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투아니아 빌뉴스에서 열린 100년 맞은 세계에스페란토대회
중립적인 공통어에 영어 우월주의를 넘어서는 대안이 있다네


▣  빌뉴스=글·사진 최대석 전문위원 chtaesok@hanmail.net 

지난 7월23일에서 30일까지 62개국에서 2344명이 리투아니아 수도 빌뉴스에 모여 제90차 세계에스페란토대회를 개최했다. 한국에서도 33명이 참가해 2007년 세계에스페란토청년대회 유치를 위한 물밑 작업을 했다. 이번 세계대회는 리투아니아 역사상 가장 큰 규모의 국제대회로 기록됐다. 언어가 서로 다른 사람들이 만나는 회의에선 늘 통역과 번역이 수반되지만, 이 대회에선 모든 회의와 공연, 강연 등이 오로지 에스페란토 하나만으로 이루어졌다. 어떤 이들은 이를 두고 기적이라 칭하기도 한다. 

한국 2007년 청년대회 물밑 작업 

에스페란토는 자멘호프(1859~1917) 박사가 1887년 바르샤바에서 발표한 세계 공통어를 지향하는 국제어다. 그가 태어난 옛 리투아니아 대공국령인 지금의 폴란드 비아위스토크는 당시 여러 민족이 각기 다른 언어를 사용함으로써 의사소통이 어려워 민족간 불화와 갈등이 빈번했다. 이에 그는 모든 사람이 쉽게 배울 수 있는 중립적인 공통어를 만들어야겠다고 결심하고, 유럽 언어의 공통점과 장점을 활용해 규칙적인 문법과 쉬운 어휘를 기초로 에스페란토를 창안했다. 

빌뉴스 대회는 1905년 세계에스페란토대회가 프랑스 해변도시 볼로뉴에서 최초로 열린 지 100년을 맞이한 기념비적 대회였다. 세계대회는 그동안 1차, 2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열리지 못한 경우를 제외하고 매년 나라를 돌아가며 지속적으로 열리고 있다. 이번 대회는 ‘세계에스페란토대회-문화간 대화 100년’이라는 주제로 열렸다. 특히 리투아니아인, 폴란드인, 루테니아인, 유대인, 카라이마인 등 수많은 문화와 언어가 수세기에 걸쳐 공존한 빌뉴스에서 열려 더욱 의미를 더했다. 

에스페란토가 정말 언어적 기능을 다하고 있는지에 의문을 가지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이 세계대회는 이런 궁금증을 해결해주는 가장 큰 통로 역할을 한다. 불가리아의 농부, 인도의 맹인, 브라질의 대학교수, 리투아니아의 앳된 소녀, 영국의 구순 할아버지, 독일의 노벨상 수상자 등 다양한 나이와 직업의 사람들이 모여 통역 없이 진행된 개막식을 지켜보고 있으니, 공통어야말로 인류를 하나 되게 하는 유일한 수단임을 확신할 수 있었다. 

에스페란토 창안자의 손자이자 에스페란티스토인 루이스 자멘호프는 대회 개막식에서 한 세기가 지났지만 민족간 반목과 혐오감은 여전히 청산되지 않고 있고, 강한 민족의 언어는 약한 민족의 언어를 지속적으로 위협하고 있다면서 100년 전 제1차 세계에스페란토대회에서 행한 할아버지의 연설문 한 대목을 낭독해 많은 공감을 얻었다. 


△ 1905년 프랑스 볼로뉴 대회 이후 세계에스페란토 대회는 100년째다. 이 대회는 리투아니아 역사상 가장 큰 규모의 국제대회였다.

“지금 처음으로 수천년의 꿈이 실현되기 시작했다. 여기 프랑스의 작은 해변 도시에 수많은 나라에서 온 사람들이 모였다. 서로 다른 민족인 우리는 낯선 사람으로 만난 것이 아니고, 서로에게 자기 언어를 강요하지 않고 서로를 이해하는 형제로 모였다. 오늘 영국인과 프랑스인, 폴란드인과 러시아인이 만난 것이 아니라, 바로 사람과 사람이 만났다.” 

발다스 아담쿠스 리투아니아 대통령은 “제1차 대회가 열린 지 100년이 되는 해에 리투아니아 수도 빌뉴스에서 대회가 열린 것에 대단히 기쁘다. 특히 리투아니아는 자멘호프가 에스페란토 최초의 책을 저술하고, 세계 사람들을 결속할 희망을 키운 나라다. 항상 다양한 민족들이 평화롭게 산 리투아니아는 인류의 통일을 이루고자 한 자멘호프를 높이 평가하고 있다. 에스페란티스토 공동체는 다양한 민족간 연대의 완벽한 본보기다”라고 축하했다. 

마쓰우라 고이치로 유네스코 사무총장은 이 대회에 보낸 메시지에서 “우리가 알고 있듯이 에스페란토는 세계 도처에서 언어가 서로 다른 사람들간의 대화를 용이하게 할 목적으로 만들어진 언어다. 모든 이들에게 개방된 문화간 대화의 제안은 공통어와 관련된 국제간 동의를 이루는 꿈으로 향하게 한다. 보편적이고 세계적인 목적을 지닌 에스페란토야말로 문화와 언어를 연결시키는 독특한 도구다”라고 말하면서, 서로 다른 문화 정체성을 지닌 사람과 단체의 조화로운 공존을 위해 함께 노력할 것을 촉구했다. 

