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얘기2009. 3. 8. 16:14

리나는 올해 스물여섯 살이다. 열 여섯 살에 학교친구인 동갑내기와 결혼했다. 여덟 살인 아들과 여섯 살인 딸을 두고 있다. 날씬한 몸매를 가졌으나, 둘째아이를 낳은 후 몸이 붓기 시작해 얼마 전엔 100kg이나 나갔다. 그녀는 다혈질이고 통솔력이 있지만 때론 여린 마음을 가졌다. 요리하고 살림하는 것을 아주 좋아한다. 남편과 같이 헌옷장사를 한다. 남편은 우직하고 힘이 좋다. 그는 아내가 시키는 일이면 비록 투덜대면서도 무엇이든 다 한다.

이들은 지지난 해에 허름한 목조가옥을 구입해 아파트에서 단독주택으로 이사를 했다. 알뜰히 살아온 덕분에 이번 가을에 주택의 외부수리까지 마쳤다. 낡은 목조가옥이 캐나다형 플라스틱 가옥으로 변했다. 이젠 인근에서도 아름다운 집으로 알려져 있고, 시가는 산 가격보다 2배나 올랐다.

이렇게 열심히 살아온 리나는 지난 몇 개월 동안 심한 마음고생을 하고 있다. 아무리 다이어트를 해도 줄지 않던 몸무게도 20kg이나 줄었다. 바로 착한 남편의 외도 때문이다. 그녀는 월요일 아침 일찍 찾아 왔다. 늘 힘들고 울상인 얼굴을 했는데 이날은 왠지 얼굴에 생기마저 감돌았다. 그러면서 대뜸 한다는 소리가 "이젠 사랑은 없다"는 것이었다. 비록 웃으며 하는 말이었지만, 그녀의 말은 절규하는 것처럼 들렸다.

남편의 갑작스런 외도

남편은 3년 전 한 유부녀와 정을 통해 한바탕 큰 소란을 피운 적이 있었다. 그녀는 한때 리나와 가장 친했던 사이였다. 그 후 남편은 한눈 팔지 않고 함께 단독주택을 구입했고 직접 자기 손으로 수리까지 말끔히 마쳤다. 하지만 겉으로는 화목하게 가정을 돌보면서도 지난 몇 개월 동안 옛정에 못 이겨 다시 그 여자친구와 바람을 피웠다. 그것도 여러 차례나(참고로 리투아니아에는 간통죄가 없다).

그녀는 이런 남편을 매번 사랑으로 용서하고 받아들였다. 하지만 남편의 결심은 작심삼일이었다. 이날도 남편은 아침 일찍 "이젠 정말 헤어지자. 아이들 양육비로 그동안 함께 모은 재산을 다 남겨둔다" 하고는 홀연히 떠나 버렸다. 기가 막힐 일이었다. 그녀는 또 한 번 배신의 쓴 잔을 마셨다.

지난 번 "정말 마지막이다" 하면서 문을 박차고 나간 남편은 맥없이 돌아와 무릎을 꿇고 눈물로 용서를 빌었다. 그리고 다시 화해한 지난 금요일, 그는 값비싼 강아지 한 마리를 사왔다. 마치 계획이라도 한 듯이 남편은 이 강아지를 아이들에게 남겨두고 월요일에 완전히 집을 떠났다. 그녀는 어쩔 수 없는 그들 둘의 사랑을 운명으로 받아들이고, 모든 것을 체념하기로 결심했다. 그리곤 아이들과 홀로 살 궁리를 했다. 그래서 이날 그녀의 표정이 그토록 홀가분했던 것이다.

검은 벤츠차의 그 남자는 누구?

수요일에 열리는 장날, 그녀는 쏟아지려 하는 눈물을 억지로 참으면서 혼자 차에 헌옷을 싣고 판매대를 설치해 옷을 팔았다. 짬짬이 "언젠가 나에게도 검은 벤츠차를 타고 찾아오는 남자가 있겠지" 하는 생각을 해 보기도 했다. 그런데 장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 보니 뜰에 있어야 할 강아지가 없어졌다. 이웃 아이들이 귀띔했다. "몇 시간 전 검은 벤츠차를 타고 온 한 남자가 강아지를 부르더니 차에 싣고 갔어요."

그녀가 때때로 자기위안을 위해 상상하곤 했던 바로 그 '검은 벤츠차의 남자'가, 하필 남편이 자기 몸처럼 애지중지하던 그 강아지를 몰래 가져갔다니…. 그녀는 '여자의 묘한 예감이라는 게 참으로 특이하구나' 하고 생각했다. 그리고 바로 그 시간, 남편은 곧 다시 무릎 꿇고 돌아와 아이들 방에서 자고 있었다. 그는 "다시 집 나가면 차고에 목을 매달겠다!"는 극단적인 서약까지 했다.

리나의 긍정적인 포용

"이젠 사랑은 없다"고 외치던 리나는 또다시 남편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이번엔 사랑보다는 아이들 때문에. 주위 사람들도 처음에는 남편의 외도와 그녀의 나약함을 싸잡아 비난하였지만, 이젠 그것조차 시들해져 버렸다. 역시 그녀는 외로움에 약한 사람, 막내딸로 자란 탓에 늘 누군가 옆에서 보살펴 주어야 살 수 있는 사람, 집안일에 남편을 병졸처럼 부리지만 막상 그가 눈물을 보이면 한없이 약해지고 마는 아내, 아이들을 생각해 몇 번씩이나 약속을 어긴 남편을 받아들이는 모성애 강한 엄마다.

리투아니아에선 이처럼, 얼마 동안 마음고생이야 있겠지만 "사계절의 변화가 있듯이 부부간 사랑 또한 변화가 없겠는가?"라며 이를 긍정하고 새로운 삶을 위한 계기로 삼는 사람들이 많다. 장단점이야 있겠지만, 한 편으론 마치 과거 우리나라 어머니들의 고뇌 가득한 풍경을 보는 것 같은 묘한 느낌도 피할 수 없다. 하지만 판단은 섣부른 일. 리나와 그녀의 남편이 앞으로 어떤 결실을 맺게 될지는 아무도 모를 일이니까. 일단 긍정적으로 남편의 과오를 포용한 그녀에게 박수를 보내고 싶다.

Posted by 초유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