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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7.08.31 교서 번역은 내 신앙이요 수행
  2. 2017.08.31 에스페란토, 교서 번역 매개 언어 역할 톡톡히
  3. 2017.08.31 7대 교서 에스페란토 번역에 30년 세월 ②
  4. 2017.08.31 7대 교서 에스페란토 번역에 30년 세월 ①
  5. 2017.08.31 일생 일로( 一路) 이끈 신문 기사 하나
  6. 2017.08.25 리투아니아 최원실 교도
  7. 2013.06.03 유럽인의 진드기 예방법 1
  8. 2013.04.23 저가 항공 타고 장례식 참석한 대통령
  9. 2012.12.23 다문화 가정 자녀의 5개 언어 구사 비결
  10. 2012.12.18 재외 국민투표 참가 뿌듯 1
  11. 2012.11.04 리투아니아에서 한국 당근이 인기 있는 이유는?
  12. 2012.11.03 '최저임금 50% 인상' 공약 표심 흔들
  13. 2011.11.30 나폴레옹軍 참패 말없이 증언
  14. 2011.11.30 '유로’ 원조는 에스페란토
  15. 2011.11.30 'K-팝' 공연 기원 플래시몹
  16. 2011.11.30 리투아니아도 '한류 바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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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 2011.11.30 동유럽 최초 흑인시장 탄생
  19. 2011.11.30 에스토니아 신문들 백지 발행
  20. 2011.11.30 리투아니아, 세계 최강 원전 폐쇄
  21. 2011.11.30 리투아니아 첫 동물학대 징역형
  22. 2011.11.30 범죄조직 연루 의혹 국회의장 해임
  23. 2011.11.30 '발트의 길' 시위 20년 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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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5. 2011.11.30 초콜릿 대신 사랑의 입맞춤
  26. 2011.11.30 중국 생산 한국 배 먹은 후 냉가슴
  27. 2011.11.30 헝가리 여교사 교실서 춤 파문
  28. 2011.11.30 장모에게 가장 좋은 선물은 독버섯?
  29. 2011.11.30 빌뉴스에서 장막 벗은 북한 그림
  30. 2011.11.30 성씨에 붙은 접미사로 결혼여부 판단

원불교 7대 교서 에스페란토 번역과 에스페란토에서 여러 언어로의 번역을 진행하는 것 외에 에스페란토 국제선방과 세계에스페란토대회 원불교 분과모임에서 원무로서 역할을 해왔다. 에스페란토 국제선방은 2006년부터 매년 열리고 있으며 보통 국내외 참가자가 30-70명이다. 서울에서 열리는 102차 세계에스페란토대회를 계기로 올 여름 13차 국제선방에는 세계 20여 개국에서 120여 명이 참가했다. 국제선방에 필요한 50-60쪽 책자를 처음부터 지금까지 편집해오고 있으며 또한 기회 있을 때마다 참가해 원불교 교리 등을 알렸다. 

세계에스페란토대회는 매년 60여개국에서 에스페란토 사용자 2000여명이 참가하는 국제행사다. 원불교 에스페란토회는 내가 살고 있는 리투아니아 빌뉴스에서 2005년 열린 세계대회에서 처음으로 분과모임을 가졌다. 지금껏 11년째 꾸준히 이 모임을 해옴으로써 세계 에스페란토계에 원불교를 널리 알리고 있다. 행사에 필요한 안내지와 홍보 동영상 등을 편집하는 것이 내 몫이고 때로는 사회를 보거나 교리강연을 한다. 

* 1988년 교서 번역 당시의 작업 모습
* 2016년 교서 번역 당시의 작업 모습

그 동안 수십 편의 종법사 법문을 에스페란토로 번역했고 〈원불교신문〉 교리로 배우는 외국어 에스페란토란을 2009년부터 9년째 해오고 있다. 교서 번역 등으로 미뤄왔던 좌산상사의 〈정전 좌선의 방법 해설〉 책을 에스페란토로 완역해서 현재 컴퓨터 편집 중이다. 앞으로 에스페란토 국제선방에 유용하게 쓰일 것이다. 

앞으로의 계획은 우선 내년 상반기까지 〈대산종사법어〉를 에스페란토로 완역하는 일이다. 오래전에 여러 언어로 번역이 완료되었지만 아직 책으로 발간되지 못한 〈정전〉을편집해 세상에 내놓은 일도 중요하다. 이 일을 다 끝내면 정리해오고 있는 원불교 용어 에스페란토 단어집을 만들어 앞으로 글을 쓰거나 번역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고자 한다. 좀 더 욕심을 낸다면 좌산상사의 〈마음수업〉 책도 번역하고 싶다. 

지난 30여 년의 교서 번역을 되돌아보면 번역이 내 신앙이요 수행이었다. 즐겁고 보람찬 세월이었다. 단어 하나, 문장 하나를 두고 서너 시간 혹은 하루 내내 기쁘게 고민한 적도 있었다. 인터넷 시대가 와서 보다 더 쉽게 검색하고 연마할 수 있었다. 언어적으로 뛰어난 사람들에게 번역을 부탁했는데 "어떤 종교도 세상에 확산되는 것에 관여하고 싶지 않다"고 단번에 거절하는 사람도 몇몇 있었다. 직접 번역하고 컴퓨터 책 편집까지 하니 일처리가 빠르고 수월했다. 이제 눈도 침침해지고 건강도 예전 같지 않다. 50대 중반 나이에 7대 교서 번역을 끝낸 것이 무척 다행스럽다. 

교서를 번역할 때마다 의문되는 사항 하나하나 자상히 답해주신 좌산상사님의 지도와 보살핌에 이 자리를 빌어서 거듭 감사를 드린다. 번역 작업에 힘들거나 지칠 때 꿈에 나타나서 격려해주시면 새로운 힘을 얻어 나아갈 수 있었다. 2012년 여름 10일간 좌산상사님과 함께 에스페란토의 발생지인 바르샤바와 비아위스토크를 둘러보고 리투아니아 빌뉴스 우리 집에 모시게 된 것은 우리 가족에겐 큰 기쁨이었다. 2015년 4월 상사님으로부터 붕산(鵬山)이라는 법호를 받았다.

7대 교서 번역은 고정적인 직업이 없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직장에 매여 있으면 아무래도 번역에 필요한 많은 시간을 낼 수 없었을 것이다. 이상하리만큼 생계를 꾸리는데 별다른 걱정을 하지 않았다. 적은 것에 만족한 탓일까 아니면 천록이 나오는 탓일까. 때로는 해외통신원으로, 자유기고가로, 비디오저널리스트로 생계를 해결했다. 여러 해 전부터 여름엔 관광안내사로 일하고, 겨울엔 빌뉴스대학교에서 한국어를 가르치고 있다. 발트 3국을 여행하는 원불교 교도들을 종종 만날 때도 있다. 이제 생활 속에서 적공을 쌓고 틈나는 대로 세상을 돌아다니면서 원불교를 알리려고 한다.


Posted by 초유스

1985년 종로교당에서 시작한 원불교 교전 에스페란토 번역과 윤문 작업은 세계 여러 나라를 거쳐서 총부 정역원 사무실에서 1998년 6월 드디어 마쳤다. 당시 번역에 많은 지도를 해주신 좌산종법사님은 에스페란토 교서를 통해 세계 여러 나라 언어로 번역할 것을 명하셨다. 

첫 결실은 스페인어였다. 7개 언어에 능통하고 이슬람 신학과 아랍어를 가르치는 스페인 사람 리카르도 알베르트 레이나 교수를 소개받았다. 1999년 7월 총부에서 윤문 작업을 마친 〈정전〉은 8월 한국어-스페인어 원불교 〈정전〉 자문판으로 발간되었다. 〈대종경〉은 2004년 번역이 완료되었다. 2003년 9월 좌산종법사님의 훈증 아래 일주일 동안 삼동원에서 윤문 작업이 이루어졌고 김장현 교도(고원국 교무 정토)와 일본에서 공부한 비센테 아야 세고비아 박사도 참여했다. 스페인어 〈원불교 교전〉 자문판은 2005년 발간되었다.

* 포르투갈어로 원불교 교전을 번역한 제랄도 박사(왼쪽), 좌산 종법사(가운데), 필자(오른쪽)
* 스페인어로 원불교 교전을 번역한 리카르도 박사(왼쪽), 윤문에 참가한 세고비아 박사(오른쪽)

포르투갈어 번역자는 에스페란토 학술원장이자 포르투갈어 교수인 브라질 사람 제랄도 마토스 박사이다. 포르투갈어 사전을 비롯한 많은 저서를 남긴 언어학자인 그는 2001년 4월 정전 번역을 시작해서 2004년 만덕산 훈련원에서 윤문을 마쳤다. 2005년 11월 상주선원에서 18일간, 그리고 2009년 1월 브라질 쿠리치바에 있는 그의 집에서 10일간 윤문 작업이 이뤄졌다. 마침내 2009년 포르투갈어 〈원불교 교전〉과 한국어-포르투갈어 원불교 정전 자문판이 발간됐다.

그는 2012년 〈정산종사 법어〉 번역을 시작해 2013년 10월 상파울로 교당 봉불식을 기해서 마치기로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안타깝게도 봉불식 3일을 앞두고 뇌혈관 장애로 입원해야 했고 다음해 3월 23일 세상을 떠났다. 좌산상사님은 지중한 인연으로 여겨 제랄도 박사의 영전에 법문을 내려주셨다. 그의 일생 마지막 작업이 된 〈정산종사 법어〉 번역은 또 다른 유능한 브라질 사람 파울로 비안나 박사가 이어 받아서 2014년 12월 번역을 완료했다. 비안나 박사는 2016년 〈불조요경〉 번역까지 마쳤다. 개교 백주년 성업을 맞아서 에스페란토에서 번역된 포르투갈어 〈원불교 교전〉, 〈정산종사 법어〉, 〈불조요경〉은 내가 컴퓨터 책 편집을 해서 포르투갈어 원불교 교서로 2016년 발간되었다. 책 편집 시 상파울로 교당 김생운 교무가 많은 도움을 주었다.

아랍어 정전 번역은 리카르도 박사가 맡아서 2010년 처음 진행했다. 하지만 여러 사정으로 번역을 다 마치지 못했다. 번역에 많은 경험이 있는 바레인 치과의사 와엘 후사인을 소개받았다. 그는 리카르도 박사의 번역본을 참조하면서 2013년 3월 시작해 12월 정전 번역을 마쳤고 이어서 2016년 대종경 번역까지 다 해냈다. 아랍어 원불교 교전과 다른 언어에서 번역된 아랍어 정산종사 법어, 원불교 교사, 원불교 성가 선곡집 컴퓨터 책 편집도 내가 맡아서 했다. 러시아어 원불교 성가 번역에도 에스페란토가 많은 기여를 했다. 원불교 성가 전곡이 책으로 발간된 언어는 영어와 에스페란토 두 언어뿐이다. 러시아 에스페란토인 모이세이 브론쉬테인이 2009년 번역을 시작해 2014년 성가 50곡 번역을 마쳤다. 2013년 7월과 11월 번역자를 리투아니아로 초청해 번역을 윤문했다. 러시아어 성가 번역에는 원신영 교무와 비다 최예네가 많은 역할을 했다. 내가 컴퓨터 악보 편집까지 한 러시아 원불교 성가 선곡집이 2014년 발간됐다.

이외에도 에스페란토 원불교 정전이 번역되어 책으로 발간된 언어는 체코어(번역자 카렐 크라프트, 2006년)와 리투아니아어(번역자 라이뮤스 스트라즈니쯔카스, 2006년)이다. 번역이 완료된 언어는 이탈리아어(번역자 크리스티나 데 조르지, 2007년), 불가리아어 (번역자 루먀나 토도로바, 2003년) 폴란드어 (번역자 보이치에흐 우사키에비츠, 2004년) 그리고 몽골어(번역자 발드누즈 도르즈, 2003년)이다. 이와 같이 에스페란토는 원불교 교서 번역의 매개 언어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 출처: 원불교신문 http://www.won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118531

* 교화자의 삶 5 - 교서 번역은 내 신앙이요 수행

* 교화자의 삶 4 - 에스페란토, 교서 번역 매개 언어 역할 톡톡히

* 교화자의 삶 3 - 7대 교서 에스페란토 번역에 30년 세월 ②

* 교화자의 삶 2 - 7대 교서 에스페란토 번역에 30년 세월 ①

* 교화자의 삶 1 - 일생 일로( 一路) 이끈 신문 기사 하나

Posted by 초유스

〈원불교교전〉 번역을 완성한 후 정산종사 탄생백주년을 맞아 〈정산종사법어〉를 2000년 1월부터 시작해 4월에 에스페란토 초벌 번역을 마쳤다. 

2000년 7월 완도 조실에서 번역상 어려운 사항에 대해 좌산 종법사의 가르침을 받았다. 그해 자문판이 발간되었지만 다시 여러 해 작업을 걸쳐 마침내 2011년 12월 윤문 작업을 완성했다. 특히 윤문할 때 정역을 담당하고 있던 류정도 교무와 전자편지로 방대하게 의견을 나눴다. 

