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의 북동 변방국으로 여겨지는 리투아니아에 살면서 최근 깜짝 놀라운 사실 하나를 알게 되었다. 역사를 전공한 최만희 선생이 페이스북으로 알려준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 제4호>>에 실린 내용이다. 

국제적으로 한국을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승인한 두 번째 나라가 리투아니아라는 사실이다. 대한민국 임시 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 1919년-1948년)는 1919년 3·1독립선언에 기초하여 일본 제국의 대한제국 침략과 한반도 강점을 부정하고 한국 국내외의 항일 독립운동을 지도하기 위한 목적으로 1919년 4월 13일 중화민국 상하이에서 설립되었다. 

정확한 이해를 돕기 위해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 제4호>>에 실린 내용을 소개한다[출처 source].   
中韓文化協會 좌담회
-한국 임시정부 승인 문제를 토론-
 <본보 발신>
 9월 22일 오후 2시 중한문화협회는 鄒容路에 있는 협회 식당에서 한국 임시정부 승인 문제 좌담회를 개최하였다. 이 자리에 참석한 인사들은 한국과 중국인을 합하여 100여 명이었고, 먼저 주석 司徒德 선생의 개회 보고가 있은 뒤, 이어서 參政員 錢公來 선생의 발언이 있었다. 錢 참정원은 대단히 강개한 어조로 中·韓 관계와, 과거 한국 친구들과 함께 고생해 온 경과를 설명하고, 한국이 독립하는 그날 우리들은 다같이 東北에서 다시 만나자고 말하였다.
 參政員 胡秋原 선생은 말하기를,
 “한국 문제는 이미 세계 문제로 되었고, 한국 임시정부를 승인해 주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
 미국이 사이판섬 점령 이후, 일본은 자국의 중대한 위협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으나, 그들은 아직도 투항할 준비를 하지 않고 있으며, 중국의 전장을 최후의 결전장으로 지목하는 동시에, 일본 근해에 작전을 준비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미국은 중국의 상륙에 불구하고 반드시 한반도에 먼저 상륙함으로써 일본을 격파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되면 한국 인민들은 반드시 동맹군을 도울 것인 바, 우리의 한국 임시 정부의 신속한 승인은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한국 정부는 이미 수십 년의 역사가 있으며, 우리 중국은 일찍이 실제로 승인한 바 있고, 따라서 우리는 다시 법률상의 승인을 요구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한국 인민을 고무·격려함으로써 더욱 분발하여 반일운동에 참가하게 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인 것이다. 만일 우리가 한국 정부를 승인하지 않는다면 효과적인 그들의 역량을 기대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현재 동맹국은 遠東의 각 민족 문제에 대하여 명백한 정책을 발표한 바 없는 만큼 우리가 먼저 한국 임시정부를 승인한다면, 이것은 동방의 여러 민족에게 크나큰 격려와 고무가 될 것이다. 더욱이 중국과 한국은 과거와 현재를 막론하고 밀접한 관계에 있으며, 오늘 한국 임시정부 승인 문제는 중국 외교상의 큰 문제이며, 소련 역시 자유 독립된 새 한국의 출현을 크게 환영하리라 믿는 바이다.
