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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1.11.30 리투아니아 "말 달리자"
  2. 2011.11.29 어! 리투아니아도 대통령 탄핵
  3. 2011.11.29 리투아니아 "그리운 나폴레옹"

[월드리포트] 리투아니아 "말 달리자"

빙판 마차경주 부활 100주년... 국가적 축제로 자리매김

발트해 동쪽 연안에 접한 리투아니아는 한겨울 빙판 위에서 열리는 전통 마차경기로 유명하다. 리투아니아인들은 올 겨울 이 국가적 행사를 뜻깊게 맞이했다. 1795년 제정 러시아에 합병되면서 금지됐던 빙판 마차경기가 1905년 부활한 지 꼭 100년이 되기 때문이다. 



14~16세기 동유럽의 강국이었던 리투아니아는 제정 러시아의 지배를 거치면서 발트 3국 중 가장 낙후된 국가로 전락했다. 제정 러시아가 마차경기를 금지시킨 것도 리투아니아인의 민족의식을 말살하려는 의도에서였다. 그러나 탄압 속에서도 명맥이 이어져 1905년 부활됐고, 1955년부터는 국가 행사로 자리잡았다.


옛날에는 노동용 말을 이용해 경기를 했지만 근대에 와서는 경주용 말과 가볍게 제작된 이륜마차를 사용한다. 이 마차경기는 호수가 많고 눈이 많이 내리는 리투아니아 북동지방에서 널리 행해졌다. 특히 수도 빌뉴스에서 북쪽으로 150㎞ 떨어진 곳에 위치한 사르타이 호숫가 두세토스에서 열리는 마차경기가 제일 규모가 크다. 지난 2월 5일 이곳에서 100주년을 맞이한 마차경기가 수만 명이 모여든 가운데 성대하게 열렸다. 

퇴비 수레 끄는 특별경기도

한 여인을 차지하기 위해서 농부의 아들과 귀족의 아들이 사르타이 호수 얼음 위에서 마차 달리기를 한 데서 유래했다는 이 대회는 자주 얼음판 위에서 열렸지만, 1997년 경기장을 다듬던 중 트랙터가 얼음 속으로 빠진 이후 매년 호수 옆에 마련된 경마장에서 열리고 있다. 

행사장인 사르타이 호수에는 영하 15℃의 얼얼한 날씨인데도 이른 아침부터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호수 위에는 사람을 실어 나르는 썰매가 왕래하고, 종종걸음으로 행사장으로 가는 사람들의 행렬이 줄을 이었다. 한껏 들떠 있는 관중들의 열기 속에 고적대의 연주와 함께 말발굽 모양의 성화가 점화되었고, 지난해 우승자가 대회 깃발을 게양했다. 

엄청난 속도를 자랑하는 마차들, 드디어 박진감 넘치는 마차대회가 시작됐다. 경기는 이륜마차에 기수 한 사람이 올라타고 1600m를 달리는 방식으로, 차례마다 기록 순으로 각종 상과 상금을 받는다. 이번 대회에는 총 81마리가 출전해 자웅을 겨루었다. 100주년을 기념해 경주용 말이 아닌 퇴비를 담은 수레를 끌며 노동을 하는 말들이 참가한 특별경기도 마련됐다. 이날 나온 최고 기록은 2분4초6. 1937년부터 1600m 달리기가 도입된 후 초기의 3분10초대에서 이젠 2분10초 이내로 기록이 꾸준히 경신되어왔다. 

관람객들이 목에 굵은 건빵을 주렁주렁 매달고 심심하거나 배고플 때 하나씩 떼어먹는 광경이 이색적이었다. 경마도박을 하는 사람들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저 독한 보드카나 보온병 속에 들어 있는 따뜻한 꿀포도주 한잔 마시기 내기를 하는 사람들이 눈에 띄었다.

전통 마차경기는 끝났지만 축제는 이제부터 시작. 이날 인기상품이자, 이 지방 특산물인 따뜻한 꿀생맥주를 마시면서 사람들은 흥겨운 노래 속에 춤을 추며 즐거움을 만끽한다.

"...하얗게 털 덮인 말들이 바람처럼 달리고 달리니/하얗게 눈 덮인 호수가 동면에서 드디어 깨어나네...." 신나는 노랫말처럼 한바탕 전통 마차경기로 혹한을 잊고 서로의 결속을 다지면서 따뜻한 봄을 기다리는 리투아니아 사람들을 가까이 느낄 수 있는 하루였다.

