 등 볼거리가 즐비하다.

3월이면 이런 아름다운 고건물에 쌓인 하얀 눈이 녹고, 고드름이 떨어지고, 어김없이 봄이 찾아온다. 봄이 오면 맨 먼저 숲 속에 새집을 달아 준 국민들은 다음엔 극장으로 몰려간다. 3월 말~4월 초 2주간 ‘키노 파바사리스(영화의 봄)’라는 국제영화제가 열리기 때문이다.

1996년부터 매년 열리는 이 영화제는 관객들에게 예술적으로 높이 평가된 비상업적 영화를 볼 수 있는 기회를 주고, 유명 국제영화제에서 상을 받은 영화 중 논란을 일으킨 영화를 일반인들에게 소개하고자 마련됐다. 현지 언론, 영화비평가들 사이에 좋은 평판을 받고 있는 이 영화제는 해마다 양적·질적 성장을 꾀하고 있다. 올해는 총 61편 영화가 초청됐고, 한국 영화 ‘친절한 금자씨’도 상영돼 호평을 받았다.

빌뉴스의 봄은 ‘스캄바, 스캄바 캉클레이(캉클레이가 울리고 울린다)’ 민속축제로 절정에 이른다. 캉클레이는 리투아니아의 대표적인 민속 현악기다. 노란 민들레꽃이 푸른 풀밭을 빽빽이 수놓고, 하얀 너도밤나무꽃과 보라색 라일락꽃이 사방에서 향내를 풍기는 5월 하순에 열리는 이 축제는 1973년부터 시작돼 매년 열리는 중요한 문화행사다.

봄의 절정 5월 현악기 민속축제

많은 리투아니아의 전통 예술단뿐만 아니라 외국 단체들도 참가해 다양한 민속공연을 펼친다. 행사 내내 빌뉴스 구시가지의 고풍스럽고 아담한 뜰 곳곳에서는 노래와 춤이 끊이지 않는다.

아직 한국에서 리투아니아로 오는 직항노선이 없다. 대한항공의 직항 취항지인 프라하, 상트페테르부르크, 모스크바 등지를 경유해서 들어올 수 있는데, 관광이 목적이라면 발트 3국의 다른 나라인 라트비아의 리가, 에스토니아의 탈린을 함께 묶어서 하는 것이 좋다.

리투아니아에 오면 수도 빌뉴스를 비롯해 호수 위에 떠있는 듯한 트라카이성, 소련시대 조각상을 모아 놓은 그루타스공원, 유럽의 지리적 중앙에 위치한 유럽공원, 제2의 도시 카우나스, 모래 언덕으로 유명한 니다, 여름철의 수도 팔랑가 등을 꼭 보기 바란다. 
             
<최대석 / 한겨레21 빌뉴스 전문위원>
▶서울~프라하 대한항공 주 4회(월·화·목·토) 운항(11시간 25분 소요)
▶프라하~빌뉴스 체코항공 매일 운항(1시간 40분 소요)

* 이 기사는 대한항공 스카이뉴스 제181호 5월 6일에 거재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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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일 리투아니의 수도 빌뉴스 음악축제 등장 
글/사진 최대석 기자


▲ 청중의 환호에 답례하는 지휘자와 사라  

유럽 대륙의 지리적 중심에 위치한 리투아니의 수도 빌뉴스는 1997년부터 매년 5월말부터 6월말까지 빌뉴스 축제를 개최하고 있다. 짧은 역사임에도 불구하고 국제적으로 명성을 얻어가고 있는 이 축제는 국제음악축제다. 리투아니아와 외국의 저명한 음악인들이 참가해 수준 높은 연주로 애호가들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있다. 올해는 모두 11개의 연주회가 마련되었다. 

지난 6월 11일 빌뉴스 필하모니 음악당에는 자랑스러운 한국인 바이올린 연주자가 등장했다. 바로 천재 바이올리니스트 사라 장(한국명 장영주)이었다. 8살에 세계무대에 데뷔를 하고, 14살 전에 베를린 필하모니, 빈 필하모니, 뉴욕 필하모니 등 세계 3대 오케스트라와 협연한 신동으로 불리면서 세계 음악계에 돌풍을 일으킨 소녀 사라가 아닌가. 어느덧 스물다섯 살의 어엿한 성인된 모습과 연주를, 리투아니아에서 처음으로 접할 수 있게 되어 한국인 교민들의 마음도 사뭇 들떠 있었다. 

이날 사라는 리투아니아 젊은 세대의 지휘자 중 선두주자인 로베르타스 쉐르베니카스 지휘로 리투아니아 국립 심포니 오케스트라와 협주를 했다. 1940년에 창설된 리투아니아 국립 심포니 오케스트라는 동유럽 최강의 심포니 오케스트라 중 하나이다. 사라가 연주한 곡은 20세기 신고전주의의 대표적 인물인 세르게이 프로코피예프의 바이올린과 오케스트라 협주곡 1번 D 장조 작품 19였다. 