성가는 2004년 9월 번역을 시작해 이듬해 4월 초벌 번역을 마쳤지만 200곡 모두를 컴퓨터 악보에 가사를 넣어야 했다. 다듬고 다듬어서 2006년 7월 컴퓨터 악보 작업까지 완성해 9월 리투아니아에서 에스페란토 원불교 〈성가〉가 인쇄되었다. 성가는 가장 어려운 번역 중 하나였지만 참으로 즐거웠다. 리듬과 운율을 맞춰야 하고 또한 음악구절과 가사구절을 맞춰야 했다. 또한 컴퓨터 음악 프로그램을 능숙하게 다룰 줄 알아야 했다. 

이렇게 한 것을 다시 노래를 불러서 자연스러운지를 확인해야 했다. 여기에 음악을 전공한 아내가 절대적인 도움이 되었다. 그의 도움 없이는 성가 번역은 불가능한 작업이었다.

〈예전〉은 2012년 5월 번역을 시작해 2014년 5월 마쳤다. 에스페란토 국제선방 참가 차 2014년 1월 한국 방문시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나 다른 번역과 상충되는 부문을 좌산 상사에게 여쭤서 해결했다. 

예전 번역을 하면서 가장 마음 아팠던 것은 그 동안 〈예전〉 원불교 용어 번역을 정리한 파일이 정말 귀신이 곡할 정도로 컴퓨터에서 사라져버렸다. 다행이 종이로 된 것이 있었다. 

〈교사〉는 2014년 7월 번역을 시작해 2015년 2월 마쳤다. 에스페란토로 번역하면서 영어 번역본을 참조하는 한편 의견까지 쓰느라 많은 시간이 소요됐다. 이때는 의식적으로 일일이 원불교 용어 번역 파일을 만들어나갔다. 진작 교서 번역 처음부터 이 작업을 하지 않는 것이 많이 후회가 되었다. 교사 또한 상사원에서 머물면서 어려운 부분을 해결했다. 

〈불조요경〉은 2015년 3월 번역을 시작해 2016년 2월 윤문까지 다 마쳤다. 처음에는 고형본을 번역했으나 나중에 나온 지침에 따라 원불교본을 그대로 또 다시 번역해야 했다. 번역량은 상대적으로 적지만 여러 언어 기존 번역본들을 참조하면서 참으로 많은 공부를 해야 했다. 

원불교100주년기념성업의 일환으로 원불교 교서 10대 언어 번역 사업에 에스페란토가 포함되었다. 1985년 정전 번역에 참여하기 시작한 후 〈정전〉, 〈대종경〉, 〈정산종사법어〉, 〈불조요경〉, 〈예전〉, 〈교사〉, 〈성가〉가 한 사람에 의해 에스페란토로 일관되게 번역되었다. 

정전 번역을 마지막으로 여겼는데 어떻게 하다 보니 꼭 31년만에 7대 교서를 혼자서 다 번역하게 되었다. 각 번역서마다 용어와 인명은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설명을 달았고 여러 교서 번역을 거치면서 초기에 선택한 번역어 단어들을 다듬어 갈 수 있었다. 

* 에스페란토 교서를 봉정한 대만 교도 아벵고 박사
* 10개 언어 원불교 교서 봉정
* 원불교 100주년 기념대회에 참가한 국내외 에스페란티스토들

수많은 국내외 인연들의 도움이 있었는데 특히 좌산 상사님의 관심과 격려 없이는 이룰 수 없는 일이었다. 이 모든 번역은 리투아니아 에스페란토인 안타나스 그린체비츄스가 교정을 봤고 에스페란토인 아내 또한 많은 조언을 해주었다. 

번역뿐만 아니라 7대 교서 컴퓨터 편집까지도 인쇄소에 맡기지 않고 내가 직접 다 했다. 

이는 컴퓨터 편집을 마치는 순간까지 윤문하고 오탈자를 직접 찾을 수 있게 해주었다. 

2016년 3월 때마침 55세 생일을 맞아 컴퓨터 편집을 완성하는 기쁨을 누렸다. 원불교100주년기념대회를 맞이해 2016년 〈교전〉, 〈정산종사법어〉, 〈불조요경〉을 묶어서 에스페란토 〈원불교 교서〉, 그리고 〈예전〉과 〈교사〉를 묶어서 책이 발간되었다. 

이렇게 나온 에스페란토 교서는 여러 언어로 번역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 회에 기술하고자 한다.

* 출처: 원불교신문 http://www.won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118429

* 교화자의 삶 5 - 교서 번역은 내 신앙이요 수행

* 교화자의 삶 4 - 에스페란토, 교서 번역 매개 언어 역할 톡톡히

* 교화자의 삶 3 - 7대 교서 에스페란토 번역에 30년 세월 ②

* 교화자의 삶 2 - 7대 교서 에스페란토 번역에 30년 세월 ①

* 교화자의 삶 1 - 일생 일로( 一路) 이끈 신문 기사 하나

Posted by 초유스

당시 종로교당 이광정 교감님의 격려 속에 1985년 5월 청년회 내 에스페란토 소모임 '일원회' 정기총회에서 홍성조, 육철 중심으로 〈정전〉 번역을 본격적으로 실행하기로 했다. 나는 8월 행정고시 2차 시험을 치룬 후 사요부터 번역함으로써 참여했다. 

"우리말로 편찬된 경전을 세계 사람들이 서로 번역하고 배우는 날이 멀지 아니할 것이니"라는 전망품 3장을 실현시키는 일꾼이 돼야겠다고 다짐하면서 번역에 몰입했다. 이는 정말 아쉬운 시험 결과가 방황을 극복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1986년 2월 법위등급까지 번역을 마쳤다. 그해 8월 에스페란토 원불교 안내서가 발간돼 제5차 한·일 청년세미나 참가자와 본회를 방문하는 외국인들에게 원불교를 알리는 데에 기여했다. 이때 '일원회'가 '원불교에스페란토회'로 단체명이 변경됐다. 

* 1988년 에스페란토 정전 발행 봉고법회
* 1998년 수위단회 에스페란토 교전 교서감수회의
* 1998년 에스페란토 교전 발행 봉고법회
* 1998년 에스페란토 교전 발행 봉고법회

종로교당 청년회 회장을 맡은 1987년부터 1990년 6월 헝가리 에스페란토 유학을 떠날 때까지 교당에서 살면서 교당 일과 청년 활동을 함께 했고 이광정 교감님의 교리 지도를 받으면서 〈정전〉 에스페란토 번역을 윤문했다. 4년에 걸쳐 총 2천 시간 11차례 윤문 과정을 거쳐 1988년 3월 에스페란토 〈정전〉 교서감수회의가 총부에서 두 차례 열렸다. 이때 회의에서 고산, 숭산, 구타원 종사님들을 목전에서 뵙게 되었다. 당시는 컴퓨터가 없어서 종이에 손글씨로 번역해 한 단어 한 단어를 타자기로 옮겨 쳐야 했다. 그해 9월 11일 5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중앙총부 대각전에서 에스페란토 〈정전〉발행 봉고법회가 열렸다.

에스페란토 〈정전〉은 한국 종교 경전 중 최초의 에스페란토 번역서이다. 에스페란토 언어 능력, 교리 이해 능력 그리고 번역상의 표현 능력이 두루 필요하다. 이광정 교감님은 완벽하지 않더라도 일단 세상에 내놓아야 한다고 하시며 격려를 해주셨다. 큰 일을 끝냈으니 다시 고시 준비에 몰입해보자고 마음을 다잡아봤지만 여전히 원불교 활동과 에스페란토 활동을 이어갔다. 

1989년 한국에스페란토 청년회장까지 맡아 8월 일본에서 열리는 세미나에 참가하면서 한 달간 에스페란토로 일본 곳곳을 둘러보았다. 에스페란토가 살아있는 언어임을 실감한 이 여행이 내 인생에 획기적인 전환점을 만들어주었다. 박사 과정 진학, 고시 재도전, 취업, 출가 등 장래에 대한 고민 속에 늘 교서 번역에 대한 애착이 자리 잡았다. 

〈대종경〉 번역을 시작하면서 무엇보다도 에스페란토 어학 실력을 높여야겠다고 결심했다. 에스페란토 운동이 활발하고 일정기간 동안 체계적으로 교육을 받을 수 있는 불가리아를 시작으로 3년간 에스페란토 세계여행을 계획했다. 수위단회 중앙으로 계시던 좌산 상사의 지원이 큰 힘이 되었다.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에스페란토 학과를 둔 엘테대학교 교수를 만났다. 그가 대학원 진학을 권유하자 여행으로써 얻는 언어 능력보다는 대학원에서 체계적으로 공부해서 얻는 언어 능력이 훨씬 더 가치 있을 것이라 믿고 입학했다. 이렇게 공부하면서 〈대종경〉 번역 작업을 이어가서 1887년 에스페란토가 공표된 폴란드 바르샤바에서 1992년 10월 〈대종경〉 번역을 완성했다. 한국에스페란토협회 사무국장과 대회조직위원으로서 1994년 서울 세계에스페란토대회를 성공적으로 마친 후 다시 유럽으로 가서 학위논문을 마치는 한편 〈대종경〉 번역을 윤문했다. 1997년 6월부터 1년간 좌산 종법사님의 배려로 총부 성불당에 살면서 〈정전〉과 〈대종경〉 전체 윤문 작업을 했다.

이때 총부 교무님들과 수많은 문답과 의견교환을 했고 기회 있을 때마다 종법실에 찾아가 의문사항을 하나하나 지도를 받았다. 수위단회 교서 감수위원회의를 거쳐 1998년 6월28일 에스페란토 원불교 교전 출판 봉고식이 열렸다. 이렇게 나온 에스페란토 교전은 여러 언어로 번역되는 계기가 되었다.

* 출처: 원불교신문 http://www.won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118368

* 교화자의 삶 5 - 교서 번역은 내 신앙이요 수행

* 교화자의 삶 4 - 에스페란토, 교서 번역 매개 언어 역할 톡톡히

* 교화자의 삶 3 - 7대 교서 에스페란토 번역에 30년 세월 ②

* 교화자의 삶 2 - 7대 교서 에스페란토 번역에 30년 세월 ①

* 교화자의 삶 1 - 일생 일로( 一路) 이끈 신문 기사 하나

Posted by 초유스

원기85년(2000년) 4월12일 처음 원무 사령장을 받았다. 현재 유럽 리투아니아에서 살면서 국제어 에스페란토를 통한 해외교화와 정역사업을 진행해 오고 있다. 

앞에는 넓은 들과 푸른 동해, 뒤에는 높은 산, 옆에는 맑은 강이 그림처럼 어울려진 마을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초등학교 5년 대구로 전학한 후 대한불교 진각종 종립학교인 중학교에 들어갔다. 일주일에 한 번 열리는 '심학' 수업에 교리를 배우고 선을 하는 데 참 재미있고 즐거웠다. 

고등학교에 진학하자 스스로 신앙처를 찾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종종 주말에 진각종 심인당이나 천도교 교당을 찾아가곤 했지만 갈 때마다 문이 닫혀 있었다. 문을 두드리고 들어가 관심이 있어서 왔다고 말하기엔 용기가 부족했다. 잠시 문 앞에서 서성거리다 돌아오곤 했다. 기회는 전혀 기대하지 않은 곳에서 나타났다. 

고등학교 2학년 때인 원기64년(1979) 5월 중간고사가 끝나는 날이었다. 같은 교실에서 본 마지막 시험이 끝나자 3학년 선배 몇 명이 2학년생들에게 원불교에 한번 같이 가볼 것을 권했다. 서성로교당이었다. 시험이 끝나 홀가분했고 한국인이 세운 종교라는 짧은 설명에 흔쾌히 따라 갔다. 이렇게 처음 접한 원불교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낯설지가 않았다. 특히 하얀 벽에 걸린 검은 일원상이 그 어떤 신앙 대상의 형상보다 성스럽게 다가왔다. 

그해 7월 대구교구 대법회 시 대산종법사가 서성로교당에 들렀다. 막 입교한 학생 교도로 멀리서나마 종법사님을 뵐 수 있는 것은 큰 행운이었다. 학생회 법회가 열리는 토요일이 몹시 기다려졌다. 학교 시험이 끝나면 한동안 책 읽기를 즐겨했다. 이제는 그 책이 위인전이나 문학소설에서 교전, 교서, 선진열전 등 원불교 서적으로 바꿔졌다. 학교 친구들에게 누구나 쉽게 공감하는 〈대종경〉 내용들을 전해준 기억도 새록새록 난다. 고등학교 3학년생이 되면 보통 대학 입시 준비로 법회에 나오지 않았다. 그런데 이런 시기일수록 더욱 법회에 나가 힘을 얻는 것이 필요하다고 굳게 믿었다. 학생회를 이끌어가는 후배들에게 눈치가 보였지만 열성적으로 토요일 법회에 나갔다. 학력고사에서 예상보다 좀 더 높은 점수를 받았다. 고3임에도 열심히 법회에 나간 덕분이 아닐까. 점수는 전국 명문 대학들의 웬만한 학과는 다 갈 수 있을 정도였다.