빌뉴스(리투아니아)/최대석 통신원

뉴스메이커 613호 2005년 3월 1일 
Posted by 초유스

[월드리포트] 

리투아니아 빌뉴스/최대석〈자유기고가〉chtaesok@hanmail.net

공교롭게도 필자가 태어난 나라와 살고 있는 나라의 현직 대통령 모두 올해 임기가 만료되는 국회에 의해 역사상 최초로 탄핵소추를 받았다. 3월 12일부터 권한이 정지된 노무현 대통령은 집권 과정과 집권 후 모습에서 리투아니아의 롤란다스 팍사스 대통령과 유사점이 많다. 하지만 양국은 탄핵절차 등에서 큰 차이점을 보이고 있다. 

특별위원회가 한 달간 집중조사 
노 대통령은 2002년 12월 대선에서 이회창 후보를 48.9% 대 46.6%로 아슬아슬하게 이겼다. 팍사스 대통령은 2002년 12월 대선에서 35%를 얻은 발다스 아담쿠스에 이어 20%를 얻어 2위를 했지만, 결선투표에서 55%를 얻어 대통령에 당선됐다. 대부분의 정치인과 탈락한 후보자가 아담쿠스 현직 대통령을 지지해 그의 승리가 확실시된 상황에서 팍사스 당선은 이변이었다. 아담쿠스가 유럽연합과 나토 가입을 위해 정상외교로 동분서주하는 동안, 팍사스는 러시아인 유리 보리소프가 운영하는 항공회사 '아비아 발티카'로부터 거액의 선거자금을 받아 헬기를 타고 전국 도처를 누비면서 선거운동을 했다. 팍사스 대통령은 노 대통령보다 하루 뒤인 2003년 2월 26일 대통령에 취임했다. 

노 대통령은 정치적 배경이 없는 지방 평민 출신으로 50대의 젊은 나이에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그는 국민이 자신을 선택한 이유를 '개혁과 변화'로 인식하고, 개혁을 통해 '새로운 대한민국'을 만들겠다고 약속했다. 팍사스 대통령도 지방 평민 출신으로 47세 젊은 나이로 대통령에 당선됐다. 토목공학과 곡예비행을 전공한 그는 1997년 빌뉴스 시의원으로 정치활동을 시작해 국무총리를 역임했다. '질서와 변화'의 기치를 내걸고 당선된 팍사스 대통령은 취임 때만 해도 큰 기대를 모았다. 하지만 둘 다 태생의 한계인 국회 다수당의 지지를 확보하지 못해 개혁다운 개혁을 제대로 추진하지 못하고 늘 탄핵 위협에 직면해 있었다. 

팍사스 대통령의 탄핵소추는 2003년 10월 30일 메치스 라우린쿠스 국가안전부장이 대통령과 그의 보좌관이 러시아 범죄조직과 연루되어 있다는 문건을 국회에 제출하면서 시작됐다. 국회는 이 사건이 국가안보를 위협할 소지가 있다고 판단해 즉각 특별조사위원회를 구성해 한 달간 집중적으로 증거를 확보하고 관련자를 심문했다. 12월 1일 위원회는 "대통령의 특별지위, 책임, 국내외 정책 역할을 고려할 때 대통령의 행위는 리투아니아 국가안전을 위협하고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 보고서에 의하면 대선 때 팍사스의 선거전략과 홍보를 맡은 러시아 회사 알막스와 거액의 대선자금을 지원한 유리 보리소프가 여전히 대통령과 대통령실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대통령과 보좌관들이 국유재산 사유화와 다른 사업이권에 용인할 수 없는 영향을 미치려고 시도했다. 대통령의 측근들이 다른 국가기관의 활동을 간섭하는 등 지위를 남용했고, 대통령은 이를 묵인했다. 대통령과 보좌관이 기밀정보를 누설했다. 

국회는 보고서를 승인하고 12월 18일 국회의원 86명의 서명을 받아 대통령 탄핵소추 발의를 의결했다. 이를 근거로 국회는 법조인과 국회의원으로 구성된 특별소추위원회를 설치해 한시적 특별조사위원회의 탄핵 관련 여섯 가지 의결사항이 합당한지를 두 달에 걸쳐 또다시 강도 높은 조사와 심의를 거쳤다. 이에 헌법과 대통령선서 위반을 포함한 여섯 가지 항목 모두 유효하다고 결론지었다. 2004년 2월 19일 국회는 이 소추위원회의 보고서를 승인하고, 2월 23일 37권 각 30부, 총 1,110부, 20만7천7백 쪽에 달하는 방대한 증거서류를 헌법재판소에 제출했다. 

