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임 1주년 롤란다스 팍사스 탄핵·사임 압력 … 마피아와 연루·이권개입 등 혐의 짙어 

최대석 / 리투아니아 통신원 chtaesok@hanmail.net
   
지난해 2월26일 열린 팍사스 대통령의 취임식 모습.

2월26일 리투아니아 롤란다스 팍사스 대통령(47)이 취임 1주년을 맞이한다. 하지만 과연 그가 취임 1주년을 무사히 넘길 수 있을지가 리투아니아와 국제사회의 주된 관심사다. 현재 리투아니아 국회가 대통령 선서 위반, 러시아 마피아와의 연루, 이권개입 혐의 등으로 그의 탄핵 여부를 심의하고 있기 때문이다.

소련에서 독립한 뒤 세 번째 치른 지난해 1월 대통령 결선투표에서 팍사스는 55%의 지지율을 얻어 대통령에 당선됐다. 대부분의 정치인들과 탈락한 후보들이 1차 투표에서 1위를 한 전직 대통령 발다스 아담쿠스를 지지했기 때문에 팍사스의 당선은 충격적인 이변이었다. 아담쿠스가 유럽연합(EU)과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가입을 위해 정상외교로 동분서주할 때 팍사스는 러시아인 유리 보리소프가 운영하는 항공회사 ‘아비아 발티카’에게서 거액의 자금을 받아 헬기를 타고 전국을 누비며 선거운동을 했다.

국가안전부장 폭로가 사건 발단

인터넷에 보급되고 있는 ‘팍사스 반대 배너’들.

토목공학과 곡예비행을 전공한 그는 1997년 빌뉴스 시의원으로 정치활동을 시작해 99년 빌뉴스 시장과 총리를 역임했다. 그러나 총리가 된 뒤 불과 몇 개월 지나지 않아 미국의 윌리엄스 인터내셔널이 국영기업 마제이큐 정유회사를 인수하는 데 반대해 총리직을 사임했다. 그러나 2000년 총선에서 자신이 이끈 자유연합과 현 국회의장 아르투라스 파울라우스카스의 사회자유당과 연합해 다시 총리가 됐지만 정부 결정에 일일이 간섭하려는 연합정당의 태도에 불만을 느껴 곧바로 총리직을 내놓았다. 사임 후 그는 자유민주당을 창당해 대통령에 당선되는 등 오뚝이 정치역정을 걸어왔다. 

질서와 변화를 기치로 내걸어 당선된 젊은 팍사스 대통령은 취임 때만 해도 큰 기대를 모았다. 하지만 현재 그는 일생일대의 정치적 위기에 빠져 있다. 문제의 발단은 지난해 10월30일 자신이 리투아니아 스페인대사로 내정한 메치스 라우린쿠스 국가안전부장이 국회의장과 총리 앞으로 대통령과 그의 보좌관이 러시아 범죄조직과 연루돼 있다는 핵폭탄성 내용이 담긴 문건을 제출한 것이다. 이보다 일주일 앞서 리투아니아 언론들은 팍사스 대통령의 딸 잉가 팍사이테(20)가 범죄세계의 대부로 알려진 헨릭카스 닥타라스의 딸 지빌레 닥타라이테의 생일파티에 참석했다고 대서특필했다.

이 문건을 받은 파울라우스카스 국회의장은 이 사건이 국가안보를 위협할 소지가 있다고 판단해 즉각 11월3일 본회의를 소집했다. 라우린쿠스 부장은 “이 사실을 비망록으로 남겨놓을 수도 있지만 이러다간 이 나라가 국제 마피아의 손아귀에 놀아날 것이란 우려 때문에 밝히게 됐다. 나와 대통령 사이의 신뢰는 이미 없어졌다. 내가 독대하여 보고한 기밀정보가 이해 상대자에게 곧바로 누설되기도 했다”고 증언했다. 이날 본회의에서는 연루를 입증하는 혐의자들의 도청된 전화통화가 아무런 여과 없이 생중계로 방송돼 큰 파문을 일으켰다.

이에 국회는 대통령의 국가안보 위협 가능성을 조사하기 위한 한시적 특별위원회를 설치했다. 4주일간 활동을 한 특별위원회는 12월1일 “대통령의 특별지위, 책임, 국내·외 정책 역할을 고려할 때 대통령의 행위는 리투아니아 국가안전을 위협하고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보고서는 △대선 때 팍사스의 선거전략과 홍보를 맡은 러시아 회사 알막스와 거액의 대선자금을 지원한 유리 보리소프가 여전히 대통령과 대통령실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대통령과 보좌관들이 국유재산 사유화와 다른 사업의 이권에 용인할 수 없을 정도의 영향을 미치려고 했다 △대통령의 측근들이 다른 국가기관의 활동을 간섭하는 등 지위를 남용했고, 대통령은 이를 묵인했다 △대통령과 보좌관이 기밀정보를 누설했다는 등의 내용으로 돼 있다. 