*1986년 에스페란토 원불교안내서 발행 기념

이맘때인 1981년 2월 16일자 〈원불교 신문〉(당시 원불교신보)에 교리를 에스페란토로 번역해 해외교화에 기여하고 있다는 종로교당 청년회의 활동 기사를 읽었다. 무슨 마력에 끌린 듯 '에스페란토'와 '종로교당'이 뇌리에 각인되었다. 서울에 가면 종로교당을 다녀 에스페란토를 배워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결국 이 기사는 장차 고등고시에 합격해 국가와 사회에 기여해보겠다는 큰 꿈을 안고 서울로 향한 지방 청년을 전혀 엉뚱한 인생길로 안내하고 말았다. 종로교당에 다니자마자 에스페란토에 입문했다. 고시 공부에 치우친 단조로운 대학 생활에 에스페란토 학습과 청년회 활동은 좋은 활력소가 되었다. 세상 사람들을 분열시키는 원인이 언어와 종교라는 인식의 토대 하에 공통 언어로 그 분열과 분쟁을 없애고 인류가 한 가족임을 확신시키고 나아가 모든 민족 간 상호이해와 세계평화를 이루기 위해 에스페란토를 세상에 내놓은 자멘호프 박사의 숭고한 뜻에 고개가 절로 숙여졌다. 이러한 언어로 새 시대 주세성자인 소태산 대종사의 가르침을 세계만방에 널리 전하는 데 기여해야겠다는 뜻을 세웠다. 고시를 준비하는 가운데에서도 거의 모든 에스페란토 합숙에 참가해 언어능력을 향상시켰고 또한 외국인들과의 서신교환을 통해 에스페란토와 호흡을 같이 해왔다. 신앙생활에도 추호도 갈등이 없었다. 종로교당 청년회를 다니면서 김이현·이광정·김법종·이혜정 교무님을 맞이했다.

* 출처: 원불교신문 http://www.won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118322

* 교화자의 삶 5 - 교서 번역은 내 신앙이요 수행

* 교화자의 삶 4 - 에스페란토, 교서 번역 매개 언어 역할 톡톡히

* 교화자의 삶 3 - 7대 교서 에스페란토 번역에 30년 세월 ②

* 교화자의 삶 2 - 7대 교서 에스페란토 번역에 30년 세월 ①

* 교화자의 삶 1 - 일생 일로( 一路) 이끈 신문 기사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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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차 에스페란토 세계대회

참 나를 찾는 수행공부 하고 싶어


102차 에스페란토 세계대회에 참석한 최요가일래(15·법명 원실) 교도는 한국인 아버지와 리투아니아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현재 리투아니아 빌뉴스(Vilnius)에서 살고 있다. 그의 아버지는 에스페란토 <원불교전서>를 정역한 최보광 원무로 가족들은 모두 알뜰한 교도다.

원불교 국제선방에 두 번째로 참석하게 된 그는 "국제선방 프로그램 중에서 가장 좋았던 것이 명상시간이었다. 처음 좌선을 해보게 됐는데, 오직 나를 찾아가는 시간이었고, 바깥의 경계에서 나를 자유롭게 할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고 명상에 대한 감상을 전했다. 

이어 그는 "이 프로그램에 참여하면서 내가 바라는 것은 참 나를 깊이 찾아가 보는 것이다. 그 동안에는 명상이라는 경험을 해보지 못했는데, 이번에 기회가 됐을 때 깊은 수행을 해보고 싶다"며 "명상은 내 마음을 편하게 해주고 나를 착한 사람으로 만들어 주는 것 같다. 세상에 좋은 사람으로 살아가고 싶다"고 말했다.

에스페란토를 배우게 된 계기에 대해 그는 "부모님들이 에스페란토로 만나게 돼 어릴 때부터 자연스럽게 에스페란토를 익혔다"며 "에스페란토뿐 아니라 어릴 때부터 한국어를 아버지에게 배웠고, 리투아니아어를 어머니에게 배웠다. 아버지와는 한국어 외에는 다른 언어를 사용하지 않는다. 나는 내가 한국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한국이 내 나라라고 생각한다"고 설명했다.

그는 이번 에스페란토 세계대회 축제 무대에서 한국 노래 '세월이 가면'을 불렀다. 세계대회에서 에스페란토 언어배우기와 한국문화와 세계문화체험 시간 등 참여 프로그램에서 주로 활동을 하게 됐다. 그는 "한국에서 많은 친구들을 만나게 돼 좋았다. 한국말을 더 배울 수 있는 기회가 됐고, 아빠의 고향땅을 다닐 수 있어서 행복했다"고 전했다.

* 원불교 신문 유원경 기자 - 2017년 월 11일

* 출처: http://www.won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118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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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신원 이메일] 유럽인의 진드기 예방법
/최대석 자유기고가

최근 들어 한국에서도 진드기에 물려 바이러스에 감염된 후 사망한 것으로 의심되는 사례가 늘어나고 있다. 이로써 한국도 진드기로부터 안전한 나라가 아님을 알 수 있다.

유럽 풀숲에도 사람을 물어서 해를 끼치는 진드기가 있다.

리투아니아 숲 속 입구에서는 종종 다음과 같은 경고문을 볼 수 있다. "이 숲에서 진드기에 물린 후 대부분의 경우 심한 뇌염이 발생했습니다. 이 숲에 함부로 돌아다니는 것은 치료가 불가능한 병이나 사망을 초래할 수 있습니다."

리투아니아 의사에 따르면 진드기 바이러스에 의한 병 자체에 대한 구체적인 치료제는 없다. 다만 그 증상에 따른 치료를 하고 있다.

유럽인들이 흔히 취하는 진드기 예방 요령이다.

1. 풀이나 숲으로 들어갈 때는 가급적 긴팔 옷과 긴 바지를 입는다.

2. 바지 끝을 양말 속에 넣어서 진드기가 바지를 통해 기어오르지 못 하도록 예방한다.

3. 벌레 퇴치제를 바르거나 뿌린다.

4. 숲이나 풀숲에서 나와서는 몸 전체, 특히 피부가 연한 부분(사타구니, 겨드랑이, 귀 밑, 무릎 뒤쪽, 팔꿈치 안쪽) 등을 꼼꼼히 살핀다. 머리카락 사이도 살핀다.

5. 만약 발견하면 절대 당황하지 않는다.

6. 유럽 사람들은 버터나 기름을 몸에 달라붙어 있는 진드기와 그 주변에 바른다. 이는 진드기를 질식시키기 위해서이다. 의료계는 이를 권장하지 않는다. 질식당하면서 진드기가 더 강한 독성을 뿜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7. 깨끗한 손이나 소독된 핀셋으로 시계 방향으로 돌리면서 뽑아낸다. 중요한 것은 몸속에 박혀 있는 진드기 머리 부분까지 완전히 빼내는 것이다. 최대한 머리 부분까지 핀셋으로 꼭 잡아서 빼낸다.

요즘은 진드기 예방 접종을 맞는 사람도 늘어나고 있다.

유럽에서 23년 동안 살면서 진드기에 세 번 물렸다. 다행히 아무런 증상은 나타나지 않았다. 25년 동안 진드기 환자를 다룬 리투아니아의 한 의사는 심할 경우 치료과정은 길면 3개월에서 1년까지 이어지지만, 진드기에 물려서 사망한 사람은 아직 보지 못했다고 말했다. 아무튼 유럽이든 한국이든 야외 생활때 진드기를 조심해야 하겠다.

빌뉴스(리투아니아)
chtaesok@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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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신원 이메일] 저가 항공 타고 장례식 참석한 대통령
/ 최대석 자유기고가

지난 17일(현지시간) '철의 여인이라 불리던 대처 영국 전 총리의 장례식이 있었다. 

발트 3국 중 하나인 리투아니아에서도 달랴 그리바우스카이테 여성 대통령이 조문객으로 초청 받아 이 장례식에 참석했다. 이때 대통령이 타고 간 비행기가 요즘 리투아니아 국민들 사이에서 단연 화제다.

비행기는 전용기도, 전세기도, 군용기도 아닌 바로 저가 항공기였기 때문이다. 그리바우스카이테 대통령이 저가 항공 기내에서 찍은 자신의 사진을 페이스북에 올리면서 이 사실은 널리 알려졌다. 리투아니아 대통령실은 대통령이 편리하고 값싸고 빠르기 때문에 저가 항공기를 선택했다고 밝혔다.

리투아니아 수도 빌뉴스에서 장례식이 열린 영국 런던까지 항공 왕복 비용은 군용기가 5만 리타스(약 2천500만 원), 전세기가 최소 15만 리타스(7천500만 원)이다. 이에 비해 대통령이 이용한 저가 항공 왕복 비용은 3천 리타스(150만 원)에 불과하다.

하지만 리투아니아 누리꾼들의 반응은 양분되고 있다. 국격을 떨어뜨리는 행위, 대중주의적 과시행위 혹은 다음 선거를 위한 득표 전략 행위라고 비판하는 사람도 있고, 이는 지극히 정상적이며 진정으로 국가를 위하는 일이라고 지지하는 사람도 있다. 

어찌됐건 국민 세금으로 살아가는 공무원들에겐 리투아니아 대통령의 선택은 귀감이 될 만하다. 

얼마 전에 헝가리에서 고위직을 역임하고 정년퇴임한 에스페란티스토를 만난 적이 있다. 그는 이탈리아 출장을 갔는데 규정상 5성급 호텔에서 자야 했다. 하지만 5성급 호텔 대신 이탈리아 사람들의 삶을 더 가까이에서 접하기 위해 민박을 했다. 출장에서 돌아와 남은 여비를 돌려준 그는 뜻밖에도 칭찬 대신 규정을 어긴 데에 대한 질책을 받았다고 했다. 그래도 세금을 내는 국민의 입장에서는, 한국을 비롯한 세계 곳곳에 이런 고위공직자가 많이 나왔으면 싶다. 

빌뉴스(리투아니아)=chtaesok@hanmail.net

부산일보 2013년 4월 22일 게재
출처: 
http://news20.busan.com/controller/newsController.jsp?sectionId=1010100000&subSectionId=1010100000&newsId=201304220001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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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브랜드위원회 블로그에서는 국가브랜드에 대한 공감대를 높이기 위해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 또는 일반 국민들이 바라본 국가브랜드의 모습을 담는 참여공간을 운영합니다. 이들이 이야기 하는 국가브랜드 이야기, 함께 공감해보실까요? ^^


[108편] 다문화 가정의 언어 교육, 이렇게 한번 해보세요~ – 초유스



금요일 학교 수업을 마친 딸아이 요가일래는 친구 집에 놀러 갔습니다. 마침 그 근처에 있는 은행에 볼일을 본 후, 딸아이를 만나 함께 집으로 돌아왔죠. 만나자마자 딸아이는 가방에서 공책을 꺼냅니다.



“아빠, 이 공책 친구 동생이 선물을 줬어.”

“왜?”

“여기 봐. 한글이 있잖아. 하무타로.”

“그런데 하무타로가 무슨 뜻이지? 혹시 햄토리가 아닐까?”

“집에 가서 한번 확인해보자.”


공책의 뒷면을 살펴보니 인도네시아에서 제작된 공책이었습니다. 일본어로 햄토리가 일본어 철자가 아니라 왜 한글로 써져 있을까 궁금했지만, 딸아이가 이를 한글로 알아보고, 또한 이 한글 덕분에 공책까지 선물로 받게 된 것에 보람을 느꼈습니다. 이는 딸아이 잉태부터 지금까지 한국어만 사용한 결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특히 교실에서 유일하게 딸아이만 한국어를 말할 수 있다는 것에 대해 커다란 자긍심을 가지고 있죠.


우리는 한국이 아니라, 유럽 리투아니아에 살고 있는 다문화가정입니다. 아내는 리투아니아인이고, 딸아이는 현재 초등학교 5학년생이죠. 우리 가족에 대해 사람들이 가장 궁금해 하는 사항 중 하나는 바로 자녀의 언어입니다. 보통 우리 집을 방문하는 한국 손님들은 딸아이에게 무슨 언어로 말을 걸어야 할지 머뭇거리게 됩니다. 영어로 “한국어 할 줄 아니?”라고 물으면 딸아이는 “편하게 한국어로 하세요.”라고 답하는데요. 대부분의 사람들은 깜짝 놀라는 모습을 보여주죠.




이런 원칙으로 5개 언어 구사


외국에 사는 다문화 가정 자녀에게 한국어를 가르치는 일은 쉽지가 않습니다. 다행히 딸아이는 구사 능력에 차이가 있지만 5개 언어(리투아니아어, 한국어, 영어, 러시아어, 에스페란토)를 말할 수 있습니다. 아내와는 한국어도, 영어도, 리투아니아어도 아닌 에스페란토로 만났어요. 우리 부부의 일상 언어는 에스페란토입니다. 이런 언어 환경 속에서 딸아이가 5개 언어를 말할 수 있게 된 것은 아래와 같은 원칙에 충실했기 때문입니다.