▲ 밝은 미소로 한인들을 반기는 사라

크지 않은 체구에 여전히 앳된 소녀의 얼굴을 한 사라가 뿜어내는 거인의 소리는 절로 감탄을 자아냈다. 격정적인 연주로 끊어진 현을 이따금 강렬하게 뽑아내는 모습과 하얀 치마 속에서 종종 재빠르게 발길질을 모습에서도 그의 격렬한 표현을 느낄 수 있었다. 연주장을 가득 메운 청중들의 넋은 그가 이끄는 곡의 세계로 빠져 들어갔다. 

연주가 끝나자 요란한 기립박수 대신 청중들은 오랫동안 하나같이 리듬 있는 우레와 같은 박수소리와 함께 발을 쿵쿵 구르면서 젊은 거장의 연주에 열광적으로 답례했다. 앙코르 연주 이후에도 청중들의 박수는 다섯 번이나 그를 무대 중앙으로 다시 서게끔 했다. 


▲ 일일히 사인을 해주는 모습에 모두들 흐뭇해 했다.  

무대 뒤 솔리스트 대기실로 한인들 10여명이 찾아가자, 사라는 연주 때의 격렬한 인상과는 달리 아주 친절하고 밝은 표정으로 반갑게 맞이하고 일일이 사인을 해줘 모두들 흐뭇했다. 사라는 "유럽 순회연주의 일정으로 빌뉴스에 처음 오게 되었는데 이곳에서도 한인들을 보니 너무 기뻐요"라고 말하면서 베를린 연주를 위해 부리나케 떠났다. 천재 소녀에서 어엿한 여인으로 성장한 사라의 경이로운 연주는 리투아니아의 애호가들에게 오래 남을 것이다.  

* 오마이뉴스에 게재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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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대석 / 자유기고가 ·에스페란토번역가 ds@chojus.com 

바르샤바 중심가에서 남쪽으로 16킬로미터 떨어진 피아세츠노(Piaseczno)라는 작은 도시에 지난 10년간 아주 친하게 지내온 한 가족이 살고 있다. 62세인 남편(Wieslaw Jedrzejczak)은 폴란드인으로 광고회사에서 근무하다 몇 해 전에 퇴직을 하였고, 같은 나이인 부인(김순애)은 수대에 걸쳐 러시아에서 살아온 한국인으로 현재 프랑스 전자회사인 톰손(Thomson)사에 근무하고 있고, 68년생인 아들(Radoslaw, 한국이름은 동일: 東一)은 바르샤바공과대학교를 졸업하였고 전력설계회사에 다니고 있다.

부인은 1955년 폴란드로 유학을 와서 대학교에서 화학을 전공하였고, 대학교 동창생인 현 남편과 결혼을 하여 이곳에서 45년간 살고 있다. 방이 두 개인 10평 남짓 되는 아파트에 들어서면 복도의 나무벽에는 각국에서 방문한 친구들의 자필서명이 눈에 뛴다. 큰방에 들어가면 앞벽과 뒷벽을 가득 메운 책들이 인상적이다. 좁은 아들방에 들어서면 오른쪽 벽에는 한국에서 가져온 하회탈들이 줄줄이 걸려 있고, 왼쪽 벽 거의 전체는 열쇠고리들이 모래알처럼 빽빽이 걸려 있다. 

일반적으로 폴란드 사람은 하루 8시간 근로를 하고, 주 5일 근무를 한다. 직업에 따라 차이는 있지만 7시에 일을 시작하여 오후 3시에 일을 끝낸다. 따로 점심시간이 없고 11시경에 집에서 준비해 간 샌드위치로 요기를 한다.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 따뜻한 음식으로 점심식사를 푸짐하게 하고 저녁 8시경에 간단한 저녁식사를 한다. 토요일은 집청소, 세탁 등 집안일을 주로 한다. 일요일은 종교인이든 비종교인이든 집안일조차도 하지 않고 푹 쉰다. 여름시간이 적용되는 봄이나 여름에는 해가 길어 평일 오후나 주말에는 가족단위로 인근 공원이나, 호수, 숲속 등으로 나들이 가는 사람들이 많다.

일찍 퇴직한 남편은 5월부터 9월까지 거의 매일 아파트에서 4킬로미터 떨어진 텃밭(우리나라의 주말농장)에서 채소를 가꾸면서 시간을 보낸다. 주로 도시 아파트에 사는 사람들이 이 텃밭을 활용하고 있다. 이 한 개인이 차지하는 텃밭의 크기는 지역에 따라 다소 차이가 있지만 일반적으로 300평방미터(약 90평)이다. 이 텃밭은 집단적으로 도시의 외곽지대나 녹지대에 군데군데 조성되어 있다. 대부분 사람들은 이 텃밭에 조그마한 여름별장을 지어 놓고 있다. 이곳에 자두나무, 벚나무, 사과나무, 배나무, 호도나무 등을 심어 놓고, 감자, 양파, 마늘, 사탕무우, 오이, 토마토, 딸기, 상치 등을 가꾼다. 이 텃밭은 싱싱한 무공해 채소를 자급하는 데 큰 역할을 한다. 남편은 이외에도 중앙아시아와 한국에서 보내온 고추씨, 무우씨, 오이씨, 배추씨를 더 심는다. 특히 이곳에 심은 한국 오이는 달고 물이 많아 아주 맛있다고 한다. 