 우리는 마땅히 한국 임시정부 승인 문제를 발의하여 광범위한 여론을 불러일으키고, 전 중국과 전 세계의 주의를 환기, 촉진시켜야 한다.”
 한국 임시정부의 申翼熙 선생은 한국 정부의 역사적 변천을 보고하고, 아울러 中山 선생이 정식으로 한국 임시정부를 승인한 경과를 약술하여,
 “3·1 운동 당시 33인이 독립 선언을 발표하였으며, 또한 각계의 영수들이 漢城에서 정부를 조직하고, 아울러 이승만·李東輝 등을 선거하여 국무를 주지하게 하였으며, 이러한 환경과 배경으로 부득이 상해로 옮기지 않을 수 없었다. 1919년 9월 8일, 국제적으로 두 번째로 리투아니아(Lithuania) 국회에서 한국 임시정부 승인안이 통과되었고, 1920년 가을 이승만 박사가 미국에서 상해로 와서 국무를 맡았고, 정부로부터 申圭植 선생이 광동으로 파견되어 孫선생을 만나 援軍을 요청하였으며, 11월 18일 孫中山 선생은 신선생과 회견하고 한국 임시 정부 승인을 정식으로 성명하였고, 北伐이 성공했을 당시 한국과 맺은 조약을 정식으로 약정했다.” 고 말하였다.
 이어서 傅律士 況麟은,
 “중국은 사실상 한국 임시정부를 승인하였으며, 단지 법률상의 승인이 이루어지지 않았을 뿐이다. 이로 인하여 국제상의 동정이 이르지 못할까 두려우며, 우리들의 이해관계를 위해서도 어떤 정부의 승인이 필요하니 마땅히 승인하는 것이 옳다. 우리들은 반드시 법률상으로 한국 임시정부를 승인해야 한다. 우리들은 中韓文協이 유력한 여론을 불러일으킴과 동시에, 정부에 대하여 우리들은 한국 임시정부의 승인을 정식으로 요구하며, 아울러 한국 승인이 이루어지기를 촉구할 건이다.” 라고 말하였다.
 또 陳行健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한국 임시정부 승인 문제는 전략상으로나 중국의 외교상 가장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며, 우리가 만일 한국 임시정부의 말을 승인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반침략전쟁에 좋지 않은 영향을 주게 되며, 한국 임시정부가 이미 지휘하고 있는 반일 작전에도 암영을 던져 주는 것이며, 동시에 전인민을 동원한 항전을 영도함으로써 한국 임시 정부는 승인을 받을 자격을 얻는 것이라 하겠으며, 미국의 租借法이 한국에도 적용되기를 바라는 바이다.”
 임시정부 군무부장 金若山 선생은, “중·한 양국은 공동 작전의 역사적 관계를 가지고 있으니, 300여 년 전에는 한국을 도와 일본을 쳐부수었고, 지금은 한국 임시정부가 국제적인 자격을 획득하도록 그 기능을 발휘하고 있다. 한국 임시정부 승인 문제에 관한 한, 다만 중국에서의 참정회의 찬성이 있을 뿐, 영국이라 미국에서는 한국인은 정치적 경험이 없어 독립 국가를 이룰 수 없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는데, 이것은 큰 오산이 아닐 수 없다. 미국은 독립되기 전에, 소련이나 중국도 독립되기 이전에는 정치적 경험이 없었으며, 몇 번의 시험을 거쳐 비로소 참신한 정치가 수반된 강대한 독립 국가를 이룬 것이다. 더구나 이번의 동맹국의 전쟁은 반침략적 민주전쟁이며, 만일 한국이 독립이란 말을 할 수 없다면, 이번의 전쟁 목적은 다시 변명할 말이 없다. 태평양 전쟁이 반격을 시작한 이 시기에 있어서, 한국은 지리적으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며, 따라서 동맹국은 한국 문제에 있어서 특별한 주의와 동시에 우리로 하여금 국내외를 막론하고 적극적인 반일 투쟁에 매진하게 하며 역량을 다하여 독립을 쟁취해야 한다.” 고 역설했다.
 김약산 선생의 말이 있은 뒤, 많은 중국 인사들이 등단하여 위와 같은 주장을 열렬히 발표하였으며, 중국·영국·미국으로 하여금 한국 임시정부의 조속한 승인을 촉구하였다.