모태부터 지금까지 아빠는 무조건 한국어로만 말한다. 만 1세경부터 한국어 비디오테이프를 그냥 틀어놓았다. 자연스럽게 보도록 하기 위해서다. 만 3세경부터 한국어 인터넷 학습 사이트를 초등학교 1학년 때까지 활용했다.


모태부터 지금까지 엄마는 무조건 리투아니아로만 말한다(철칙: 부모 중 어느 한 쪽이 절대로 두 언어를 섞어서 말하지 말 것. 즉 아빠가 한국어를 사용하기도 하고 리투아니아어도 사용하다 보면 아이는 자기가 더 편하다고 느끼는 언어만을 쉽게 사용하게 됨. 혹은 한 문장에 두 언어를 섞어서 사용하는 경우도 생김).


소련으로부터 독립한 후 리투아니아에는 탈러시아 정책으로 영어가 러시아어를 대체하고 있다. 하지만 가까운 장래에 러시아어가 다시 중요한 언어로 부각될 것이라 생각해 러시아어 어린이집에 3년을 다니도록 했다.


영어 만화 채널을 아주 어렸을 때부터 자유롭게 보도록 했다. 어린이집에 갔다 오면 잘 때까지 거의 영어 채널만 틀어놓는다. 영어가 자연스럽게 노출되면서 아이가 자연스럽게 익히도록 했다. 이 습관으로 지금도 딸아이는 영어 채널을 즐겨본다.


부모는 항상 에스페란토를 사용한다. 아이는 부모 대화를 들으면서 자연스럽게 이 언어를 습득한다.



아이에게 전해주는 가장 쉽고도 값진 선물은 자신의 모국어


현재 한국에도 다문화 가정이 꾸준히 늘고 있고, 한국인이 다문화 가정을 이루어 해외에서 사는 사람들도 과거보다 훨씬 많아지고 있는 추세입니다. 어디든 다문화 가정이 안고 있는 어려움 중 하나가 바로 외국인 배우자와 자녀의 언어 문제인데요. 아이가 자라면 가르치거나 배울 수 있다고 미루지 말고, 아예 모태부터 한국어만으로 대화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입니다. 그렇게 되면 아이의 모국어는 현지어와 한국어 2개가 됩니다.



예를 들어 엄마가 베트남이고 한국에 산다면, 엄마는 늘 아이에게 베트남어로 말함으로써 자신의 모국어를 잊어버리지 않고, 또한 아이가 자라서 엄마의 부모나 친척들과 대화를 할 수 있게 하는 것이죠. 이런 가운데 아빠도 조금씩 베트남어를 배워갈 수 있습니다. 한국에 산다고 한국어만 아이에게 전하지 말고, 외국인 배우자의 언어도 존중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이 글을 쓰고 있는데 "초유스의 동유럽" 블로그에 한국어가 별로 이득이 없는 불어권에 사는 한 분이 조언을 구해왔습니다. 그는 곧 태어날 아이의 언어 교육을 고민하고 있었는데요. 다음과 같은 조언을 했습니다.


저는 부모가 자녀에게 주는 가장 쉽고도 값진 선물은 바로 언어(모국어)라고 생각합니다. 그 선물이 많으면 많을수록 좋겠지만, 실속도 있어야 하죠. 특히 서양 언어권에 사는 사람이 동양 언어 하나쯤 말할 수 있다면(꼭 경제적인 것만이 아니라), 그 이득은 참으로 많을 것입니다. 부부간 언어는 혼용해도 되지만, 적어도 아이에게는 혼용하지 마시고 쭉 한 언어만 사용하면 좋은 결과를 얻을 것입니다. 특히 한국에 있는 부모님이 손자나 손녀가 한국에서 사는 아이처럼 한국말을 한다면 정말 기쁘고 자랑스러워할 것이에요. 먼 훗날 아이는 한국어를 모국어로 가르쳐준 엄마에게 감사하리라 믿습니다. 우리 가정의 언어 교육 예가 다문화 가정을 이루는 사람들에게 좋은 참고가 되길 바랍니다.



Posted by 초유스

[통신원 이메일] 재외 국민투표 참가 뿌듯
/최대석 자유기고가

헌정 사상 처음으로 지난 5일부터 11일까지 엿새간 전세계 164개국 공관에서 실시된 재외국민 대통령 선거에 참여해 소중한 한 표를 행사했다.

투표를 위해 한국대사관이 있는 폴란드 바르샤바까지 왕복 1천㎞를 이동해야하는 번거로움이 따랐지만 의미 있는 대선이라 생각돼 지난 9월 재외국민 선거인으로 등록했다. 하지만 투표일이 다가오자 조금씩 마음이 흔들렸다.

리투아니아인 아내는 선거인 등록땐 별다른 반응이 없다가 막상 투표하러 가기 위해 교통편을 알아보고, 버스표를 구입하려고 하자 부정적인 태도를 보였다. 폭설이 북상하는데다 주말에 딸아이가 사회를 맡은 음악학교 연주회가 있다는 것이다.

"이왕 등록했으니 가야 보람이 있지. 딸아이 공연은 다음에도 있잖아"라며 이해를 구했다.

아내는 "좋게 말하면 비정상이고, 심하게 말하면 미친 것 같아"라며 불평했다.

지난 7일 국제선 버스로 리투아니아 빌뉴스를 출발해 9시간만에 바르샤바에 도착했다.

폴란드 현지인 친구는 모처럼 자신을 방문해준 데에 대해 반가워했다. 그런데 주된 방문 목적이 대통령 선거 투표라고 하니 깜짝 놀라며 주변 사람들에게 "정말 애국자"라며 자랑을 늘어놓았다.

다음날인 8일 주폴란드 한국대사관에 마련된 재외선거 투표장에서 참정권을 행사했다. 투표용지에 고무인을 찍을땐 혹시 올바른 위치에 찍지 못해 무효표가 되지 않을까 손이 떨릴 정도였다.

선거 관계자의 말에 따르면 폴란드에는 유권자가 약 950명이고 재외선거인으로 등록한 사람은 450명 정도라고 한다. 

야간버스를 타고 빌뉴스 집으로 돌아오니 몸은 피곤했지만 소중한 주권을 행사했다는 사실에 가슴이 벅찼다. 

이번 재외국민 대선 투표율은 71.2%로 집계됐지만, 이는 전체 재외 유권자(223만3천여 명)의 7.1%에 그친다고 한다. 

앞으로 우편투표·전자투표 도입 등으로 제도가 보완돼 더 많은 재외국민들이 투표에 참여하게되길 기대해 본다. 

빌뉴스(리투아니아)=chtaesok@hanmail.net

부산일보 2012년 12월 18일 게재
출처: 
http://news20.busan.com/controller/newsController.jsp?subSectionId=1010100000&newsId=201212180000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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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신원 이메일] '최저임금 50% 인상' 공약 표심 흔들

/최대석 자유기고가

리투아니아 국회의원 선거가 지난 14일 열렸다. 리투아니아 역사상 처음으로 4년 임기를 꼬박 채우고 있는 안드류스 쿠빌류스 국무총리가 이끄는 보수 연정이 재집권할 것인지, 아니면 사회민주당·노동당 등 좌파세력 야당이 승리할 것인지 초미의 관심을 끌었다.

미국발 금융위기는 발트 3국도 강타했다. 2009년 리투아니아는 GDP가 15%나 감소했다. 리투아니아 정부는 과감한 지출 삭감과 세금 인상 등으로 위기를 어느 정도 극복했고, 경제성장률이 올해는 2.5%, 내년은 3%로 예상되고 있다. 따라서 보수 정권의 재집권 가능성이 높게 점쳐졌다.

하지만 총선 결과는 정반대였다. 전체 의석 141석(지역구 71석, 비례대표 70석) 중 비례대표 투표에서 노동당 17석, 사회민주당 15석, 보수당 13석, 자유연합 7석 등으로 야권이 보수 연합세력에 승리한 것이다.

노동당이 승리한 가장 큰 이유는 우선 '최저임금 50% 인상, 실업률 0%' 공약이 꼽히고 있다. 생존문제에 절실한 계층으로부터 지지를 이끌어내는 데 성공했다는 평가다.

하지만 보수당의 역전 가능성은 아직 남아있다. 지역구에서 한 후보자가 50%이상 득표하지 못하면 최다득표자 2인으로 결선투표를 치러야하는 규정 때문이다.

현재 71개 지역구에서 50%이상 득표자는 단 3명만 나왔을 뿐이다. 오는 28일 열릴 2차 결선투표에는 남은 68석을 놓고 각축전이 벌어진다.

현재 보수당은 1차투표 득표수 1위에 올라 최다의석 정당이 될 것이란 전망이 조금씩 나오고 있다. 더군다나 보수당은 수도 빌뉴스와 제2도시 카우나스에서도 가장 높은 득표율을 기록했다.

리투아니아는 2013년 유로본드를 상환해야 하고, 2014년 유로존 가입을 희망하고 있다. 야당인 노동당이 내건 '최저임금 인상' 공약이 비례대표를 넘어 지역구까지 석권하는데 도움을 줄지, 또 이로 인해 공약이 현실화될 수 있을지 국민들은 주목하고 있다.

빌뉴스(리투아니아)=chtaesok@hanmail.net

부산일보 2012년 10월 23일 게재

http://news20.busan.com/controller/newsController.jsp?sectionId=1010100000&subSectionId=1010100000&newsId=201210230000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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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투아니아 빌뉴스서 집단매장지 발견… 굶주림과 추위·전염병으로 사망 추정 

리투아니아의 수도 빌뉴스는 우리에게는 그리 많이 알려지지 않은 도시다. 하지만 빌뉴스는 중세 이래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정치 중심지로 동유럽의 건축과 문화에 큰 영향을 미쳤다. 빌뉴스의 구시가지는 잦은 외세의 침략과 그로 인한 파손에도 불구하고 고딕, 르네상스, 바로크 양식의 건축물들이 잘 보존되어 있어 1994년 유네스코에 의해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기도 했다. 

빌뉴스의 구시가지를 관광하다 보면 안내원이나 현지인으로부터 꼭 듣게 되는 말이 있다. 바로 후기 고딕 건축물의 걸작이라고 평가되는 안나성당에 대한 자부심 섞인 자랑이다. “나폴레옹이 빌뉴스에 체류했을 때 이 성당을 보고 ‘내 손바닥 위에 얹어 파리로 가져가고 싶다’고 말했다.” 이 성당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리투아니아 대통령궁에서는 나폴레옹이 이곳에 잠시 살았다는 설명이 더해진다.

어떻게 프랑스 황제였던 나폴레옹이 동유럽의 소국인 리투아니아에 살았던 걸까? 나폴레옹이 1812년 러시아를 침공할 당시, 리투아니아를 거쳐갔기 때문이다. 무려 50만의 대군을 동원한 이 침공은 러시아의 광활한 영토와 추위에 대한 대책이 미비했던 나폴레옹군의 참패로 끝났다고 역사는 기록하고 있다.

2000여구 유골 전 세계인 주목

그런데 최근 빌뉴스는 190년 전에 이 도시를 거쳐갔던 나폴레옹으로 인해 다시 한번 전 세계의 주목을 받았다. 지난해 가을, 빌뉴스 북구의 주택개발구역에서 우연히 집단으로 매장된 2000여구의 유골이 발견되었다. 건축 인부들이 통신 케이블을 설치하기 위해 판 구덩이에서 모래로 뒤덮인 수많은 유골들이 나온 것이다. 

처음에 사람들은 이 유골들을 제2차 세계대전 당시의 전사자들로 추측했다. 유골들이 발견된 지역이 구소련 군기지 내에 위치한 점으로 미루어보아 소련 점령시대 비밀경찰에 의해 살해된 반체제인사들일 것이라는 추측도 무성했다. 그러나 법의학자와 고고학자들의 연구 결과, 이 유골은 놀랍게도 190년 전 사망한 나폴레옹 군대의 것임이 밝혀졌다.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 발굴작업이 진행됨에 따라 프랑스 군대 제복의 단추, 나폴레옹의 얼굴이 새겨진 동전 등이 쏟아져 나왔다. 집단매장지의 발굴책임자인 빌뉴스대학의 아루나스 바르쿠스 교수는 지난 9월2일 이들 유골이 1812년 러시아를 침공한 프랑스군의 것이라고 발표했다.

나폴레옹군의 유골 발굴은 곧 전 세계적인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지난 9일 영국의 BBC방송과 미국의 디스커버리 채널 방송이 이 집단매장지를 현지 촬영하는 가운데 발굴작업이 다시 속개되었다. 발굴에 참여한 고고학자 알비나스 쿤쩨비추스는 “10일 오전까지 50여구의 유골이 더 발견됐다. 앞으로도 더 많은 유골이 발견될 것으로 보인다. 적어도 4만명의 군인들이 빌뉴스에 매장되었을 것으로 추정한다”고 말했다.

