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모음2008. 10. 25. 17:16

일전에 리투아니아 비사기나스에 살고 있는 옐레나(Jelena) 가족을 방문했다. 에스페란토 행사에서 여러 번 만나 알게 된 친구이다. 이 가족은 아소르티(Asorti)라는 그룹 이름으로 가수 활동을 하고 있다. 주로 옐레나가 노래를 부르고, 남편 에드바르다스는 기타를 치고, 아들 에드가르는 바이올린을 켠다

주말의 짧은 방문이었지만 이 가족의 따뜻한 환대가 인상적이었고, 음악과 다중언어 생활에 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옐레나와 아들은 러시아어로, 아들과 아버지는 리투아니아로, 옐레나와 남편은 에스페란토로, 그리고 모든 가족이 모일 때는 러시아어로 말한다. 언어생활이 복잡해 보이지만 상대방을 보자마자 자동적으로 언어전환이 되어 아무런 불편이 없다고 한다. 이 덕분에 세 식구 모두가 세 개의 언어를 능숙하게 말한다.  

가장 흥미 있는 것은 바로 이들 피에 있는 민족성이 너무 다양하다는 점이다. 이날은 “다민족 사회” 혹은 “다민족 국가”라는 말에 덧붙여 “다민족 인간”이라는 말이 더욱 각인되었다. 한국처럼 단일민족이 한 국가에 사는 곳에는 낯설지만, 유럽에서 특히 국경지대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익숙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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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남편의 할머니는 미국인이었다. 이 할머니는 공산주의자였는데 2차 대전 후 미국을 떠나 공산주의국가인 리투아니아로 이주해 리투아니아인과 결혼을 해 눌러 앉았다. 옐레나의 민족성은 좀 더 복잡하다. 우선 그녀 아버지의 아버지는 라트비아인이고 어머니는 폴란드인이다. 옐레나 아버지는 소련 시대 때 일자리를 찾아 시베리아 광산에서 일하다가 에스토니아에서 온 부인을 만났다. 이 부인의 부모님은 스탈린 시대 때 에스토니아 탈린에서 시베리아로 강제 이주를 당했다. 이 부인의 어머니는 우크라이나인이고, 아버지는 에스토인아인이다.

옐레나 부모님은 결혼 후 시베리아를 떠나 카자흐스탄에서 살았다. 옐레나 아버지는 카자흐스탄에서 옐레나에게 라트비아 고향에 대한 많은 이야기를 해주었다. 그 영향으로 부모 곁을 떠나 옐레나는 어린 소녀로 아버지의 고향 라트비아에서 음악공부를 했다. 이후 부모도 라트비아에 왔지만 일자리가 없어 지금 살고 있는 리투아니아에서 일자리를 구해 지금까지 살아오고 있다.

이렇게 옐레나는 라트비아인-폴란드인에서 태어난 아버지와 에스토니아인-우크라이나인에서 태어난 어머니를 두고 있다. 그녀의 피 속에는 네 민족이 자리 잡고 있다. 옐레나의 아들은 이 네 민족의 피에 다시 리투아니아와 미국 피가 더 섞어있다. 옐레나와 남편의 조모, 증조모, 고조모의 민족성까지 고려해본다면 이들의 피 속에 수많은 민족의 피가 섞어 있음을 쉽게 헤아릴 수 있다.

아들은 리투아니아에 살고 또한 아버지의 국적이 리투아니아이지만 아버지를 따르지 않고 민족성이 더 복잡한 어머니를 따라 라트비아인이라고 한다. 비록 이것은 여권상 표기에 그치지만, 아버지를 따르지 않고 어머니를 따르는 것을 보면 이곳에 흔히 볼 수 있는 강한 모계사회의 전통을 엿볼 수가 있다. 우리 같으면 아버지를 따르지 않는다고 호적에서 파내버리겠다니 이혼을 하겠다니 하는 등 한 바탕 집안 소동을 벌일 법도 한 데 이곳에서는 아들 너 스스로가 결정할 일이니 아버지인 내가 어찌 너의 고유권한을 간섭할 수 있겠느냐 하는 식이다.

그래서 그런지 이들은 민족성에 그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고 있다. 이들은 어느 민족에 속해 있다기보다는 지금 살고 있는 곳에 충실하면서 그저 한 인간으로서 살아가는 것을 더 중요시한다.

     * 아들 에드가르의 바이올린 연주   * 가족사진 출처: esperanto.cri.cn

Posted by 초유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