한편 3월 9일 한국 국회는 한나라당-민주당의 공조로 노무현 대통령의 선거법 위반, 측근비리, 경제파탄 사유로 국회의원 159명의 동의를 받아 탄핵소추를 발의했다. 이후 국회는 증거조사나 심의도 하지 않고 또한 대통령의 해명 기회도 없이 곧바로 3월 12일 경위권이 발동된 상태에서 193명의 찬성으로 탄핵소추를 의결했다. 초고속으로 이루어진 한국 국회의 탄핵소추는 수개월에 걸쳐 여러 번의 의결을 거치고 철저한 증거조사와 심의를 하는 리투아니아 국회의 탄핵소추와 현저히 비교된다. 리투아니아는 민주주의를 도입한 지 이제 고작 10여 년밖에 되지 않는다. 

헌법재판소 판결 뒤 국회 의결 
리투아니아 헌법재판소는 3월 16일부터 집중공개심리를 거쳐 3월 31일 세 가지 항목에서 팍사스 대통령이 헌법과 대통령선서를 위반해 탄핵되어야 한다고 판결했다. 이 판결을 근거로 4월 6일 국회는 세 가지 항목을 개별적으로 표결에 붙여 세 항목 모두 탄핵의결 수인 재적의원 5분의 3 이상으로 팍사스 대통령 탄핵을 최종 결정했다. 세 가지는 ▲대선자금을 지원한 유리 보리소프에게 부당하게 리투아니아 국적을 주었고 ▲유리 보리소프에게 국가기관이 그의 활동을 조사하고 전화를 도청하고 있다는 기밀을 누설했고 ▲대통령의 지위를 이용해 측근들이 기업으로부터 사리를 꾀하는 데 영향력을 행사했다는 것이었다. 

이로써 팍사스 대통령은 유럽에서 최초로 탄핵받은 대통령이라는 오명을 남기게 되었다. 그는 결국 대선자금 최대 후원자인 유리 보리소프의 도움으로 대통령에 당선되었고 또한 그로 인해 대통령 자리에서 물러나게 된 셈이다. 현재 보리소프는 아프리카 수단에 불법무기를 거래한 혐의로 피소되어 검찰의 조사를 받고 있다. 하지만 이번 탄핵이 곧 팍사스의 정치생명에 종말을 고하지는 않을 것 같다. 현재 그는 대선에 다시 출마해 국민의 심판을 받을 뜻을 비치고 있다. 한편 검찰의 기소 가능성도 남아 있어, 그의 향후 정치역정은 아직 불투명하다. 

탄핵소추가 진행되는 동안 특히 유럽연합과 나토 가입을 목전에 둔 리투아니아는 국가 이미지에 적지 않은 손상을 입었다. 국내 정치상황을 이유로 이탈리아 대통령과 슬로바키아 대통령 등 국빈 방문이 잇따라 취소되는 등 정상외교에 차질이 생겼다. 하지만 국회의 다수당이 국무총리를 맡고 있는 행정부는 정국 안정에 주력하여 큰 동요 없이 국정을 이끌어 왔다. 이 가운데 3월 29일 리투아니아는 나토 회원국으로 가입했고, 5월 1일 유럽연합 회원국이 된다. 

리투아니아는 아르투라스 파울라우스카스 국회의장이 대통령 권한을 대행하고, 60일 이내 선거를 치른다. 대통령 임기는 5년이고, 두 번에 걸쳐 연임할 수 있다. 이번 탄핵으로 1991년 소련연방으로부터 독립한 리투아니아는 민주주의 뿌리를 더욱 굳건히 하고, 정경유착과 측근비리 등에 연루된 대통령을 견제하는 국회의 힘을 축적하게 되었다. 한편 팍사스 정부가 들어선 후 커지는 양상을 보이고 있는 러시아 영향력을 차단하는 효과도 보게 되었다. 