이 댁의 집안일은 세 사람이 분담한다. 아침식사 후 설거지는 남편이 하고, 점심식사 후 설거지는 아들이 하고, 저녁식사후 설거지는 부인이 한다. 주중 식사준비는 부인이 주로 하고, 주말에는 아들이 주로 한다. 집안청소는 아들이 도맡아 하고, 세탁은 남편이 하고, 다듬이질은 부인이 한다. 쓰레기는 아들이 늘 버린다. 또 다른 집에서는 자기가 먹은 식기는 자기가 씻는 것을 보았다. 이처럼 집안일을 어느 누구에게 일방적으로 부담하는 것이 아니라, 식구 모두가 나누어 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들은 식당에서 외식을 하는 일은 거의 없다. 친척이나 친구들이 모이더라도 집으로 초청을 하여 식사를 한다. 외식을 할 정도로 소득수준이 높지 않고, 또한 식당의 음식값이 집에서 하는 것보다도 몇 배로 비싸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초청을 받아 가면 자기가 마실 술이나 음료수는 가지고 가져가는 것이 상례이다. 친구들과 어울러 맥주집에 가더라도 술값 때문에 의리가 상하는 일도 없다. 왜냐하면 자기가 먹을 술은 자기가 사기 때문이다. 안주도 시킬 필요가 없다. 음식도 자기가 먹은 것은 자기가 낸다. 

이 세 식구는 모두 제각기 취미를 가지고 있다. 남편은 독서가 취미이다. 특히 역사, 정치, 인문지리 등에 관한 많은 책을 읽는다. 하루 평균 겨울철에는 6시간, 여름철에는 밭에서 채소를 가꾸면서 3시간 정도 독서를 한다. 부인은 우표를 수집한다. 어느 날 1965년부터 폴란드에서 발행하는 모든 우표를 수집한 다섯 권의 책을 나에게 보여주면서 폴란드우편사를 강의했다. 아들은 어릴 때부터 각종 열쇠고리를 모아왔다. 지금까지 수집한 세계 각국의 열쇠고리는 약 1400개이다. 평범한 열쇠고리부터 기발한 열쇠고리들이 수없이 많다.

이 댁뿐만 아니라, 이곳 사람들은 가족 구성원간 대화가 많다. 어릴 때 엄하신 아버지의 묻는 말에만 대답을 하던 나의 경험과 비교하면 정말 천양지차다. 이곳에서는 아들과 아버지는 거의 친구처럼 지낸다. 이들의 언어에 경어가 없는 것이 수평적 대화를 활성시키는 한 요인이 아닐까 생각한다. 이들은 대체로 말이 많은 편이다. 때로는 이들의 말많음이 나에게 도움이 되기도 한다. 무슨 일에 대해 물으면 상세하게 일러주기 때문이다.

한 평범한 가족의 사는 모습을 보면서 가장 느끼는 것은 우리처럼 버둥거리며 살지 않고 주어진 생활여건 속에서 여유를 가지면서 살아간다는 것이다. 조그마한 아파트이지만 더 큰 아파트를 이사가려고 악착같이 구두쇠로 살기보다는 한 달에 걸치는 여름휴가 때에는 휴양지에서 일광욕, 산림욕, 해수욕 등을 즐기면서 시간을 보낸다. 주말이면 가족들과 공원이나 숲속에서 산책을 하고, 혹은 텃밭에서 채소를 가꾼다. 음악회나 전시회에도 자주 간다. 이 덕분에 나는 한국에서는 보기 어려운 오페라를 여러 편 관람하였다. 지금은 공산주의체제가 무너지고 시장경제체제가 도입된 후 살아가는 방식도 점점 달라지고 있다. 

* 해피데이스 1999년 6월호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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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투아니아 새해 풍습 

새로운 한 해가 시작되는 첫날인 설날은 한민족의 최대명절이다. 설빔을 입고, 차례를 지내고, 세배를 하고, 덕담을 나누고, 떡국으로 세찬을 먹고, 윷놀이 등을 한다. 하루 종일 좋은 말을 많이 하고 들으면 일년 내내 그러하고, 좋은 음식을 배부르게 먹으면 일년 내내 배부르다고 한다. 

리투아니아의 설날 풍습은 어떠할까. 오늘날 새해 첫날은 양력 1월 1일이지만, 이는 19세기경 서유럽에서 도입되었다. 고대 리투아니아인들은 설날을 어느 특정한 일로 정하지 않고 한 해 농사 준비를 시작하는 시기와 동일시했다. 

지난 수세기 동안 리투아니아인들은 12월 24일에서 1월 6일 사이 새해 축제를 지냈다. 특히 성탄절 전야는 연중 밤이 가장 긴 날 중 하나이고, 성탄절은 지난해 끝이자 새해 시작을 의미하기도 했다. 