신익희 말에 따르면 
1) 중산(쑨원, 손문)이 정식으로 한국 임시정부를 승인 
2) 1919년 9월 8일 국제적으로 두 번째로 리투아니아 국회에서 한국 임시정부 승인안이 통과

가.
위 내용을 살펴보면 중산이 정식으로 한국 임시정부를 승인했지만, 법률상으로 아직 승인 절차가 완료되지 않았다. 그래서 이날 토론회에 참석한 인사들이 법률상으로 한국 임시정부를 승인할 것을 촉구하고 있다.

그렇다면 국제적으로 첫 번째로 승인한 나라는? 
당시 한국의 독립 운동 지원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창립에 커다란 일조를 한 중산의 중국이 가장 유력시된다. 그런데 이날 모임에서 중국 정부의 법률상 승인이 아직 이뤄지지 않았음을 쉽게 알 수 있다. 비록 법률상 승인은 아직 이뤄지지 않았지만, 신익희는 중산의 승인을 국제적으로 최초로 본 것이 아닐까. 이것이 사실이다면 국회를 통과해 정식으로 대한민국 임정을 승인한 나라는 유럽이 아니라 세계에서 리투아니아가 최초가 되는 것이다. 

나.
임시정부는 1919년 8월 스위스 루체른에서 25개국이 모인 국제사회당대회에 대표단을 파견했다. 김규식이 이끌던 파리위원부가 주된 역할을 했다. 이때 한국독립승인결의안을 통과시키는 성과를 이뤄냈다. 한국의 독립을 승인한 첫 국제회의였다. 신익희가 이것을 첫 번째로 간주했을 수도 있겠다. 

당시 리투아니아로 돌아와보자.
신익희가 언급한 리투아니아 국회는 없었다. 
14-15세기 유럽에서 가장 넓은 영토를 가졌던 리투아니아는 1795년부터 러시아 지배를 받아왔다. 1차 대전 당시 러시아 세력을 쫓아낸 독일 제국 지배하에서 놓였다. 1917년 9월 18일-23일 요나스 바사나비츄스가 주도한 빌뉴스 회의에서 리루아니아 독립국가 건설을 결의하고, 리투아니아 평의회(Lietuvos Taryba)를 조직했다. 

1918년 20명의 평의회 구성원이 리투아니아 독립선언에 서명하고 이를 발표했다. 1918년 7월 11일 입헌군주제를 채택하고 군주에 독일 제국의 뷔르템베르크 왕국의 빌헬름 공작을 민다우가스 2세 왕으로 선출했다. 하지만 독일 당국이 이를 무효로 선언했기 때문에 그는 즉위하지 못했다. 당시 리투아니아가 군주제를 채택한 이유는 독일으로부터 침략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독일 제국이 1차 대전에서 패한 후 1918년 11월 11일 평의회는 리투아니아 행정부를 구성했다. 1919년 1월 2일 평의회는 빌뉴스에서 카우나스로 이전한 후 4월 19일 초대 대통령으로 안타나스 스메토나를 선출했다. 1920년 5월 15일 제헌의회가 구성되자, 평의회는 그 역할을 종료했다. 제헌국회에서 리투아니아는 공화제를 채택했다.  

오늘날 국회에 해당하는 리투아니아 세이마스(seimas)가 1920년 5월 15일 최초로 개원되었기 때문에 1919년 9월 8일 한국 임정을 승인한 리투아니아 국회는 곧 당시 최고 의결기관이었던 리투아니아 국가평의회였음을 알 수 있다. 장소는 리투아니아 임시수도였던 카우나스(Kaunas)이고, 대통령은 안타나스 스메토나(Antanas Smetona)이다.   

한편 1920년 5월 조소앙이 리투아니아를 방문한 사실이 기록으로 남아있다[출처 위키백과]. 
조소앙은 임시정부의 국체(國體)와 정체(政體)의 이론정립 및 대외홍보 등에서 주역으로 활동하였으며 1919년 5월에는 파리강회회의에 참석하기 위하여 유럽에 갔으나 이미 회의가 종료되었으므로 유럽 각지를 여행하며 한국 독립에 대한 국제사회의 지지를 호소하고 1919년 8월에는 스위스와 네덜란드에서 연이어 열린 국제사회당 대회에 참석하여, 한국의 독립에 관한 결의안을 통과시키기에 이르렀는데 당시 사회주의국제연맹 총회에 한국인으로는 최초로 참석한 사람 중의 한사람이기도 하였다. 9월에는 영국을 방문하여 영국노동당 인사와도 교류하였다. 1920년 2월에는 파리에서 앙리 베르그송을 만났으며 4월에는 영국 런던에서 맥켄지를 만나고 노동당의 맥도날드 등을 만나 일제의 만행을 규탄하고 독립을 호소하였다. 5월에는 덴마크, 리투아니아, 에스토니아를 방문하고 소련으로가서 소련 공산당을 방문한 뒤, 소련 내 여러 곳을 방문하였다.


리투아니아의 한국 임정 승인과 조소앙 방문과 관련해서 리투아니아측 자료를 국립도서관 등지에서 찾아보았으나 아직 성과를 얻지 못한 것이 아쉽다. 리투아니아의 한국 임정 승인에 고마워하는 한 한국인 교사는 한국에서도 살 수 있는 리투아니아산 담배를 즐긴다고 한다. 나 또한 이 사실을 알게 되자 몇 해 전 열기구를 타면서 우연히 발견한 한반도를 꼭 닮은 리투아니아 트라카이 루카 호수가 더욱 의미있게 다가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