세계대회 참여하는 재미로 사는 사람들 

일주일간 지속된 대회는 대회 주제의 심도 있는 논의를 비롯해 다양한 행사로 가득 차 있었다. 대회대학 프로그램에서는 세계 각국의 유수한 대학의 교수들이 나와 천문학, 인문학, 언어학, 문학, 수학, 정보학, 민속학 등 다방면에 걸쳐 강의를 했다. 작가, 방송인, 기자, 법률인, 철도인, 교직자, 자연치료사, 채식주의자, 고양이애호가, 과학자, 동성연애자, 무국적주의자 등 많은 에스페란토 단체들이 회의를 가졌다. 특히 에스페란토 작가협회는 국제펜클럽에 정식으로 등록돼 있으며,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다. 

이러한 학술 및 회의 프로그램 외에도 ‘민족의 밤’을 통해 참가자들은 대회 개최국가인 리투아니아의 민속복장, 민요, 민속춤, 민속음악 등을 접할 수 있었고, 악기 연주회, 노래 및 연극 공연 등 여러 문화행사가 마련됐다. 다양한 관광행사도 열렸다. 예술을 좋아하는 대회 참가자들이 직접 자신의 재능을 선보이는 ‘국제 예술의 밤’도 인기 프로그램 중 하나였다. 한국인 참가자 최윤희씨의 한국춤 공연은 관객들의 많은 갈채를 받았다. 

자멘호프는 이슬람교이든, 유대교인이든, 기독교이든 모두가 신의 아들임을 역설하면서 종교간 대화를 강조했다. 가톨릭교, 개신교, 바하이교, 불교, 오오모토교, 원불교, 정령교의 에스페란티스토들이 분과모임을 개최했다. 특히 한국에서 발생한 원불교는 1980년 에스페란토를 도입해 교서를 꾸준히 에스페란토로 번역해왔고, 교립 원광대학교에 에스페란토를 교양강좌로 개설하는 등 상대적으로 적극적인 활동을 펴왔다. 원불교 에스페란토 운동 25주년을 맞아 이번에 처음으로 분과모임을 열어 원불교 활동을 소개해 참가자들의 큰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 대회기간 중엔 종교 행사도 많이 열렸다. 1980년에 에스페란토를 도입해 적극적인 활동을 펴온 한국 원불교 분과모임도 큰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1994년 게임이론으로 노벨 경제학상을 공동 수상한 독일의 젤텐 박사는 “나는 젊은 시절 에스페란토 운동을 하면서 알게 된 엘리자베트와 결혼을 했으며, 국제어 에스페란토는 지금도 우리의 삶에 아주 중요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라고 말했다. 한국 부산에서 온 정현주씨는 “에스페란토를 한 지 이제 5년이 되었다. 언어적 열등감 없이 여러 나라에서 온 사람들과 자유롭게 대화할 수 있어 너무 좋다. 일년간 열심히 집안일을 하고, 세계대회에 참가하는 재미로 살아가고 있다”라고 했다. 

50년 동안 에스페란토 운동을 열성적으로 하고 세계대회를 무려 20번이나 참가한 세르비아의 시골 할아버지 몸칠로 크르스치는 “나는 시골에 살고 있지만 일본, 독일, 브라질, 토고 등에 사는 친구들과 편지를 주고받으며 늘 세계와 함께 숨쉬고 있다”라고 말했다. 리투아니아에서 온 고등학생 인드레 필레츠키테는 “엄마에게서 에스페란토를 배웠다. 에스페란토는 외워야 할 많은 예외를 가진 복잡한 문법을 지니고 있지 않아서 좋다”라고 말했다. 

세계에스페란토청년회 사무총장인 알렉스 카다르 페트로는 “우리 청년회에서는 에스페란토 사용자들의 여행을 돕고자 무료로 숙박을 제공하는 사람들의 주소목록을 담고 있는 ‘파스포르타 세르보’ 책을 해마다 펴내고 있다. 이를 통해 젊은이들이 피상적으로 여행을 하는 대신 현지인과 함께 어울리면서 더 심도 있게 여행하는 데 기여한다”라고 말했다. 

공식언어만 20개인 유럽연합의 대안 

전세계에서 에스페란토 사용자는 과연 얼마나 될까라는 물음에 답하는 것은 고전음악이나 바둑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라는 물음에 답하는 것과 유사하다. 여러 차례 세계에스페란토협회장을 지낸 함프리 톰킨 박사는 기자회견에서 “에스페란토 사용자 수는 여러분들이 추정하는 것보다 많고, 우리가 기대하는 것보다는 적을 것이다”라고 답했다. 세계에스페란토협회장인 레나토 코르세티 박사는 “최근 들어 에스페란토에 대한 관심이 증대하는 이유 중 하나는 영어의 우월적 지위에서 파생된 언어 문제의 심각성이 드러나고 인터넷 보급이 확산되고 있기 때문이다”라고 진단했다. 

정치·경제·통화 분야에서 완전한 통합을 이뤄가는 유럽연합은 여전히 언어 문제로 골머리를 앓고 있다. 더욱이 2004년 10개국이 추가돼 공식언어만 20개가 된다. 이에 따른 통역사와 번역사의 충원 및 예산 등 중대한 문제에 직면해 있다. 이에 지배적인 언어인 영어를 공식언어로 채택하자는 움직임도 일고 있지만, 각국의 이해관계로 합의를 이끌기가 불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이런 상황에서 자주 등장하는 대안이 바로 중립적인 언어 에스페란토다. 에스페란토가 유럽연합의 언어로, 나아가 세계 인류의 공통언어가 되어 말이 같은 자국민간에 모국어를 사용해 이를 보호하고 더욱 발전시키는 한편 말이 다른 민족간에 에스페란토를 사용해 상호이해와 평화를 이루는 날이 언제 올지 사뭇 기대된다. 

* 이 기사는 한겨레21 제572호 2005년 8월 16일자로 이미 보도된 내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