웹사이트에 올려진 컴퓨터 합성사진. 리투아니아 혁명을 주도하는 3인의 얼굴을 담은 것으로 왼쪽부터 보리소프, 팍사스, 스마일리테.대통령에게 영향력을 행사한 대선자금의 거액 기부자 보리소프(아래 왼쪽)의 전화통화 내용이 TV를 통해 아무런 여과 없이 공개됐다.(위 부터) 


또한 조사과정에서 팍사스 대통령이 유리 보리소프에게 리투아니아 국적을 부여한 데 대한 합법성 논란이 빚어졌다. 헌법재판소는 이 국적 부여가 불법임을 판결했고, 이민국은 최근 보리소프의 리투아니아 여권을 압수해 폐기처분했으며, 그의 국외 추방을 결정했다. 보리소프는 이에 반발해 그 부당성을 법원에 제소했다. 팍사스와 추종자들은 헌법재판소의 결정을 불신하고 국적 부여는 정당했다고 여전히 주장한다.

12월18일 국회는 86명의 동의를 받아 대통령 탄핵소추 발의를 의결했다. 리투아니아 헌법에 따르면 대통령이 헌법을 위반하거나 대통령 선서를 준수하지 않거나 범죄행위를 한 사실이 밝혀질 때, 국회는 재적의원의 4분의 1인 36명의 동의로 탄핵소추를 발의할 수 있고, 재적의원의 5분의 3인 85명의 동의로 대통령을 탄핵할 수 있다. 현재 국회는 소추위원회를 설치해 관련자들을 조사하고 있다.

사건이 터지자 팍사스 대통령은 연루설을 강력히 부인하며 절대로 사임하지 않겠다고 단언했다. 자신은 대통령 선서와 헌법에 위반하는 행위를 결코 하지 않았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사건 초기 유명 정치대담 텔레비전 프로그램이 ARS 여론조사를 했을 때 대통령 보좌관들이 휴대전화로 600여통의 전화를 해 ‘대통령 지지’에 표를 던진 사실이 나중에 밝혀져 여론조작 의혹까지 받게 됐다. 급기야 대통령은 안보보좌관, 외교보좌관 등 최측근 보좌관 5명을 해임했다. 연루설이 나온 뒤부터 지식인, 종교지도자, 문학인, 자치단체장 등이 팍사스 대통령의 사임을 촉구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대통령을 역임한 알기르다스 브라자우스카스 총리는 “국가 이미지에 나쁜 영향을 미치는 정치광고는 이제 그만 하자. 나 같으면 사임하겠다”며 압박하고 있다.

팍사스 지방 순회하며 무죄 설파

팍사스 대통령은 방송사 및 중앙지의 인터뷰에는 전혀 응하지 않고 지방도시를 순회하며 대중에게 자신의 무죄를 설파하고 있다. 소추위원회에서 자신을 직접 변호하는 방법을 거부하고 대중을 설득하는 길을 택했다. 최근 우크메르게시에서 열린 그의 연설장에서는 극우세력 추종자들까지 합세해 팍사스 대통령을 비난하는 청년에게 주먹을 휘두르는 사태가 벌어졌다. 그는 “이 청년들은 돈에 매수된 사람들이다. 그리고 지방 출신이 초고속으로 대통령이 되자 시기하는 무리들이 득실거린다”고 주장했다. 그는 기존 언론매체를 통해서는 자신의 주장을 제대로 전달할 수 없다고 판단해 대통령실 자체 주간지를 발행하고, 대통령 주례방송연설을 계획하고 있다.

1월13일 그동안 팍사스 대통령의 권위가 얼마나 추락했는지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1991년 1월13일 소련군은 독립을 선언한 리투아니아의 주요기관을 점령하기 위해 무력 공격을 시도했다. 이 과정에서 13명이 총에 맞거나 탱크에 깔려 죽음을 당했다. 리투아니아는 이날을 ‘독립투사일’로 명명하고 매년 국회에서 기념식을 개최해왔다. 이 행사에서 팍사스 대통령의 연설이 있기 직전 다수 야당 의원들은 본회의장을 빠져나갔고, 대통령이 연설을 마쳤을 때 관례인 기립박수는 없었으며 의석은 쥐 죽은 듯 고요했다. 1월13일 훈장 수여식에서 한 수여자가 자신의 이름이 호명되자, “위선적인 대통령이 준 훈장을 받을 수 없다. 이는 리투아니아 독립을 위해 죽은 사람들에 대한 모독이기 때문이다”라고 말하기까지 했다. 

이러한 리투아니아 국내 정치상황을 이유로 최근 이탈리아 대통령과 슬로바키아 대통령은 각각 예정된 리투아니아 방문을 취소했다. 유럽의회는 비공식 외교채널을 통해 팍사스 대통령의 4월 유럽의회 본회의장 연설은 적절하지 않다는 견해를 보내왔다. 이처럼 팍사스 대통령의 탄핵소추와 사임 거부로 유럽연합및 나토 가입을 앞두고 있는 리투아니아는 외교적으로도 점점 고립돼가고 있다.

한편 리투아니아 네티즌들도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다. 러시아 마피아 연루설 인터넷 기사는 댓글이 2000개 이상 달릴 정도다. 팍사스 반대자들은 웹사이트(http://www.paksui-ne.tk/)를 구축해 팍사스를 히틀러에 비유하면서 배너, 플래시, 합성사진 등을 만들어 인터넷에 배포하고 있다. 대선자금, 측근비리, 외교노선, 언론취재 불응 등 대통령을 둘러싼 리투아니아의 현 정국상황이 한국과 유사한 면이 많아 앞으로 리투아니아 정국의 향방이 어떻게 전개될지 더욱 궁금하다. 

* 이 기사는 주간동아 2004년 2월 26일(제423호)자로 이미 보도된 내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