역사상 프랑스 군대가 리투아니아 영토를 밟은 것은 나폴레옹의 러시아 침공 단 한 번뿐이다. 1812년 6월 나폴레옹은 유럽 여러 민족으로 구성된 50만명의 대부대를 이끌고 리투아니아를 통해 러시아를 침공했다. 빌뉴스에 주재한 러시아 총독이자 러시아군 총사령관이던 미하일 쿠투조프는 나폴레옹 군대에 직접 대항하지 않고 초토전술을 펼치면서 퇴각했다. 보로디노에서 격렬한 전투를 펼친 나폴레옹 군대는 9월 중순 텅 빈 모스크바에 입성했다. 그날 화재가 발생해 모스크바 대부분이 불타버렸다. 

오랜 원정으로 인한 피곤과 굶주림, 그리고 점점 매서워지는 겨울 한파로 인해 나폴레옹 군대는 최악의 상황을 맞았다. 기대했던 러시아 황제와의 평화협상이 결렬되자 나폴레옹은 퇴각을 명했다. 러시아 남쪽 퇴로는 이미 쿠투조프의 군대에 의해 막혔기 때문에 이들은 다시 리투아니아를 통하는 먼 길로 돌아 귀환해야 했다. 

모스크바 원정 6개월 만에 50만명 중 겨우 5만명이 살아남아 빌뉴스에 도착했다. 하지만 이들은 극도의 배고픔과 피로에 시달리고 있었다. 일부는 의과대학에 난입해 사람의 장기를 약탈해 먹을 정도로 굶주림은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게다가 영하 30℃가 넘는 혹독한 추위가 계속됐다. 패잔병들은 끝내 죽음으로 내몰리고 말았다. 

유럽전쟁사 비밀 밝혀줄 계기

수많은 나폴레옹군이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빌뉴스에서 죽음을 맞았다. 뒤쫓아온 러시아군이 시체를 치우는 데만 3개월이 걸렸다고 한다. 땅이 얼어붙어 무덤을 팔 수조차 없어 시체를 불태우려고 시도했지만, 이번에는 연기와 악취를 견딜 수 없었다. 결국 러시아군은 모스크바로 떠나기 전, 프랑스 군대가 파놓았던 참호 속으로 시체들을 던져 넣었다. 나폴레옹 군대로서는 자기 무덤을 자기가 판 꼴이 되고 말았다. 

유럽에서 나폴레옹 군대의 집단매장지가 발견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올리비에 푸파르 리투아니아 주재 프랑스 부대사는 “규모와 중요성에서 단연 사상 최고의 발견이다. 갑자기 역사가 더욱 생생하게 살아났다”고 말했다. 한편, 빌뉴스의대의 리만타스 얀카우스카스 교수(인류학·해부학)는 “발견된 유골은 전쟁터에서 전사한 것이 아니라 다른 이유, 즉 기아와 추위, 전염병 등으로 인해 사망한 자의 것이다. 유골은 15~25세 사이의 남자의 것으로 전투로 인한 외상의 흔적은 없다. 웅크리고 있는 자세로 보아 추위로 사망했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1812년 당시, 나폴레옹은 패전의 원인을 날씨 탓으로 돌렸다. 하지만 일부 역사학자는 나폴레옹의 치밀하지 못한 계획이 원인이라고 분석했다. 이번 빌뉴스 집단매장지 발견은 나폴레옹의 주장에 한층 무게를 실어주고 있다. 또 코사크인과 러시아인들이 패잔병을 살해하거나 고문했다는 일부의 주장도 그 설득력이 약해지고 있다. 이처럼 이번 발견은 유럽전쟁사에 남아 있는 비극적인 대사건에 얽힌 여러 비밀을 밝혀주는 계기가 되고 있다. 

나폴레옹군의 유골은 프랑스로 귀환되지 않고 오는 10월 빌뉴스 묘지에 매장될 예정이다. 비록 군인들이 프랑스 군대 제복을 입고 죽었지만, 이들의 국적에 대한 의문은 여전히 남아 있기 때문이다. 당시 나폴레옹의 러시아 원정대는 프랑스인, 독일인, 폴란드인, 오스트리아인, 크로아티아인, 벨기에인, 네덜란드인 등 유럽 각국의 군대로 구성되어 있었다. 

건설 현장 불도저에 의해 우연히 세상에 그 모습을 드러낸 나폴레옹 군대의 집단매장지는 유럽연합과 북대서양조약기구 가입을 앞둔 리투아니아에 큰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인근 지역에 또 다른 집단매장지가 있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추가 발굴과 조사에 대한 유럽연합의 지원이 요망되고 있는 것이다. 200년 전의 유럽은 나폴레옹의 무력에 의해 하나가 되었으나 그 결과는 허망했다. 역사는 유럽연합이 과거의 전철을 밟지 않고 각국의 상호이익을 바탕으로 한, 진정한 ‘하나의 유럽’으로 거듭나야 한다는 무언의 교훈을 던져주고 있다. 

< 최대석/ 리투아니아 통신원 > chtaesok@hanmail.net

* 이 기사는 주간동아 제353호 2002년 9월 26일에 게재되었습니다.
출처: http://www.donga.com/docs/magazine/weekly_donga/news353/wd353ff030.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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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대석/ 리투아니아 통신원> chtaesok@hanmail.net

1907년부터 공동통화 제조 유통 … 회비 내고 잡지 구입 등에 사용 

그동안 유럽을 찾아오는 여행객들은 가는 나라마다 새로운 화폐로 환전해야 했다. 여행이 끝날 때쯤이면 각국 동전이 처치 곤란한 짐이 되는가 하면, 베테랑 여행자들은 환율이 좋은 환전소를 찾아 거리를 헤매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는 다르다. 1월부터 유럽연합(EU) 12개국이 유로라는 단일통화를 사용하기 때문이다. 

제2차 세계대전 후부터 유럽 국가들은 경제공동체와 아울러 단일통화 도입을 위해 부단한 노력을 해왔다. 1991년 마스트리히트 조약으로 단일통화 도입이 확정됐고, 1995년에는 단일통화 이름이 ‘유로’로 결정됐다. 유로가 정식 화폐로 도입된 것은 1999년의 일이다. 마침내 2002년부터 자국화폐 대신 유로가 일상생활에서 통용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일부 유럽인들은 이보다 훨씬 오래 전부터 단일통화를 추구해 왔다. 바로 만국공통어 사용을 주장하는 에스페란토 지지자들이다. 

프롬유로는 단일통화에 대한 유럽인들의 인식을 촉진하기 위해 유럽투자은행과 유럽위원회 등이 1990년 설립한 비영리기구다. 이 기구가 펴낸 ‘유럽을 위한 유로’라는 책자에는 1934년 9월13일자 소인이 찍힌 우편엽서가 실려 있다. 루마니아에서 발행된 엽서의 발신지는 스페인, 수신자는 프랑스 에스페란티스토(에스페란토 사용자)다. 에스페란토로 쓰인 이 엽서는 유럽인들에게 호소하는 열 가지 사항을 담고 있다. 유럽연합을 믿어라, 유럽 단일경제구역 창설을 지지하라, 유럽 의회를 대표하는 공동의회 창설을 홍보하라 등 유럽 통합을 지지하는 열 가지 내용 중 네 번째 사항은 ‘공동 유럽군대 창설과 유럽 단일통화 도입을 요구하라’다.

초기부터 단일통화에 큰 관심

에스페란토는 세계평화 실현을 목표로 폴란드인인 자멘호프가 창안해 1887년 발표한 언어다. 에스페란티스토들은 초기부터 만국공통어 실현과 함께 단일통화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비록 에스페란티스토들 사이에서만 통용됐으나 이미 20세기 벽두에 유럽 공동화폐를 실현했던 것이다. 

에스페란티스토들은 언어학자이자 에스페란티스토인 소쉬르의 제안에 따라 1907년부터 제1차 세계대전까지 ‘스페스밀로’라는 공동통화를 제조해 사용했다. 독일 에스페란티스토인 차우나는 1921년부터 유럽 단일통화 연구에 몰두했다. 에스페란토 국제조직인 ‘세계연맹’은 기존 지폐에 이어 1959년부터 ‘스텔로’라는 동전을 통용시켰다. 비록 에스페란티스토 사이에서만 사용됐지만 이 화폐는 회비를 내고 잡지를 구독하거나 도서를 구입하는 등 기존 화폐 기능을 모두 가지고 있었다. 

단일통화의 성공적 도입에 힘을 얻은 EU는 곧 회원국간의 언어문제를 본격적으로 다룰 것으로 보인다. 지금까지 EU는 회원국 언어들을 최대한 존중하는 정책을 고수해 왔다. 하지만 EU 확대를 눈앞에 둔 요즈음 업무어수(業務語數) 축소, 또는 하나의 공용어에 대한 목소리가 부쩍 높아지고 있다. 

일부에서는 중립적이고 배우기 쉬운 에스페란토를 제안하기도 한다. 최근 조사에 따르면 EU 의회 의원의 15% 정도가 EU 내의 원활한 의사소통에 에스페란토가 일정한 기여를 할 것이라고 보았다. ‘하나의 화폐’를 위해 에스페란티스토들이 선구적 역할을 한 것이 드러났듯, ‘하나의 언어’를 위한 이들의 노력 또한 조만간 어떤 형태로든 가시화될 전망이다. 

* 이 기사는 주간동아 2002 년 2월 7일(321호)자로 이미 보도된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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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신원 이메일] 'K-팝' 공연 기원 플래시몹
/최대석 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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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신원 이메일] 'K-팝' 공연 기원 플래시몹
 
지난 6월 한국 가수들의 프랑스 파리 공연은 한류에 대한 유럽인들의 관심이 어느 정도인지를 여실히 보여줬다. 또 이를 계기로 한류의 유럽화와 세계화에 대한 기대감도 커졌다.

프랑스 뿐 아니라 과거 동구권의 불가리아, 리투아니아 등 상대적으로 한류 영향이 덜할 것 같은 지역에서도 팬클럽이 결성돼 활약하는 등 한국 가수들에 대한 관심은 상상 이상이다.

이를 증명하 듯 지난달 30일 폴란드 수도 바르샤바 중심가에 위치한 문화과학궁전 앞 광장에서는 케이 팝(K-POP)' 물결이 확연함을 느낄 수 있는 행사가 열렸다. 문화과학궁전은 복합문화센터이자 바르샤바 최고의 명소이다.

폴란드 전역에서 온 400여명의 K-팝 팬들은 이날 광장에서 '드림스테이지 코리아' 플래시몹(사진)을 펼쳤다. 이번 플래시몹의 주된 목적은 폴란드 K-팝 팬들의 저력을 보여주고, K-팝 가수들의 폴란드 공연을 기원하기 위해서다.

불특정 다수가 온라인으로 장소와 시간을 정한 후 한자리에 다 같이 모여 아주 짧은 시간 동안 특정한 행동을 하는 일반적인 플래시몹과 달리 이들은 단독 혹은 그룹별로 자신들이 좋아하는 2NE1, 티아라, 샤이니, 소녀시대, 미스에이, 동방신기, 슈퍼주니어 등 한국 가수들의 노래와 춤을 펼쳐 보였다. 아울러 태극기와 폴란드 국기 퍼포먼스도 진행됐다.

이 행사는 폴란드 샤이니 팬클럽 회장이자 대학생인 안나 시에르기에이가 조직했다. 폴란드에 있는 샤이니, 슈퍼주니어, 빅뱅 등 팬들의 성원에 힘입어 가장 큰 규모의 플래시몹 행사가 진행된 것이다. 이날 비가 오는 가운데 뜨거운 열기 속에 진행된 플래시몹 행사에서 폴란드 K-팝 팬들은 머지않은 장래에 K-팝 가수들이 바르샤바에서 공연하게 되기를 기원했다.

앞서 주폴란드한국문화원은 지난 5월 21일 중동부유럽 최초로 K-팝 경연대회를 개최, 300여 명이 참가하는 성황을 이뤘다. 

바르샤바(폴란드) chtaesok@hanmail.net
부산일보 2011년 8월 10일 게재 
http://news20.busan.com/news/newsController.jsp?sectionId=1_9&newsId=201108100000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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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신원 이메일] 리투아니아도 '한류 바람'
/ 최대석 자유기고가

빌뉴스대학교 ,한국 문화 배우는 동아리 첫 결성


리투아니아 빌뉴스 대학의 '한빌뉴스' 동아리 회원들이 지난 2일 한복을 곱게 차려입고 한국문화를 소개하고 있다.
 

인구 320만 명인 북동유럽 발트해의 리투아니아에도 한류를 한 눈에 느낄 수 있는 행사가 최근 열렸다. 빌뉴스 대학교에서 한국어 강좌를 수강하고 있는 학생들이 '한빌뉴스'(HANVilnius) 동아리를 결성해 한국 문화 배우기와 알리기에 앞장서고 있는 것이다.

