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움직이는 세계] 러시아에 가면 배신, 배반이야

리투아니아 대통령의 소련 승전기념식 참석 여부 논란…점령기의 박해 기억을 잊지 말자는 의견도 

▣  빌뉴스=글·사진 최대석/ 자유기고가 http://chojus.com 

요즘 리투아니아에서 가장 뜨겁게 타오르는 화두는 ‘5월9일’이다. 

이날은 ‘위대한 조국 전쟁’으로 부르는 제2차 세계대전의 승리의 날로서 옛 소련을 계승한 러시아의 최대 경축일이다. 1939년 독일의 폴란드 침공으로 시작된 제2차 대전에서 소련군은 1945년 5월9일 체코 수도 프라하에 입성함으로써 독일군이 점령했던 유럽 지역 대부분이 연합국의 손에 들어온다. 스탈린은 승전을 선언하는 특별연설을 했고, 이날은 소련시대 가장 큰 국경일로 자리잡았다. 러시아는 오는 5월9일 ‘승리의 날’ 60돌을 맞아 사상 최대 규모의 기념행사를 치를 예정이다. 러시아는 게르하르트 슈뢰더 독일 총리, 자크 시라크 프랑스 대통령은 물론 유럽연합 회원국 25개국 정상을 비롯해 후진타오 중국 국가주석, 고이즈미 준이치로 일본 총리 등 세계 55개국 정상들에게 초청장을 보냈다. 특히 남북한 정상들에게도 초청장을 보낸 것으로 알려져 이 기간 중 남북한 정상회담이 열릴 가능성이 점쳐지는 등 이 기념행사는 벌써부터 세계인의 주목을 받고 있다. 

종전 뒤 붉은 군대가 36만명 살해 

유럽연합 회원국이자 옛 소련연방에 속했던 발트 3국인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정상도 초청장을 받았다. 하지만 막상 초청을 받은 이들 정상은 깊은 고민에 빠졌다. 이들 3국 정상은 초기엔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초청에 공동 대응을 모색했으나, 최근 러시아인들이 상대적으로 많이 거주하는 라트비아 바이라 비케프레이베르가 대통령은 초청에 응해 기념식에 참가를 위해 모스크바로 갈 것이라고 선언했다. 그러나 발다스 아담쿠스 리투아니아 대통령은 여전히 국내외 여론을 주시하면서 장고를 거듭하고 있다. 리투아니아 역사를 조금만 이해한다면 왜 쉽게 모스크바 기념식에 갈 수 없는지를 금방 알 수 있다. 

1945년 스탈린의 승전 선언으로 연합국과 독일간 전쟁은 끝났지만, 리투아니아에는 해방군으로 가장해 들어온 점령군 소련의 붉은 군대에 저항하는 크고 작은 빨치산 전투가 1950년대 초반까지 이어졌다. 스탈린이 선언한 2차 대전 승전으로 리투아니아는 완전히 독립국가 지위를 상실하고 소련에 점령되었기 때문이다. 1940년 소련의 붉은 군대가 리투아니아를 점령한 이후 36만명이 살해당했고, 48만명이 시베리아로 강제로 쫓겨났다. 한편 1990년 리투아니아가 소련 연방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한 뒤 소련은 리투아니아에 석유 공급을 중단하는 등 경제봉쇄를 가해 경제적 공황을 초래했다. 1991년 1월 소련군은 리투아니아 반소련 항쟁세력을 무력으로 진압하는 과정에서 14명을 살해하기도 했다. 


△ 리투아니아의 아담쿠스 대통령(왼쪽)과 파울라우스카스 국회의장. 러시아의 승진기념식에 참석하기 전에 점령 책임을 명확히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더구나 국제적으로 성대하게 치러질 이번 러시아의 60주년 승전기념식에는 러시아 군대 퍼레이드뿐 아니라 2차 대전 승리의 주역인 스탈린 동상이 화려하게 제막될 예정이다. 스탈린이야말로 수많은 리투아니아 국민들을 살해하고 강제로 추방한 장본인이다. 비록 각국 정상들과 함께한 자리일지라도 스탈린 동상 제막식에 서 있거나 헌화하는 리투아니아 대통령 모습은 상상만 해도 끔찍하다는 것이 리투아니아 국민들의 일반적인 정서다. 리투아니아 국민들은 1990년 공산 체제가 무너지자, 도처에 있던 레닌, 스탈린의 동상을 깨부수지 않고, 이를 시베리아와 자연환경이 유사한 리투아니아 남부지방 그루타스 공원에 모아 소련 점령 역사의 산 교육장으로 삼았다. 

아르투라스 파울라우스카스 리투아니아 국회의장은 최근 리투아니아 국영 라디오 방송과의 인터뷰에서 “5월9일 행사에 스탈린 동상 제막식이 있는 것이 사실이면 리투아니아 대통령이 가서는 안 된다”면서 “리투아니아를 점령하고 수많은 리투아니아 국민들에게 피해를 준 사람의 동상 제막식에 참가하는 것은 살육자에게 경의를 표하는 것으로 비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5월9일은 리투아니아엔 경축일이 아니며, 이날부터 반세기의 소련 점령이 시작됐다는 점을 잊어선 안 된다고 덧붙였다. 