그래서인지 리투아니아인들에게 설날 풍습은 성탄절 풍습을 다시 반복하는 정도이다. 그믐날이 '작은 성탄절 전야'로 불려진다. 이날 옛 사람들은 잠을 자지 않고 새해를 기다리면서 다양한 점술과 놀이를 했다. 이들은 새해를 맞는 중요한 때를 잠으로 놓친다면 다가오는 일년 내내 게으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믐날과 설날의 최대 관심사는 미래를 알아보는 것이다. 처녀들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물음은 새해에 시집갈지, 누가 애인이나 남편이 될지 등이었다. 총각들 또한 가정을 이루는 일로 골몰했다. 어떤 처녀가 그에게 사랑에 빠질지, 착하고 아름답고 근면하고 부유한 아내를 얻을지 궁금하기 그지없었다. 

장년들은 수확은 풍성할지, 가축은 잘 자랄지, 폭우·폭풍·뇌우가 있을지 등을 알고 싶어했다. 노인들은 이 세상에서 일년을 더 살 수 있을지, 건강은 어떠할지 등에 많은 관심을 가졌다. 이를 위해 여러 가지 점술과 놀이가 행해졌다.

그믐날 물이 담긴 컵에 약간의 재를 넣고 휘젓고 난 후 컵 바닥에 남자 얼굴이 나타나는 지 살펴본다. 만약 나타나면 새해에 시집간다. 자정에 혼자 촛불 12개를 켜고 거울 앞에 앉아 거울을 응시한다. 남자 얼굴이 나타나면 시집간다. 머리를 문 쪽으로 하고 방바닥에 등으로 눕는다. 발을 위로 올리고 신발을 머리 너머로 던진다. 이때 신발 앞이 문 쪽을 보고 있으며 시집간다. 열매를 한 줌 집는다. 열매 수가 홀수이면 시집간다. 

그믐날 밤에 빗이나 자물쇠를 베개 밑에 놓는다. 꿈속에서 머리를 빗겨주거나 문을 여는 남자가 남편이 된다. 종이 12장에 각각 다른 남자 이름을 적고 열 세 번 째 종이는 백지로 놓아둔다. 이 종이들을 섞어 베개 밑에 놓는다. 설날 아침에 일어나 종이 한 장을 꺼내 햇빛으로 읽는다. 종이 적힌 이름의 남자에게 시집간다. 만약 백지이면 홀로 그 해를 보낸다.

젊은 남녀들이 탁자 주위에 모여 가운데 촛불을 밝힌다. 돌아가면서 남자 혹은 여자는 누가 그를 혹은 그녀를 사랑하는 지 묻고 조심스럽게 촛불을 불어 끈다. 이 때 모든 사람들은 가만히 앉아서 촛불 연기가 어느 쪽으로 흘러가는 지를 지켜본다. 연기 방향에 앉은 사람이 바로 질문자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연기가 곧 바로 위로 치솟으면 아무도 그 질문자를 사랑하고 있지 않다. 연기가 갑자기 아래쪽으로 방향을 틀면 방안에 있는 누군가 그 질문자를 미워하고 있다. 

또한 여러 가지 방법으로 운명을 점친다. 그믐날 사람들은 마른 나뭇가지를 눈 속에 꽂아놓는다. 설날 아침 자신의 나뭇가지가 넘어져 있으면, 그는 그 해 죽는다. 잠들기 전 소금을 침대 가장 가까이에 있는 탁자 위에 놓는다. 아침에 소금이 축축하면 그 해 죽고, 소금이 건조하면 계속 산다.

여러 물건을 탁자에 놓고 각각 접시로 덮어놓는다. 접시를 서로 섞어서 한 사람씩 순서대로 접시 하나를 열어본다. 물건마다 고유한 뜻이 담겨져 있다: 반지 - 결혼, 칼 - 사고, 연필 - 학업, 초 - 죽음, 호환 - 명예, 빵 - 만족, 새 - 사랑, 장난감 - 탄생, 열쇠 - 집. 자신이 선택한 물건이 새해 운세를 말한다. 


▲ 예년 같으면 늘상 있어야 할 눈이 오지 않고 있었다. 건데 바로 31일부터 계속 내리는 이 눈이 새해엔 풍년을 암시하려나? 게디미나스 성탑에서 바라본 빌뉴스 대성당 모습  
ⓒ2003 최대석 

날씨나 정황으로 새해의 운세를 예측한다. 설날 날씨가 맑으면 풍년이다. 몹시 추우면 부활절은 아주 따뜻하다. 아침에 온통 서리가 뜰에 앉으면, 좋은 해이다. 안개가 끼면, 전염병과 질병이 맹위를 떨쳐 사람들이 많이 죽는다. 함박눈이 내리면 젖소는 젖을 많이 낸다.

뜰에 까치가 많이 모여 지저귀면, 일년 내내 손님이 많고 행복하다. 첫 손님이 여성이면, 불운한 해이고, 남성이면 운이 좋은 해이다. 설날에 넘어지는 사람은 일년 내내 재수가 없다. 설날에 들은 첫 소식이 좋으면, 일년 내내 좋은 소식이 많다.

설날에 사람들은 서로 덕담을 나누었다. 총각들은 처녀들에게 새 베틀, 연인을 기원했고, 처녀들은 총각들에게 귀여운 여인, 보드카를 기원했다. 젊은이들은 선령(善靈), 악령(惡靈), 저승사자, 거지, 동물 모습 등을 한 옷을 입고 온 마을을 돌아다니며 마을 사람들에게 인사하고 풍작을 기원했다. 마을 사람들은 이들에게 음식물로 환대했고, 선물도 주었다. 