빌뉴스대학교는 1579년 설립된 동유럽에서 유서 깊은 대학교 중 하나이다. 15년 전 여러 해 동안 한국어 강좌가 열렸으나 그 동안 중단되었다가 지난해 9월부터 주말학교 프로그램으로 한국어를 다시 가르치고 있다. 

빌뉴스대학교는 향후 2~3년 내에 정규과목으로 한국관련 학문이 자리 잡길 기대하고 있다.

한국어 수강생들은 함께 정보를 공유하면서 한국을 더 많이 알고, 한국문화를 익히고 이를 대중들에게 알리기 위해 동아리를 결성했다. 4월 2일 동아리 결성식이 열린 빌뉴스대학교 동양학센터 강의실은 100여명의 사람들로 가득 찼다.

창립 회원들은 리투아니아어와 직접 배운 한국어를 사용해 연극적 요소와 함께 재미나게 한글, 역사, 음식, 영화, 대중가요 등에 관한 한국 문화를 소개해 참석자들로부터 큰 호응을 받았다. 특히 스크린을 통해 한국의 대중 가수나 그룹이 등장할 때에는 사방에서 환호성이 터져 나오기도 했다. 

실제 리투아니아에서는 한국 드라마, 영화, 대중가요 등이 인터넷을 통해 젊은층을 중심으로 빠르게 퍼져나가고 있다.

동아리 창립 회원이기도 한 리투아니아인 외교관은 "한국 드라마는 짧고, 상황전개가 빠르데다 서양과는 다른 가치관을 지니고 있어 매우 좋아한다"고 말했다.

빌뉴스(리투아니아)=최대석 통신원 chtaesok@hanmail.net
부산일보 2011년 4월 8일
출처: http://news20.busan.com/news/newsController.jsp?sectionId=1_9&newsId=201104080001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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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신원 이메일] 추석 같은 리투아니아 '망자의 날'
/ 최대석 자유기고가

리투아니아 묘지는 보통 시내나 그 근교에, 사방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햇빛이 잘 드는 언덕에 위치해 있다. 묘는 봉분이 아니고 평분이다. 리투아니아 사람들은 '한 번 묘지를 참배하면 과거에 지은 300가지 죄를 용서받을 수 있다'고 믿고 있다.

일반적으로 묘에는 화초를 심어 꽃밭을 만들어 놓는다. 겨울철을 제외하고는 늘 싱싱하게 피어 있는 꽃이 망자의 넋을 달래고 있다. 사람들은 망자의 기념일 외에도 수시로 묘를 찾아서 이 화원을 정성스럽게 가꾼다.

리투아니아 사람들은 고대부터 한 해의 수확을 마친 후부터 시작해 조상들의 묘를 방문하고, 이는 11월 첫 주에 절정에 이른다. 11월 1일은 '성인의 날', 2일은 '망자의 날'이다. 리투아니아 사람들은 이 두 날을 따로 구별하지 않고 '벨리네스'라 부른다. 망자를 추모하는 날을 뜻한다.

이날 사람들은 고향을 찾아 가족과 함께 조상뿐만 아니라 친척, 친구 그리고 유명 인사 등의 묘를 방문한다. 묘 화단에 흩어진 낙엽을 줍고, 시들은 화초를 제거하고, 새 것을 심는다. 대개 꽃이 활짝 핀 국화를 심는다.

묘와 주변을 청결히 한 후 망자의 영혼이 어둠 속에 헤매지 않도록 촛불을 밝힌다. 긴 시간 침묵으로 촛불을 응시하며, 망자의 선행과 일생을 되돌아보며 기도한다. 밤이 깊어갈수록 타오르는 촛불로 묘지는 그야말로 불야성을 이룬다.

옛날 리투아니아 사람들은 망자의 영혼이 사후세계를 떠나 가족을 방문하러 돌아오고, 가장 좋은 때는 11월이라 믿었다. 11월 1일 밤 망자의 영혼이 들어오도록 창문과 문을 활짝 열어놓았다. 고요함 속에 들리는 바람 소리, 낙엽의 바스락거리는 소리, 나무나 문이 삐걱거리는 소리를 영혼이 찾아오는 징표라 여겼다.

그리고, 식탁 한 자리에 망자를 위해 음식을 마련했다. 음식을 밤새도록 식탁에 놓아두었다가 다음 날 걸인들에게 나눠주었다. 사람들은 걸인들이 죽은 사람과 살아 있는 사람 영혼들 사이의 매개체로 믿었다. 20세기 초까지만 해도 음식을 묘로 가져가 놓아두었다.

망자의 묘를 참배하기 위해 리투아니아 전역에는 사람들의 대이동이 이루어진다. 조상의 넋을 기리는 리투아니아의 오랜 풍습 벨리네스를 지켜볼 때마다 우리나라의 추석 성묘가 떠오른다.

빌뉴스(리투아니아) chtaesok@hanmail.net 

2010년 11월 9일 부산일보
출처: http://news20.busan.com/news/newsController.jsp?sectionId=1_9&newsId=20101110000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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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신원 이메일] 동유럽 최초 흑인시장 탄생  
/ 최대석 자유기고가

지난 24일 치러진 슬로베니아 선거에서 최초로 흑인 시장(市長)이 탄생해 화제를 모으고 있다.

슬로베니아는 과거 남유럽 유고슬라비아 연방에 속했던 나라로 이탈리아, 오스트리아, 크로아티아와 국경을 이루고 있다. 수도는 류블랴나이고 인구는 200만 명의 나라이다. 유럽 연합과 나토 회원국이다.

슬로베니아는 슬라브족 나라에서 가장 잘 사는 나라이다. 2009년 1인당 GDP는 2만4천417 달러이다. 83%가 슬로베니아인이고, 소수민족으로는 세르비아인, 크로아티아인, 보스니아인, 헝가리인, 알바니아인, 이탈리아인이다. 국민 대부분이 백인이고, 거리에서 보이는 흑인은 대부분 관광객이다.

슬로베니아 최초의 흑인 시장을 탄생시킨 도시 피란(Piran)은 슬로베니아 남서부지방에 위치해 있다. 아드리아 해의 피란 만에 둘러싸인 이 도시는 인구가 1만7천 명으로 관광이 주된 수입원이다.

최초 흑인 시장이 된 피터 보스맨(54)은 '피란의 오바마'로 알려져 있고, 아프리카 가나 태생의 의사이다. 그는 옛 유고슬라비아 연방 시절에 슬로베니아로 의학공부를 위해 유학을 온 후 정착하게 되었다.

사회민주당에 소속된 그는 피란 시의원을 역임했고, 이번 선거에서 51.4%를 득표함으로써 현 시장 토마즈 간타르를 누르고 시장에 당선되었다.

선거 유세에서 그는 전기 자동차 도입, 부족한 상점 문제 해결을 위한 인터넷 쇼핑 활성화, 관광 진흥을 위한 공항과 골프장 유치 등을 공약하면서 시민들과의 대화를 적극적으로 전개했다.

선거 유세 동안 인종문제에 대한 이슈가 일어나지 않았고, 시민들은 그를 흑인으로서가 아니라 좋은 사람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이번 그의 시장 당선은 비백인 정치인을 선택할 만큼 슬로베니아 사회가 성숙해졌음을 보여주고 있다.

한편 국어인 슬로베니아어를 능숙하게 말하지 못한다는 지적을 받고 있는 그는 앞으로 자신의 언어능력을 향상시킬 것이라 말했다. 동유럽에서 최초로 흑인 시장에 당선된 그가 임기 중 어떤 성과를 거둘지 벌써 국내외로부터 주목받고 있다.

빌뉴스(리투아니아) 
chtaesok@hanmail.net 

* 부산일보 22면 | 입력시간: 2010-10-26 [10:22:00] 
* 출처: http://news20.busan.com/news/newsController.jsp?sectionId=1_9&newsId=20101026000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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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신원 이메일] 에스토니아 신문들 백지 발행  
/ 최대석 자유기고가

지난주 에스토니아 6대 일간지가 신문 한 면을 백지로 발행한 초유의 사태가 발생했다. 이는 에스토니아의 언론자유를 심각하게 제한하는 것으로 평가받고 있는 새로운 취재원보호법에 항변을 하기 위해서였다.

3개 신문은 첫 면을 백지로 발행했고, 다른 3개 신문은 다른 지면 전체를 백지로 발행했다.

새로운 취재원보호법은 에스토니아 법무부가 마련해 국회 본회의에서 4월 7일 처리될 예정이다.

에스토니아 신문들은 만약 이 법안이 국회를 통과하면 정보를 제공한 취재원의 신원을 밝힐 것을 강요받고, 특히 심층 취재기자들에게 징역형을 부과할 수 있고, 폭로성 기사를 발행하기 전 경고로써 발행자에게 벌금을 물릴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에 에스토니아 신문협회와 기자협회는 이 법안을 적극 반대하고 있다.

에스토니아 정부 관계자는 최근 기자회견을 통해 에스토니아 일간지들의 백지 항변에 맹비난을 퍼부었다.

발틱-코스닷컴에 따르면 국무총리 안드루스 안십은 "언론이 백지로 자신에게 스스로 재갈을 물리고 있다. 법은 어떤 누구에게도 재갈을 물리지 않는다. 이 법은 절대적으로 유럽 기준이고, 처음으로 언론인 보호를 제공하고 있다. 현재 에스토니아는 취재원 보호가 없다. 판사가 어떤 사건이든 기자를 심문할 수 있고, 기자는 진술을 거부할 아무런 법적인 권리가 없다"고 말했다.

재무부장관 유르겐 리기는 "이는 법원이 어려운 범죄사건에서 언론으로부터 정보를 얻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이라고 말했다.

발트 3국에서 가장 북쪽에 위치한 에스토니아는 세계에서 언론 자유를 가장 많이 누리고 있는 나라 중의 한 곳으로 알려져 있다. 2009년 국경 없는 기자회가 발표한 세계 각국 언론자유 지수에 따르면 에스토니아는 6위이다.

현재 에스토니아는 정부와 언론간 갈등이 극에 달하고 있다. 국회에서 이 법안의 통과여부는 아직 불확실하지만, 에스토니아의 세계적인 언론자유 명성에 이미 적지 않은 타격을 입히고 있는 것만은 확실하다. 

빌뉴스(리투아니아) chtaesok@hanmail.net 
2010년 3월 25일자 부산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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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신원 이메일] 리투아니아, 세계 최강 원전 폐쇄 
최대석 자유기고가 

아랍에미리트(UAE) 원자력 발전소 건설 수주는 한국의 원전 능력을 세계에 인식시키는 좋은 계기라 여겨진다. 인구 340만명의 리투아니아에도 원자력 발전소가 있다. 이 발전소는 1천320~700MW를 생산하는 세계 최강 원자력 발전소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1983년부터 가동된 이 발전소가 2009년 12월 31일 밤 11시에 가동이 완전히 중지됐다. 

이번에 마지막으로 폐쇄된 2호기는 리투아니아 전력 필요량의 80%를 생산해 왔다. 이로 인해 리투아니아는 전력 수출국에서 수입국으로 전락하게 되었다. 이로써 리투아니아는 원전을 포기한 최초의 국가로 기록됐다. 리투아니아 정부는 2018년까지 새로운 원전 건설을 계획하고 있다.

소비에트 연방국가 중 하나였던 리투아니아는 2004년 유럽연합(EU) 가입을 위해 1983년부터 가동된 원전 이그날리나 1호기를 2004년 12월 31일까지, 1987년부터 가동된 2호기를 2009년 말까지 폐쇄하기로 EU와 합의했었다. 리투아니아는 전력 부족사태와 경제에 미치는 영향 등을 우려해 그동안 이그날리나 2호기의 폐쇄 연기를 요청해왔다. 하지만 EU는 단호히 이를 거부했다. 

이그날리나가 사용하는 원자로가 문제였다. 체르노빌 원자로와 동일한 RBMK 노형이었기 때문이다. 원전 사상 최악의 사고로 기록된 체르노빌 참사를 유럽은 아직도 생생히 기억한다. 그래서 EU는 원전 폐쇄를 리투아니아의 EU 가입 전제조건으로 제시했다. 원전 폐쇄로 리투아니아의 전기요금은 일제히 올랐다. 리투아니아의 새 원전 건설을 놓고 한국 등 원전 수출 국가들간에 다시 한번 뜨거운 경쟁이 예상된다. 

빌뉴스(리투아니아)=chtaesok@hanmail.net 
부산일보 2010년 1월 4일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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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신원 이메일]  리투아니아 첫 동물학대 징역형
/ 최대석 자유기고가

다리 위에서 개를 던져 전세계 동물애호가들로부터 지탄을 받은 리투아니아의 한 남성이 결국 징역을 살게 되었다.


리투아니아 제2의 도시 카우나스에 사는 스바유나스 베뉴카스(22)씨는 어머니가 살고 있는 시골 마을을 방문했다. 마당에서 키우는 이웃 개가 어머니의 닭들을 해코지하는 것에 대한 분풀이로 그는 지난 11월 14일 그 개를 다리 위에서 밑으로 던졌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단순히 개를 강물에 던져 혼을 내주려고 했지만, 개는 25m 높이에서 맨땅에 떨어졌다. 개는 심하게 부상을 입었지만 다행히 목숨은 살아있었다. 그 후 개는 동물보호소에서 정성껏 치료 받았다. 하지만 부상을 견디지 못하고 11월 22일 세상을 떠났다.