* 이 기사는 뉴스메이커 2004년 4월 22일 571호에 보도된 내용이다.
Posted by 초유스

빌뉴스/최대석[자유기고가] chtaesok@hanmail.net
 
나폴레옹 군대와 러시아 군대가 맹렬한 포격전을 벌였다. 이어진 격렬한 백병전. 백마를 타고 질풍같이 내달리며 전투를 지휘하는 사람은 영락없는 나폴레옹의 모습이었다. 리투아니아 빌뉴스 중심가를 흐르는 네리스강의 넓고 푸른 강변에는 200년 전 나폴레옹 군대의 함성이 다시 울려퍼졌다. "나폴레옹 만세! 프랑스 만세!" 

지난 5월 31일과 6월 1일 빌뉴스에서 각각 열린 나폴레옹 군대 전투 재현과 당시 군인들의 유골 매장식 장면이다. 2001년 11월 빌뉴스 아파트 건축 현장에서 나폴레옹 군대의 유골 약 3,000구가 발굴되면서 일기 시작한 나폴레옹 추모 열기가 이날 절정을 이뤘다. 유럽 각국에서 온 취재진으로 성황을 이뤘고, 이를 계기로 전유럽 통합을 꿈꿨던 나폴레옹에 대한 유럽인의 관심이 새삼 고조되고 있는 것이다. 



추모식 행사 각국서 취재진 몰려 
빌뉴스에는 나치 독일 점령 시대나 소련 치하에서 희생된 자들의 유골이 대거 묻혀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아파트 건축 현장에는 유골과 함께 나폴레옹 얼굴이 찍힌 단추와 주화, 군화 및 군복 조각, 결혼반지, 십자가 등이 함께 발견됨에 따라 이들 유골은 1812년 러시아 침공에 참가한 나폴레옹 군대 군인의 유골로 확인되었다. 

역사학자들은 이 집단 매장지는 최대 규모라고 평하고, 빌뉴스 반경 100㎞에 약 8만 명의 나폴레옹 군대의 군인이 묻혀 있을 것으로 추정한다. 집단 매장지 발굴은 그동안 밝혀지지 않았던 나폴레옹의 러시아 원정 의혹을 풀어주었다. 특히 외부 손상이 없고 잔뜩 웅크린 유골이 많이 발견되면서 혹독한 추위가 원정 실패의 요인이라던 당시 나폴레옹의 주장을 입증해주었다. 

발굴된 유골은 리투아니아의 국가 지도자-독립 영웅-유명인 등이 묻혀 있는 국립묘지 격인 안타칼나스 묘지에 매장됐다. 6월 1일 열린 제막식에는 리투아니아 국가 지도자와 각국 대사와 일반 시민이 대거 참여했다. 프랑스의 나폴레옹 추모단체에서도 50명이 참석했다. 

사각형 묘 주변에는 흰 대리석을 깔고 나폴레옹 군대와 함께 러시아 원정에 참가한 11개국을 의미하는 사각기둥을 세웠다. 리투아니아 국회의장 아르투라스 파울라우스카스는 추모사에서 "우리나라 민요에는 '프랑스인들이 이 땅에 와서 우리를 구해주었네'라는 가사가 있고, 여러 노래에 파리와 몽마르가 등장한다"며 프랑스인에 대한 리투니아인의 오랜 호감을 표현했다. 주 리투아니아 프랑스대사 장 베르나르드 하트는 "다민족으로 구성된 나폴레옹 군대의 군인이 이제 이곳에서 편히 쉴 수 있게 해준 리투아니아 정부에 감사한다"고 말했다. 리투아니아 전 국회의장 비타우타스 란드스베르기스는 "유럽을 재편 통일시키고, 예속된 민족을 해방시키고, 그들에게 통일된 나폴레옹 법전을 주고자 한 나폴레옹의 포부는 역사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고 자신의 견해를 밝혔다. 

유골 매장식 일환으로 거행된 1812년 전투 장면 재현에는 당시 나폴레옹 군대와 러시아 군대가 입었던 군복과 사용했던 무기들로 무장한 400명이 참가했다. 나폴레옹 역할은 러시아 군역사협회장이자 상트페테르부르그 대학교와 파리 소르본 대학교 교수인 올레그 소콜로프가 맡았다. 이 재현 행사에는 리투아니아-폴란드-라트비아-백러시아-우크라이나-러시아에서 온 역사학자 등이 대거 참가했다. 