설날에 한 태도가 일년 내내 간다고 믿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다투거나 싸우지 않았고, 많이 웃으며 서로를 도와주었다. 부모들은 아이들에게 잔소리를 하거나 벌을 주지 않았고, 아이들은 착하게 행동했다. 부부는 서로의 앙금을 지우고 마음을 맞추기 위해 사과를 나누어 먹었다. 제마이티야 지방에서는 지난해의 잡귀들을 쫓기 위해 짚다발을 불태우기도 했다. 

오늘날 리투아니아인들은 옛 사람들이 진지하게 해오던 이러한 점술이나 놀이로 인생문제를 해결하고 미래를 예견하는 것을 실제로 믿지 않는다. 하지만 이러한 것을 통해 온 가족이 이웃이나 친구들과 함께 즐겁고 재미있는 시간을 보낼 수 있다. 요즈음 이러한 놀이 풍습마저도 점점 사라지고 있으며, 특히 많은 젊은이들은 그믐날 저녁부터 설날 아침까지 마음껏 먹고 마시고 춤을 추면서 보낸다. 

거울 속에서 미래 남편을 찾으려고 애쓰는 처녀의 간절한 모습, 마을 어른들을 찾아다니며 풍작을 기원하는 젊은이들의 예절 있는 모습, 앙금을 씻고 한 마음을 이루기 위해 사과를 나누어 먹던 부부의 정다운 모습 등을 이제 더 이상 찾아보기 힘들게 되어 아쉽기도 하다. 

* 이 기사는 오마이뉴스 2004년 1월 1일자로 이미 보도된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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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인 ‘지우네 스기하라’탄생 100주년을 기념하는 행사가 최근 리투아니아 수도 빌뉴스에 성대하게 열렸다. 스기하라는 제2차 세계대전 중 수천명의 유대인들에게 일본 통과사증을 발급해 이들의 목숨을 구했다. 수 많은 유대인들을 나치로부터 구해낸 독일인 산업가 오스카 쉰들러에 견주어 '일본의 쉰들러'로 알려진 스기하라는 1900년에 태어나 1986년에 사망했다. 쉰들러 부부의 유대인 구조활동은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이 '쉰들러 리스트'로 영화화해 오스카상을 수상하는 등 큰 인기를 끌었었다. 

[사진설명]-(위)기념식수를 하는 미망인 유키코 스기하라, 리투아니아 대통령 발다스 아담쿠스, 일본대사, 리투아니아 외무부장관(앞줄 왼쪽으로부터)
/ 빌뉴스 스기하라기념비와 갓 심어진 벚꽃나무 

지난 10월 2일 빌뉴스를 동서로 가르는 네리스강(江) '발타스 틸타스'(흰 다리라는 뜻) 부근 경관 좋은 언덕에 열린 이 행사에는 리투아니아 대통령 발다스 아담쿠스, 일본 대사 쇼헤이 나이토, 스기하라 미망인 유키코 스기하라(88세), 와세다대학교 관계자 등 200여명에 이르는 일본의 정치인과 예술인, 리투아니아의 정치인과 학생들이 참여했다. 이들은 리투아니아어, 일본어, 영어로 쓰여진 약력과 함께 스기하라 기념비를 제막했고, 그 주변에 100그루의 벚꽃나무를 심었다. 

"리투아니아와 일본에 있어 나무에 대한 존경은 인간애와 문명의 보편적 가치에 대한 존경처럼 지대하다. 리투아니아에 심어지는 이 일본 나무들의 뿌리는 두 나라 국민간 친선을 더욱 강화하는 데 도울 것이다"라고 아담쿠스 대통령은 축사를 하였고, "스기하라의 영웅적인 행동은 61년 전 유대인을 구했을 뿐만 아니라 리투아니아와 일본간 우호관계를 위한 토대를 마련해주었다"라고 나이토 대사는 말했다. 

이 벚꽃나무는 일본 북부지방에서 직접 가져온 것이었다. 원래 280그루가 도착할 예정이었으나, 동경에서 코펜하겐으로 운송되는 과정에서 나머지는 유실되었고, 108그루만 무사히 도착했다. 

스기하라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는 이 벚꽃나무는 스기하라 기념비 부근뿐만 아니라 그의 이름을 딴 거리, 그가 거주하며 근무했던 카우나스(리투아니아 제2의 도시, 당시 리투아니아 임시 수도) 옛 일본영사관 정원, 리투아니아 대통령궁 정원, 텔세이 일본정원 등에 심어졌다. 이로써 빌뉴스는 유럽에서 오스트리아 빈, 독일 베를린에 이어 일본 벚꽃나무 공원이 조성된 세 번째 도시가 되었다. 

기념식이 끝날 무렵 일본 학교와 자매결연을 맺은 리투아니아 학생들이 '행복의 새' 종이학이 달린 오색 풍선 100개를 가을 하늘로 날렸다. 이어 식수(植樹)를 마치자 하늘에는 유르기스 카이리스가 일본 음악에 맞춰 절묘하고도 환상적인 묘기 비행을 연출했다. 