라트비아 대통령 “가서 우리 견해 알리자” 

아담쿠스 리투아니아 대통령은 기자회견에서 “러시아와 상호 우호선린 관계를 설정하는 것은 리투아니아가 유럽연합과 나토 회원국이 된 새로운 상황에서 리투아니아가 취하는 가장 중요한 외교정책 중 하나”라고 전제하고, “5월9일이 나치 전체주의에 대한 승리 기념일로 자리매김하는 것은 괜찮다. 하지만 2차 대전의 종말은 반세기 동안 지속된 리투아니아 점령을 수반했다는 역사적 사실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 된다”라고 거듭 강조했다. 


△ 소련군 무장진압으로 사망한 희생자들의 묘지.

소련 점령 전후로 리투아니아 국민 수십만명이 미국으로 이민을 떠났다. 현재 미국에는 리투아니아 전체 국민의 20%에 해당하는 약 70만명의 리투아니아인이 살고 있다. 발다스 아담쿠스 대통령이 일정한 정치적 기반을 두고 있는 미국 리투아니아 교민사회는 최근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승전 60주년 기념식 초청에 응해 모스크바에 가지 말 것을 촉구하고 있다. 만약 간다면 이는 소련 지배로 인해 고통받은 많은 사람들에게 엄청난 정신적 충격을 줄 것이다. 이런 시각에서 리투아니아 유명 정치평론가 림비다스 발타트카는 자신의 일간지 <례투보스 리타스>에 쓴 칼럼에서 5월9일 리투아니아가 국가적으로 소련 점령 시대의 사망자와 유배자를 위한 대대적인 추모행사를 열어 자연스럽게 리투아니아 대통령이 모스크바 초청에 응할 수 없음을 알릴 것을 제안했다. 

한편 발트 3국 가운데 가장 먼저 초청에 응하기로 결정한 바이라 비케프레이베르가 라트비아 대통령은 에스토니아 신문인 <에스티 파에발레흐트>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밝혔다. “가지 않으면, 각국 정상들이 나치 전체주의에 대한 승리를 축하하는 대열에서 빠지게 된다. 이스라엘이 이에 문제제기를 할 수 있을 것이다. 가서 어떠한 전체주의든 인류의 적임을 표방하는 데 참가할 것이다. 붉은 군대가 라트비아를 해방시켰다는 기존 구소련식 견해에 반해 우리가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음을 알려야 한다.” 그는 아직 뚜렷한 입장을 보이지 않은 리투아니아와 에스토니아 대통령에 대해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고 있다. 이를 계기로 그동안 유럽연합과 나토기구 가입 등 중요한 외교정책에서 공조를 취해온 발트 3국 정상간 결속과 협력에 균열이 생길 우려가 있다. 

‘5월9일’ 초청 관련 누리망 기사들엔 수백개의 댓글이 올라오는 등 누리꾼들도 열띤 반응을 보이고 있다. 한 누리꾼은 “러시아인들이 다른 견해를 피력할 기회를 줄 리 만무하다. 가지 않음으로써 다른 견해로 인해 오지 않았다고 하는 것이 더 효과적 방법일 것”이라고 말했고, 또 다른 누리꾼은 “이제 라트비아 대통령은 흰 까마귀가 되었다. 러시아뿐만 아니라 라트비아도 이제 리투아니아에 압력을 가하고 있다”라고 평가했다. 현재 멕시코 휴양도시에서 겨울 휴가를 보내고 있는 발다스 아담쿠스 대통령을 염두에 두고 한 누리꾼은 “만약 모스크바로 간다면, (휴가에서) 돌아오지 않는 것이 더 낫다”라는 의견을 내놓기도 했다. 


△ 공산체제가 무너지자 도처에 있던 레닌과 스탈린의 동상을 모아 놓은 그루타스 공원.

실용외교인가 명분인가 

러시아 초청으로 서방 각국의 정상들이 모여 붉은 광장에서 전체주의에 대한 승리를 경축하는 것에 무게를 더 두느냐, 아니면 소련의 승전일이 곧 리투아니아에 대한 소련의 점령 시작일이라는 역사적 사실에 무게를 더 두느냐에 따라 선택은 달라진다. 과거의 시대적 아픔을 극복하고 화해와 평화를 위한 정상외교의 기회를 십분 활용하는 실용적 측면을 강조할 것인가, 아니면 5월9일은 러시아의 국경일이지만 리투아니아의 피점령일임을 강조해 명분적 측면을 강조할 것인가. 과연 아담쿠스 대통령이 어떻게 결정을 내릴지 자못 궁금해진다. 

* 이 기사는 한겨레21 제547호 2005년 2월 22일자로 이미 보도된 내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