민요에도 나올 만큼 프랑스에 호감 
어린이와 여성도 등장해 관람객의 눈길을 끌었다. 실제로 나폴레옹 군대에는 여성도 있었다. 모스크바에서 온 타트야나는 "여성은 군인에게 포도주를 주는 일, 사망한 군인의 귀중품을 걷는 일, 부상한 군인을 돌보는 일 등을 했다"며 "러시아에는 역사 재현을 취미로 하는 사람이 아주 많다"고 말했다. 

이들은 6월 1일 유골 매장식을 끝난 후 나폴레옹 군대의 빌뉴스 입성식과 환영식도 재현했다. 빌뉴스에 입성한 후 시청 광장에서 빌뉴스 시장으로부터 상징적인 열쇠를 건네받는 나폴레옹은 "나폴레옹 만세! 프랑스 만세!"를 외쳤다.  

1812년 6월 말에서 12월 말까지 비록 짧은 기간이지만 리투아니아 사람은 이 시대를 프랑스 시대로 부른다. 비록 실현되는 않았지만 리투아니아인에게 이 짧은 시기는 나폴레옹의 도움으로 잃어버린 국가를 재건하고자 하는 희망의 시대로 기술된다. 지난 5월 10~11일 실시된 국민투표에서 유럽연합 가입을 전폭적으로 지지한 리투아니아인에게 나폴레옹이 시도한 유럽통합은 이날 더 큰 의미를 심어주었다. 

러시아 원정군 임시수도 
동유럽의 넓은 영토를 차지하고 있던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국가는 1795년 프러시아-오스트리아-러시아로 각각 분할되어 역사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두 민족은 나폴레옹의 도움으로 국가 재건을 시도했다. 1806년 나폴레옹은 프러시아 원정에 이겨 1807년 바르샤바공국을 세웠다. 1809년 오스트리아를 정복한 나폴레옹은 프랑스를 도운 바르샤바공국의 영토를 더욱 넓혔다. 이로 인해 그 지역에 영향력을 행사하던 러시아와 관계가 악화되었고, 마침내 유럽 대부분을 점령한 나폴레옹은 러시아 원정에 나섰다. 

1812년 6월 24일 나폴레옹은 50만 명의 대군을 직접 이끌고 국경선인 리투아니아 카우나스 네무나스강을 건넜다. 빌뉴스에 도착한 나폴레옹은 7월 1일 리투아니아대공국을 수립했다. 리투아니아인은 나폴레옹 군대를 해방군으로 극진히 맞았고 군대를 조직해 나폴레옹의 모스크바 진격을 지원했다. 나폴레옹은 이 원정 중 빌뉴스를 임시 수도로 선정했고, 이곳에 프랑스 국무장관을 상주시켰다. 나폴레옹 군대는 행진해 계속해 9월 14일 모스크바에 도달했다. 

러시아 군대는 주로 전략전인 후퇴 및 방어작전을 펴면서 측면 공격으로 맞섰다. 또 미리 마을과 도시에 불을 지르고 땅을 황폐화시켜 나폴레옹의 주된 원정 전략인 현지 보급을 불가능하게 했다. 모스크바에 도착한 나폴레옹 군대는 황폐한 도시에서 피곤-배고픔-화재-다가오는 추위 등으로 많은 고통을 겪었다. 5주 동안 모스크바에 머물면서 평화협정 체결을 고대한 나폴레옹은 성과가 없자 퇴각을 명령했다. 

러시아 군대는 지쳐 퇴각하는 나폴레옹 군대를 후방과 측면 공격해 엄청난 손실을 입혔다. 50만 명으로 출발한 군대가 12월 빌뉴스로 돌아왔을 때는 5만 명밖에 되지 않았다. 이들은 영하 30도의 추위-부상-질병-배고픔으로 등으로 수없이 죽어갔다. 이 원정에서 살아남은 자는 1만 명에 불과했다. 

이때 죽은 군인의 유골에 대해서는 뚜렷한 증거가 없었다. 기록에 의하면 러시아 군대가 나폴레옹 군대를 뒤쫓아 빌뉴스에 들어왔을 때 곳곳에 널려 있는 시체 처리가 가장 큰 골칫거리였다. 언 땅을 팔 남자가 부족했다. 처음에는 시체를 태웠지만 악취와 연기를 견딜 수가 없어 이를 중지했다. 

* 이 기사는 뉴스메이커 제530호 2003년 6월 27일자로 이미 보도된 내용이다.
Posted by 초유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