그는 지난 해 일본에서 열린 세계묘기비행대회에서 우승을 해 일본인들에게 널리 알려진 인물. 빌뉴스 로투쉐(구시청건물)에는 일본에서 가져온 대형 아름다운 벚꽃사진들과 종이 접기 작품들이 전시되었고, 저녁에는 경축 폭죽이 터트려졌다. 

1939년 8월 나치독일과 소련이 상호불가침의 이름 아래 동유럽에서의 영향권 행사를 분명히 하기 위해 몰로토프-리벤트로프 조약(1939)을 체결했다. 그 해 9월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하자 독일의 영향권에 놓여 있던 리투아니아는 독일의 폴란드 공격에 참가하기를 거부했다. 이에 리투아니아는 소련의 영향권으로 편입되었고, 1940년 소련은 군대로 리투아니아를 점령하여 소비에트화를 시작했다. 

이 격변의 시기인 1939에서 1940년 스기하라는 리투아니아 일본영사관 부영사로 근무했다. 독일 나치의 대학살에 공포를 느낀 리투아니아, 폴란드 심지어 독일 출신 유대인들은 일본 영사관으로 몰려갔다. 그 당시 소련은 일본의 사증을 받으면 자국을 통과시키겠다고 했다. 

영사관 밖에서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어진 얼굴로 두려움에 떨며 기다리고 있는 수 많은 유대인들을 바라보면서 스기하라는 깊은 고민에 빠졌다. 본국 정부에 사증 발급 허가를 요청하는 전보를 쳤고, 독일과 동맹을 맺은 일본 정부는 사증을 발급하지 말라는 지시를 했다. 

하지만 스기하라는 이 훈령을 무시하고 양심의 소리에 따라 유대인들에게 약 6,000개의 통과사증을 발급했다. 이 스기하라의 '생명의 사증' 덕분에 많은 유대인들은 소련과 일본을 거쳐 제3국으로 안전하게 피난할 수 있었다. 

1941년 독일은 리투아니아를 침공해 1944년까지 리투아니아 총 유대인수의 95%인 약 25만명을 학살했다. 빌뉴스에서 남쪽으로 10km 떨어진 파네레이에서 나치는 1941-1944년에 약 10만명을 대량학살했고, 이 중 7만명이 유대인이었다. 이로써 유대인은 세계에서 가장 주목할만한 유대인 공동체 하나를 잃게 되었다. 

이후 리투아니아는 빌뉴스의 한 거리를 지우네 스기하라로 이름지었고, 그가 살았던 옛 일본영사관을 스기하라기념관으로 운영하고 있으며, 10월 2일에는 스기하라 기념우표를 발행하는 등 스기하라의 용감한 인도적인 행동에 깊은 감명과 경의를 표하고 있다. 

또한 그의 행동은 오늘날 리투아니아인들이 일본과 일본인에 대한 우호적인 태도를 갖는 데 큰 계기를 마련해주었다. 특히 올해는 일본이 소련으로부터의 리투아니아 독립을 인정하고 외교관계를 맺은 지 10년이 되는 해로 더욱 의미가 깊었다. 

1947년 일본으로 귀국한 그는 '훈령위반'으로 해임되었고, 오랫동안 그의 유대인 구원 행적은 일본 국민들 사이에선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다만 이것을 우익 단체들이 일본은 제2차 대전 때 유대인을 도왔다"며 자신들의 과거를 왜곡하는데 이용했다. 마침내 스기하라는 탄생 100주년을 맞아 지난 해 명예를 회복했다. 

일본 정부는 지난 해 10월 10일 그의 삶을 기리는 조촐한 기념식을 열었고, 도쿄 외교사료관에 스기하라씨의 공적을 기리는 현판을 세웠다. 전쟁이라는 극한 상황에서 국가와 민족에 관계없이 인간을 구한 스기하라의 용기 있는 인도적 행동은 오늘날 시대에도 소중한 귀감이 되어야 할 것이다. 

* 이 기사는 하니리포터 2001년 10월 25일자로 이미 보도된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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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4월 13일 제16대 국회의원 273명을 뽑은 선거에 지금까지도 우리나라는 선거사범수사가 종결을 짖지 못하고 야당의 편파수사와 여당의 공정수사가 대립을 하고 있다. 국회의원 40명이 재판결과에 따라 당선무효가 될 수 있다고 한다. 사상 최대 규모로 선거법위반자가 기소되었다. 열 여섯 번 국회의원 선거를 치렀지만, 아직도 공명선거가 자리잡지 못한 것이 바로 한국 선거문화의 현주소이다. 

지난 10월 8일 리투아니아에는 141명을 뽑는 제3대 국회의원 선거가 있었다. 총유권자 260만명 중 58.62%가 투표에 참가하였다. 1990년 소련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한 후 지금까지 리투아니아는 임기 4년인 국회의원 선거를 세 번 치렀다. 이번 선거에 선거법을 위반하여 검찰에 고소나 고발된 사건이 아직 없다. 겨우 세 번을 치른 리투아니아의 선거문화는 열 여섯 번을 치른 우리나라의 것보다 훨씬 앞서 있다. 