친구들이 그가 다리에서 개를 던지는 장면을 휴대폰으로 촬영해 인터넷에 올렸다. '다리 개'로 명명된 이 동영상은 삽시간에 인터넷 곳곳에 펴져 세계인들의 공분을 불러일으켰다. 리투아니아 현지 경찰이 피의자를 찾아 나서자, 지난달 18일 그는 자진출두해서 경찰조사를 받았다.

리투아니아 법원은 동물학대죄로 지난달 23일 징역 8개월을 그에게 선고했다. 피고인은 이 판결을 받아들이고, 징역살이를 하기로 했다. 그는 동물학대로 징역형을 받은 최초의 리투아니아 사람으로 기록된다. 한편 얼마 전 이웃 나라 라트비아에서는 고양이를 때려 죽게 한 사람이 징역 1년형을 선고받았다. 

지금껏 리투아니아에는 동물학대에 대해 솜방망이 처벌이 이루어져왔다. 리투아니아 형법에 의하면 동물학대로 사회봉사, 벌금, 구금 또는 최고 1년 징역형을 받을 수 있다. 동물을 제대로 보호하지 않아서 병들거나 다치거나 죽을 경우 최고 벌금은 200리타스(10만원)이다. 

현지 언론의 인터넷 여론 조사에 따르면 이번 판결에 대해 "충분하다"가 26%로 나타나고 이보다 더한 "2년 징역형" 12%, "2~4년 징역형" 22%, "더한 징역형" 40%로 나타났다. 이에서 보듯이 최고 1년보다 더 중한 벌을 내려야 한다에 74%가 찬성하고 있다. 이 사건은 동물학대에 대한 경각심과 동물애호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높아지는 계기가 됐다. 

빌뉴스(리투아니아)=chtaesok@hanmail.net
부산일보 2009년 11월 30일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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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신원 이메일] 범죄조직 연루 의혹 국회의장 해임  
/ 최대석 자유기고가

의원 141명으로 구성된 리투아니아 국회가 최근 또 하나의 역사적인 기록을 남겼다. 자신들이 2008년 11월 17일 선출한 아루나스 발린스카스(42세) 국회의장을 다수결로 해임시켰다. 95명이 해임에 찬성했고, 20명이 반대했다.

리투아니아 권력의 중요한 축을 이루는 국회의장이 해임된 이유는 이렇다. 지난 여름 그가 속한 민족부활당은 내분을 겪었고, 이 와중에 한 동료가 발린스카스 의장이 리투아니아 제2의 도시 카우나스를 근거지로 활동하고 있는 닥타라스의 범죄조직과 개인적인 연결을 가지고 있으며, 이 조직을 보호하는데 영향력을 행사했다고 폭로했기 때문이다.

발린스카스는 즉시 그를 명예훼손 혐의로 고소했다. 닥타라스와 함께 찍은 사진 등이 공개됐지만, 그는 이들과의 개인적인 관계가 국회의장으로서의 일에 어떠한 영향력을 미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그는 사임을 택하지 않고 자신의 해명을 국회의원들이 믿어주길 바라면서 해임투표까지 갔다. 결과는 해임이었다.

각종 공연과 연예 프로그램 제작자로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다 2008년 민족부활당을 창당해 정치에 뛰어든 발린스카스는 그동안 많은 일화를 남겼다. 1999년에는 1만5천 리타스(750만원) 벌금형을 받았는데, 벌금을 모두 1센트(5원)짜리로 냈다. 

2002년에는 여자교도소에서 '여죄수 미인 선발 대회'를 개최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그는 해임은 됐지만 여전히 국회의원으로 활동한다. 유명 가수인 그의 아내도 국회의원이다. 앞으로 또 어떤 역할로 리투아니아 정치무대에 나설지 궁금하다.

빌뉴스(리투아니아)=chtaesok@hanmail.net
2009년 9월 24일 9면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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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신원 이메일] '발트의 길' 시위 20년 후 
/ 최대석 자유기고가

올해는 '발트의 길'이 20주년을 맞이한 해이다. '발트의 길'은 1989년 8월 23일 당시 발트 3국의 시민 200여만명이 에스토니아 수도 탈린에서 라트비아 수도 리가를 거쳐 리투아니아 수도 빌뉴스에 이르는 총길이 678km를 인간띠로 연결한 길을 말한다.

1939년 8월 23일 독일 외무장관 리벤트롭과 소련 외무장관 몰로토프가 각각 히틀러와 스탈린의 명을 받고 독소불가침조약에 서명했다. 

몰로토프-리벤트롭 조약으로 불리는 이 조약은 유럽에서의 소련과 독일의 영향권역을 분할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고, 비밀조항으로 소련이 발트 3국을 점령하게 된 계기가 된 것으로 알려졌다.

이 조약 체결 50주년을 맞은 1989년 8월 23일 리투아니아, 라트비아, 에스토니아 사람들은 몰로토프-리벤트롭 조약의 비밀조항 인정과 발트 3국 독립을 요구하는 '발트의 길' 시위를 함으로써 세계를 깜짝 놀라게 했다.

이 '발트의 길'은 유럽과 세계 역사에 중요한 변화를 가져온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 비폭력 평화 시위는 작은 나라 3국의 민족자결성을 높였고, 소련으로부터 독립하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 또한 소련 전역의 민주화운동에 힘을 실어주었다.

올해 가장 주목 받은 행사는 바로 '발트를 위한 심장박동'으로 이름 지어진 이어달리기(http://v.daum.net/link/4058102)였다. 1만9천241명이 참가해 20년 전 당시 '발트의 길' 궤적을 따라 구간별로 이어달렸다. 이들은 평화·단결·독립이라는 '발트의 길' 정신을 계승하기로 다짐했다. 특히 올해는 이 '발트의 길'이 유네스코의 '세계기억' 리스트에 등재돼 세계기록유산으로 보호받게 돼 의미를 더했다.

발트 3국 총리들은 이 날을 맞아 스탈린주의와 나치주의를 비난하는 성명에 서명했다. 

빌뉴스(리투아니아)=chtaesok@hanmail.net 
| 10면 | 입력시간: 2009-09-09 [09:5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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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신원 이메일] 음주운전 대통령 후보 
/ 최대석 자유기고가 

클라이페다는 발트해에 연해 있는 리투아니아의 유일한 항만도시이다. 이곳에서 공증사무소를 운영하고 있는 빌마 워스테가 오는 5월17일로 예정된 대통령 선거에 출마를 선언했다. 노숙자를 자신의 집으로 데리고 가 목욕을 시켜주기도 하고, 주민등록이 말소된 노숙자에게 서류를 찾아주는 등 사회적 약자를 도와주는 사람으로 널리 알려진 사람이다. 

리투아니아가 사회주의에서 탈피해 자본주의를 도입한 지 거의 20년이 되어간다. 그 동안 괄목할만한 경제발전을 이루었다. 

2007년 1인당 GDP는 1만6천700 USD이다. 평균 월급은 2천237 리타스(112만원)이다.

하지만 길거리에서는 쓰레기통을 뒤지는 사람들을 흔히 볼 수 있다. 또 노동자와 사회적 약자 권익보호를 표방하는 노동당의 대표는 리투아니아에서 가장 부유한 사람 중 한 명이다.

이런 모순적인 상황이 머리 속에 겹치면서 노숙자들에게 많은 도움을 주고 있는 이 공증인이 신선한 지도자감으로 다가왔다. 

경제불황으로 삶이 더욱 힘들게 된 사회적 약자의 지지를 기반으로 돌풍이 분다면 대통령궁 입성이 전혀 불가능한 것도 아니다. 

각종 TV 연예프로그램을 제작하고 사회를 맡은 아루나스 발린스카스는 지난 해 국회의원 선거 직전에 정당을 만들었고, 정치 초년생으로 국회의장에 선출된 바 있다. 그러니 기대해 볼만 했다.

하지만 이런 기대감을 일거에 무너뜨린 사건이 일어났다. 

대통령 출마를 밝힌 그가 지난 15일 새벽 클라이페다 시내 중심가에서 음주운전, 정지명령 무시, 과속으로 경찰조사를 받고 있다고 최근 언론이 보도했다. 공격적인 반응으로 수갑까지 채워졌다.

경찰 정지명령을 무시하고 위험운전을 하거나 중한 음주 운전일 경우 1000 라타스(52만원) 벌금과 함께 운전면허증을 압수한다. 전국 언론이 이 사건을 다루었다. 그야말로 자신의 이름을 알리는 데 기여한 셈이다. 

하지만 많은 누리꾼들은 부정적인 댓글을 달고 있다. 그 동안 지역에서 얻은 명망이 이번 사건으로 퇴색된 것이 틀림없다. 리투아니아 대선 결과가 벌써부터 궁금해진다.

빌뉴스(리투아니아)=chtaesok@hanmail.net
 
입력시간: 2009-02-23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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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신원 이메일] 초콜릿 대신 사랑의 입맞춤 
/ 최대석 자유기고가

2월 14일은 밸런타인 데이다. 

흔히 이 날은 초콜릿 선물을 떠올린다. 여자가 초콜릿을 예쁘게 포장해 선물하면서 남자에게 사랑 고백하는 모습을 쉽게 연상할 수 있다. 

하지만 리투아니아의 밸런타인 데이 풍경은 상당히 다르다. 우선 신문 어디를 보아도 그 흔한 초콜릿 광고 하나 없고, 큰 상점에서도 특별 코너가 없다. 사람들은 "밸런타인 데이에는 주로 초콜릿, 화이트 데이에는 사탕을 선물한다"라는 말에 오히려 의아해 한다. 

리투아니아의 밸런타인 데이 풍경은 소박하기 그지없다. 밸런타인 데이의 역사가 길지 않기 때문일까, 아니면 괜히 부산하게 굴지 않는 이곳 사람들의 성격 때문일까? 

같은 유럽대륙에 있으면서도 리투아니아에 밸런타인 데이가 퍼지기 시작한 것은 불과 10여년 밖에 되지 않는다. 젊은이들은 축제 건수가 하나 더 늘어나니 마다할 리 없고, 관련회사나 상점들 또한 매상을 올릴 수 있는 호기가 생겨 좋아하긴 마찬가지다.

하지만 초콜릿을 찾는 사람은 많지 않다. 남자친구가 있는 여성 지인에게 무슨 선물을 생각하느냐고 묻자 "사랑의 입맞춤이면 충분하지 무슨 선물이냐"고 반문했다. 하기야 365일 언제든 사랑을 고백할 수 있는데 굳이 날을 정해 초콜릿으로 사랑을 표현한다는 게 장사꾼들의 상술에 놀아나는 것으로 비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리투아니아에서 선물로 가장 많이 준비하는 것은 하트 모양 과자다. 청소년이나 어린이는 하트 모양 스티커를 사서 친구들의 얼굴이나 옷에 붙여준다. 내가 사용하는 컴퓨터 모니터 위엔 지난 해 딸 아이가 붙인 스티커가 아직도 그대로 있다. 

성인들은 입맞춤만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하트 스티커를 얼굴에 붙이고 환하게 웃으면서 거리를 누비는 청소년들의 모습도 보기에 좋다. 올해 밸런타인 데이에는 우리 가족 모두가 딸아이가 붙여주는 하트 스티커를 얼굴에 붙이고 하루 종일 지낼 것 같다. 한국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도 사랑이 충만한 밸런타인 데이가 되기를 기원한다. 

빌뉴스(리투아니아)=chtaesok@hanmail.net 
입력시간: 2009-02-14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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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신원 이메일] 중국 생산 한국 배 먹은 후 냉가슴
/ 최대석 자유기고가  

가을이 되자 딸아이 요가일래는 "아빠, 언제 또 한국 배 사줄 거야? 한국 배는 정말 맛있잖아! 난 한국 배를 아주 좋아해!"라고 말했다. 몇 해 전 한국에 갔을 때 아주 크고 둥근 한국 배를 우리 식구 모두 먹었다. 그때 그 맛을 잊지 못해 지난해 한 지인이 리투아니아에서도 한국 배를 살 수 있다고 해서 두 말 없이 얼른 사서 먹었다. 얼마 전 요가일래는 올해도 사줄 것을 종용했다. 

하지만 엄마는 가격이 지난해보다 높을 뿐만 아니라 가급적 신토불이 과일을 먹어야 한다는 입장을 폈다. 더군다나 한국에서 이곳 리투아니아까지 오는 동안 신선도가 떨어졌을 것이고, 또한 각종 농약을 쳤을 것이기 때문에 사지 말자고 했다. 

이 한국 배 가격은 5kg에 50리타스(2만5천원)이다. 리투아니아 배는 5kg에 15리타스(7천5백원)이다. 높은 가격이지만, 요가일래가 워낙 졸라대고 또한 일년에 딱 한 번 이곳에서 사먹는 한국 과일이라 결국은 사기로 했다. 지난해 먹었던 바로 그 배 맛이었다. 달고 사근사근 씹히는 맛이 일품이었다. 