이번 선거에는 야당인 좌파 사회민주연대(민주노동당+사회노동당+신민주당+리투아니아·러시아연합)가 51석을 얻어 다수당이 되었다. 하지만 이 다수당의 기쁨은 일일천하로 끝나고 말았다. 바로 좌파세력의 집권을 막기 위해서 중도파 세력들이 연대를 구성하였기 때문이다. 

리투아니아에는 다수당이 국회와 행정부의 권력을 장악한다. 중도파 세력이 연대를 구성하자, 사회민주연대가 51석을 얻는 데 가장 큰 공헌을 한 전직 대통령 알기르다스 브라자우스카스는 백의종군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국회의원에 입후보자하지 않았고, 만약 사회민주연대가 집권할 경우 국무총리로 내정되어 있었다. 

지난 12일 자유연합(롤란다스 팍사스: 34석), 신연합(아르투라스 파울라우스카스: 29석), 중도연합(로무알다스 오졸라스: 3석), 그리고 현대기독민주연합(비타우타스 보구시스: 1석)이 연대 합의문에 서명을 하였고, 67석으로 집권세력이 되었다. 이들 네 개 정당은 지난 여름부터 선거 후 연대할 것을 구두로 합의하였다. 

신정치불럭으로 불리어지는 이들 연대세력은 무소속 출신인 현 대통령 발다스 아담쿠스로부터 비공식적 후원을 받고 있다. 비록 과반수 71석을 차지하지는 못했지만 이들은 국회의장(아르투라스 파울라우스카스)과 국무총리(롤란다스 팍사스) 자리를 차지하였다. 

하지만 이 신정치블럭의 전도(前途)는 그렇게 밝은 편은 아니다. 우선 안정의석수인 71석의 과반수를 아직 확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또한 연대한 각 정당의 정책이 여러 분야에서 일치하지 않기 때문이다. 바로 이 불일치하는 부분에서 어떻게 상호이해 속에 공통분모를 창출하느냐가 리투아니아 정국 안정에 큰 관건이 된다.

이번 선거에서 최연소 당선자는 26세이고, 최고령 당선자는 76세이다. 141명 중 15명이 여성의원으로 전체의 10.6%를 차지하고 있다. 지역구에서 6명, 정당비례제로 9명이 당선되었다. 좌파의원이 8명, 자유주의자가 3명, 사회주의자가 2명, 보수주의자가 2명이다. 제3대에는 지난 제2대 여성의원수 25명보다 10명이나 줄어들었다.

* 이 기사는 하니리포터 2000년 10월 27일자로 이미 보도된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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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투아니아는 이번 시드니 올림픽 중 있은 모든 남자 농구경기를 중계해주었다. 이는 흔히 농구를 '리투아니아 제2의 종교'라고 하는 말을 단적으로 증명해주는 것이었다. 허름하지만, 리투아니아 곳곳에 있는 농구대가 바로 오늘의 성공을 이끌었다. 리투아니아에는 축구공을 차는 아이들보다 농구공을 던지는 아이들을 훨씬 많이 볼 수 있다. 

시드니 올림픽에서 한국인에게 최고의 명승부로 여겨지는 경기는 승부타로 져 은메달에 딴 한국남자하키의 네덜란드와의 경기였다. 리투아니아인들에게는 바로 미국프로농구팀(NBA)의 콧대를 한층 낮게 해준 9월 29일 열린 농구경기였다. 

준준결승전에서 리투아니아는 오랜 숙적인 유고슬라비아를 76대63으로 이겼다. 이번 올림픽에서는 유고슬라비아를 이긴 것만으로도 리투아니아에게는 대성공이었다. 지금까지 국가간 시합에서 이겨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모두들 그동안 진 빚을 갚게 되어 기뻐하였다. 

특히 NBA에서 활동하고 있는 리투아니아 최고의 농구선수인 아르비다스 사보니스가 이번에 출전하지 않았기 때문에 리투아니아는 사실 이번 올림픽에 큰 기대를 하지 않았다. 더욱이 지난 애틀란트 올림픽에서 미국 드림팀에게 22점차로 패한 리투아니아였다. 

29일 준결승전에서 리투아니아는 다시 미국팀과 만났다. 예선에서 리투아니아는 미국과 시합에서 76대85로 9점차로 졌다. 리투아니아에게는 또 다른 기쁨을 가져다 주었다. 92년 바로셀로나 올림픽을 앞두고 출범한 후 연전연승을 거듭해온 NBA 드림팀은 그동안 늘 두 자리수 점수차로 승리하였기 때문이다. 이날 리투아니아의 목표는 미국을 이기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더라도 최고로 근소한 차이를 내는 것이었다. 

전반전 경기에는 리투아니아는 36대48로 졌다. 하지만 후반전에 들어와서는 승부를 예측할 수 없는 접전을 벌였다. 그리고 종료 몇 분전에는 미국을 이겨 기적을 낳을 수도 있다는 상황까지 도달하였다. 처음으로 리투아니아인들은 미국 감독이 마루바닥을 손을 치며 불안하던 모습을 지켜보기도 하였다. 

경기 종료 43초 전 자유투 3개 중 2개를 놓치지 않았더라면, 또한 경기 종료 부저와 함께 던진 3점슛이 빗나가지 않았더라면 리투아니아는 세계 농구의 새로운 제왕으로 등극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미국 드림팀의 자존심을 꺾어주길 바라는 사람들에게는 참으로 아쉬운 순간이었다. 

10월 1일 열린 3·4위전에 역사상 최초로 올림픽 메달을 노리며 홈그라운드의 이점을 지닌 호주팀을 리투아니아는 89대71로 가볍게 이겼다. 이로써 리투아니아 선수들은 세 번 연속 올림픽에서 동메달을 획득하였다. 

호주 선수와 경기를 종료한 후 승리감에 젖어 이번 시드니 올림픽에서 가장 큰 수훈을 세운 쌰루나스 야시케비츄스가 농구공을 자신의 유니폼 상의에 넣어 마치 임신부처럼 배를 불룩하게 하였다. 이는 최종 승리의 기쁨을 나타내는 리투아니아 농구팀의 하나의 관례이다. 

시상식에서 미국과 프랑스와 달리 리투아니아는 앞 선수의 양어깨에 손을 얹고 입장을 하였고, 또한 12명의 선수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시상대에 올랐다. 바로 이들의 일치 단결된 힘이 바로 이번 올림픽에서 좋은 성과를 올린 주원인이었다. 

이번 올림픽에서는 미국 드림팀보다 2점차로 진 리투아니아팀이 더 유명해졌다. 리투아니아는 다시 한번 농구 강국으로서의 위상을 확고히 했고, 또한 가까운 장래에 미국 NBA 드림팀을 이길 수 있는 팀으로 전세계 농구팬들에게 이미지를 심어주었고, 리투아니아인들에게는 가장 큰 국민적 자부심과 일체감을 심어주었다. 

이제 멀지 않은 장래에 한국 프로농구팀 중에서 리투아니아 출신 선수들이 활약한 때도 있을 것이라 여겨진다.

사진설명: 리투아니아 농구 잡지 '크렙쉬니스' 표지사진; 동메달을 획득한 후 농구공으로 임신한 채 기뻐하는 쌰루나스 야시케비츄스

* 이 기사는 하니리포터 2000년 10월 4일자로 이미 보도된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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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연합뉴스가 쓴 리투아니아 관련기사에서 이 리투아니아 수도 이름을 기자마다 제각각 표기하고 있다. 

리펑, 리투아니아 방문일정 단축 
......
(빌나<리투아니아> AFP=연합뉴스)...joon@yonhapnews.co.kr 

리투아니아 총선서 집권당 참패(종합) 
......
(빌뉴스 AFP.dpa=연합뉴스)...gija007@yonhapnews.co.kr 

리투아니아 총선서 집권당 참패 
......
(빌니우스<리투아니아> AFP=연합뉴스)... baraka@yonhapnews.co.kr 

우선 리투아니아라는 국명을 살펴보자. 세 기자 모두 리투아니아라고 표기하고 있다. 

이 한글 표현은 리투아니아의 영문명인 Lithuania에서 유래했다고 볼 수 있다. 리투아니아어로 리투아니아는 Lietuva이다. 끊어 읽으면 '리에투바'로 발음이 되지만, 리투아니아인들은 'ie'를 한 음절로 발음을 한다. 물론 '례투바'로 표기하는 것이 완벽하게 일치하지는 않지만 현지 발음에 제일 가깝다. 

하지만 례투바보다는 이미 리투아니아라는 표기가 한국 사회에 널리 사용되고 있으므로 그대로 사용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 

리투아니아의 수도는 리투아니아어로 Vilnius로 표기한다. 이 또한 리투아니아어를 모르면 십중팔구로 '빌니우스'로 표기할 것이다. '빌나'로 표기하는 것은 슬라브어 표기에서 유래한 것이다. 폴란드어로 Vilnius는 Wilno (빌노)이다. 리투아니아어는 'iu' 또한 한 음절로 취급한다. 그래서 '빌뉴스'로 표기하는 것이 현지 발음에 제일 가깝다. 

한글의 로마자 표기도 아직 많은 문제를 안고 있지만 외국어의 한글표기도 그 만큼 어렵다. 더욱이 우리들에겐 익숙하지 않는 나라의 말을 한글로 표기하는 데는 훨씬 더 어렵다. 

하지만 요즈음 인터넷 시대이니, 조금만 관심을 기울이면 해당 국가 어학연구소나 현지인 한국인의 도움을 받아 현지 발음에 가장 가까운 한글 표기를 할 수 있을 것이다. 

다른 사람이 자기 이름을 정확하게 불려주거나 표기해주면 좋듯이 우리도 남의 이름을 한글로 가능 한이면 정확하게 표기하는 데 노력해야 할 것이다. 공신력이 중요한 언론사들이 더욱 이 일에 앞장서야 할 것이다.

* 이 기사는 동아닷컴 e포터 2000년 11월 30일자로 이미 보도된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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