지난해와 마찬가지로 배 상자 윗면 "very nice foods and very nice people", "햇살 담은 햇배", "Korean variety pears", "very special pears"라고 적혀있다. 이 문구들을 보면 안에 들어 있는 내용물이 분명 한국 배이다. 

오늘도 한국 배를 달라고 하는 요가일래의 부탁을 들어주기 위해 배 상자를 여는 순간 깜짝 놀랐다. 원산지가 '한국'임을 철석같이 믿었건만 측면에 써진 원산지 표시를 보니 '중국 China'이었다. 신토불이 한국 배가 중국에서 생산이 되다니! 속지주의와 속인주의란 말이 요즈음은 식품에도 적용이 된다는 말인가! 

아내가 옳았다. 구입을 반대하던 아내의 얼굴을 떠올리면서 사려 깊지 못한 내 자신의 행동을 책망해 본다. 이 사실을 가족에게 알리고 못하고 스스로 냉가슴이 되고 말았다. 이제 사고 싶어도 살 수가 없을 것이다. 아내의 현실적 반대를 극복할 최고의 명분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렇게 중국에서 생산된 배가 버젓이 한글 표기로 유럽까지 수출됨으로써 세계에서 인기 좋다고 하는 진짜 한국 배가 피해를 보고 있다고 생각하니 더욱 마음이 상했다.

빌뉴스(리투아니아)=
chtaesok@hanmail.net 
/ 입력시간: 2008. 11.20. 1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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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신원 이메일] 헝가리 여교사 교실서 춤 파문
/ 최대석 자유기고가 

최근 헝가리에서 20대 여교사가 만 15세 남녀 학생들 앞에서 윗옷을 벗고 젖가리개만 남긴 채 춤을 춘 일이 일어나 세계적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소식에 따르면 헝가리 서부의 작은 도시 잘레에게르세그의 한 학교에서 학생들이 '진실 아니면 대담' 놀이를 하고 있었고, 이에 독일인 20대 여교사도 참가했다. 

'대담'을 선택한 여교사는 상의를 벗고, 바지를 내릴 듯 춤을 추었다. 이 장면을 한 남학생이 휴대전화로 촬영해서 인터넷에 올렸다. 이를 본 학부모들이 여교사의 해고를 요구하고 나섰다. 하지만 교장은 아주 소중한 교사이기 때문에 경고는 주어야하겠지만 해고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이 기사를 읽으면서 1990년대초 헝가리에 살았을 때 있었던 몇 가지 일이 생각났다. 당시 젖가리개 없이 속살이 보이는 상의만 입은 젊은 여성들을 길거리에서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었다. 야외수영장에서 여자 친구들이 스스럼없이 젖가리개를 하지 않고 일광욕을 하는 경우도 있었다. 헝가리에서는 여름 옷을 전혀 입지 않고 생활하는 동호인들의 만남도 있다. 

'진실 아니면 대담'은 유럽에서 학생들 사이에 널리 행해지는 놀이이다. 리투아니아 여학생 마르티나의 말에 따르면 이 놀이는 주로 수업 시간에 이루어진다. 교사한테 아주 거슬리는 일임에는 틀림없다. 간혹 "그래, 너희만 놀지 말고 나도 좀 같이 놀자"라는 교사도 있다. 

먼저 '진실 아니면 대담' 중 하나를 선택한다. '대담'을 선택했다면, 다른 친구들로부터 별 희한한 행동을 주문받는다. 예를 들면, '책상에 올라가 동요 부르기', '선생님 앞에 가서 욕하기', '다른 반에 가서 노래하기', '행인에게 엉뚱한 질문하기', '낯선 사람에게 전화해서 물건 팔기' 등이다. 이 주문대로 하지 않으면 놀이에서 제외되고, 한동안 '바보', '겁쟁이'라는 비아냥거림과 손가락질을 받게 된다. 

리투아니아 사람들의 의견으로 아무리 교사가 학생과 격의 없이 어울린다고 하지만, 그래도 옷 벗고 춤추는 것은 지나친 행동이라 지적한다. 그렇지만 그 여교사가 아닌 다른 남학생이든 여학생이든 그 같은 짓궂은 주문을 받을 가능성도 있을 법하다고 말한다.

빌뉴스(리투아니아)=chtaesok@hanmail.net

부산일보 / 입력시간: 2008. 11.11. 1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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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신원 이메일] 장모에게 가장 좋은 선물은 독버섯?
/ 최대석 자유기고가 

한국에선 사위가 오면 씨암탉을 잡아 대접할 정도로 사위를 맞이하는 장모의 정성이 지극하다. 최근 버섯 관련 신문 기사를 읽고, 리투아니아에선 장모에게 선물할 가장 좋은 음식이 바로 광대버섯이라고 농담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리투아니아 광대버섯은 독성이 아주 강해 사망에 이르게 할 수 있는 버섯이다. 

지난 주말 독버섯을 먹고 병원치료를 받은 빌뉴스 시민이 11명이고, 이 중 한 명은 아직도 중태에 빠져 있다. 버섯 따는 철인 지금 리투아니아 숲 속에선 60여 종류의 독버섯이 숨어서 버섯 따는 사람들의 실수를 노리고 있는 듯하다. 리투아니아의 대표적인 독버섯 광대버섯은 리투아니아어로 'musmire(무스미레)'이다. 이는 '파리가 죽었다'라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어 이름에서부터 벌써 맹독성을 느끼게 한다. 

일전에 딸아이는 다음날 버섯을 따러 갈 아빠에게 이렇게 말했다. 

"아빠, 내일 숲에서 모자(갓)가 빨갛고 하얀 점이 많은 버섯은 절대로 따면 안 돼요. 정말 아름다운 버섯이지만 사람을 죽게 하니까요. 조심하세요." 

다음날 비가 와서 버섯을 따러가지 못했다. 

왜 리투아니아 사람들은 이처럼 장모에게 선물할 가장 좋은 음식을 광대버섯이라 농담할까? 궁금해진다. 리투아니아 정착 초기 친구들 집에 초대를 받아 갔을 때 친구들은 집안 곳곳을 구경시켜 주었다. 어떤 친구는 작은방 앞에서 장모가 왔을 때 머무는 '장모방'이라고 소개했다. 다른 친구는 물건을 놓아두는 어두운 방을 '장모방'이라 소개했다. 물론 피하지 못할 경우를 제외하고는 실제로 이 '장모방'에 장모를 머물게 하지는 않는다. 단지 은유적인 표현일 뿐이다. 

주위 사람들을 살펴보면 적지 않은 사람들이 처가에 살고 있다. 보통 단독주택의 1층이 처가고, 2층이 자기 집이다. 그러므로 자연히 장모와 만나는 경우가 잦아지고, 장모가 집안 대소사에 깊이 관여하는 일이 많아진다. 더군다나 리투아니아 가정에서는 아내의 목소리가 남편보다 크다. 이런 상황이다 보니 사위가 골방을 '장모방'이라 부르고, 장모에게 선물할 가장 좋은 음식이 '광대버섯'이라 농담하게 된 것 같다. 

빌뉴스(리투아니아) =chtaesok@hanmail.net
부산일보 / 입력시간: 2008. 09.20. 0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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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신원 이메일] 빌뉴스에서 장막 벗은 북한 그림
/ 최대석 자유기고가  

지난 1월 25일부터 4월 20일까지 3개월에 걸쳐 리투아니아 빌뉴스에서 특별한 전시회가 열려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고 있다. 북한 그림이 리투아니아 응용미술박물관에서 동유럽 최초로 소개되고 있는 것이다. 북한 그림 수집가인 네덜란드인 프란치스쿠스 브뢰르센씨가 2009년 유럽 문화수도로 지정된 빌뉴스에서 우선적으로 북한 그림을 소개하고 싶다는 뜻을 전하자 박물관 측이 이에 응해 이번 전시회가 성사되었다. 

브뢰르센씨는 "2천만여명의 인구를 가진 나라로 반드시 순수예술이 있을 것이라 믿고, 호기심과 예술에 대한 사랑으로 고립된 나라로 알려진 북한을 방문하게 되었다"고 북한 그림 수집 배경을 밝혔다. 그의 전시 제안을 받아들인 리투아니아 응용미술박물관장 로무알다스 부드리스씨는 "작품의 예술성은 더 말할 필요가 없고, 높은 전문성과 대가적인 기법 등이 우리를 매료시켰다"고 말했다. 

수집한 2천여 작품 중 104점이 이번에 전시되었다. 리투아니아에선 전혀 볼 수 없는 수려한 산과 힘찬 기운이 느껴지는 계곡, 세밀하고도 과감한 묘사 등이 관람객들의 시선을 끌었다. 폐쇄적이고 비밀스러운 나라로 알려진 북한의 이러한 그림을 접한 관람객들은 놀라운 표정을 짓는 한편 이색적인 풍경 속에 동양의 미가 물씬 느껴져 인상적이라는 반응이었다. 

관람객 계드라씨는 "그림을 보고 있노라면 꽐꽐 물소리, 윙윙 바람소리와 함께 하면서 내 자신이 자연 속에 있다는 것을 느낀다. 보고 있으면, 그림 속 풍경들이 나를 끌어당기는 것 같다"고 소감을 말했다. 전시회 안내원 에글레씨는 "다른 전시회 때보다도 주말에 특히 더 많은 사람들이 찾아왔다"고 빌뉴스 시민들의 높은 호응도를 전했다. 

이번 빌뉴스 전시회를 통해 그 장막을 벗은 북한 그림들은 아름다운 풍광과 화가들의 뛰어난 실력을 뽐내며 유럽인들에게 좀 더 친근하게 다가갈 기회를 맞았다. 

한편 미술을 통해 북한이 새로운 모습으로 리투아니아인들에게 각인되는 좋은 계기가 되었다. 이번에 전시된 작품들은 앞으로 라트비아 리가, 에스토니아 탈린, 러시아 페테르부르크 등 다른 나라 도시에서도 관람객들을 만날 예정이다. 민간인에 의한 유럽과 북한의 문화예술 교류가 변화하는 북한의 새로운 아이콘으로 부상하고 있다. 

빌뉴스(리투아니아)=chtaesok@hanmail.net
/ 입력시간: 2008. 04.14. 1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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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신원 이메일] 성씨에 붙은 접미사로 결혼여부 판단
/ 최대석 자유기고가 

정말 마음에 드는 어여쁜 여자를 알게 되어 어느 날 분위기 있는 레스토랑에 가서 잔을 기울이며 통성명을 하자 이내 남자의 안색이 바뀐다. 왜일까? 이 여자의 성(姓)이 "-aitė"로 끝나지 않고, "-ienė"로 끝났기 때문이다. 

이렇게 리투아니아 여자들의 성에 붙은 접미사를 통해 상대방이 유부녀인지 처녀인지를 금방 알 수 있다. 

접미사 ”-aitė, -ūtė, -iutė 또는 -ytė"는 아직 결혼을 하지 않은 여자의 성에 붙고, “-ienė”는 결혼한 여자의 성에 붙는다. 남편의 성이 Kazlauskas(카즐라우스카스)이면, 아내의 성은 Kazlauskienė(카즐라우스키에네), 딸의 성은 Kazlauskytė(카즐라우스키테)이다. 그러니 "-ienė"라는 성으로 보아서 남의 아내인 여자 혹은 이혼한 여자가 총각을 유혹한다는 인상을 줄 수 있다.

설사 이혼을 하더라도 여자는 일반적으로 전 남편의 성을 그대로 간직한다. 대부분의 여자들은 비록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자녀로 인해 자녀의 성과 다르지 않게 하기 위해서 전 남편의 성을 계속 유지한다. 하지만 이혼할 때 법원이 결혼 전 자신의 성과 전 남편의 성 중 택일할 수 있는 기회를 준다. 

리투아니아어는 여자의 성(姓)이 결혼 상태를 나타내주는 세계에서 몇 안 되는 언어로 알려져 있다. 일부 여자들은 이처럼 자신의 성에 결혼 유무를 강제로 밝히는 것은 사생활보호에 위배된다고 주장한다. 많은 사람들은 이 주장에 회의적이고, 이를 리투아니아의 아름다운 오랜 전통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현재 리투아니아 법은 결혼하는 여자에게 처녀 때 자신의 성을 계속 보존하고, 또한 미혼인 여자가 예외적인 경우 자신의 성에 "-ienė"를 적용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특히 후자는 나이가 많이 들어 성에서 '결혼도 못한 여자'라고 노출되는 데서 오는 심리적 압박감에서 여자들을 벗어날 수 있게 해주고 있다. 

한편 처녀 때의 성과 결혼 후 남편의 성을 따르면서 생기는 성을 같이 사용하는 여자들이 요즈음 늘고 있다. 빌뉴스(리투아니아)=chtaesok@hanmail.net 

부산일보 / 입력시간: 2008. 07.12. 10:09
Posted by 초유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