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대석 / 자유기고가 ·에스페란토번역가 ds@chojus.com 

바르샤바 중심가에서 남쪽으로 16킬로미터 떨어진 피아세츠노(Piaseczno)라는 작은 도시에 지난 10년간 아주 친하게 지내온 한 가족이 살고 있다. 62세인 남편(Wieslaw Jedrzejczak)은 폴란드인으로 광고회사에서 근무하다 몇 해 전에 퇴직을 하였고, 같은 나이인 부인(김순애)은 수대에 걸쳐 러시아에서 살아온 한국인으로 현재 프랑스 전자회사인 톰손(Thomson)사에 근무하고 있고, 68년생인 아들(Radoslaw, 한국이름은 동일: 東一)은 바르샤바공과대학교를 졸업하였고 전력설계회사에 다니고 있다.

부인은 1955년 폴란드로 유학을 와서 대학교에서 화학을 전공하였고, 대학교 동창생인 현 남편과 결혼을 하여 이곳에서 45년간 살고 있다. 방이 두 개인 10평 남짓 되는 아파트에 들어서면 복도의 나무벽에는 각국에서 방문한 친구들의 자필서명이 눈에 뛴다. 큰방에 들어가면 앞벽과 뒷벽을 가득 메운 책들이 인상적이다. 좁은 아들방에 들어서면 오른쪽 벽에는 한국에서 가져온 하회탈들이 줄줄이 걸려 있고, 왼쪽 벽 거의 전체는 열쇠고리들이 모래알처럼 빽빽이 걸려 있다. 

일반적으로 폴란드 사람은 하루 8시간 근로를 하고, 주 5일 근무를 한다. 직업에 따라 차이는 있지만 7시에 일을 시작하여 오후 3시에 일을 끝낸다. 따로 점심시간이 없고 11시경에 집에서 준비해 간 샌드위치로 요기를 한다.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 따뜻한 음식으로 점심식사를 푸짐하게 하고 저녁 8시경에 간단한 저녁식사를 한다. 토요일은 집청소, 세탁 등 집안일을 주로 한다. 일요일은 종교인이든 비종교인이든 집안일조차도 하지 않고 푹 쉰다. 여름시간이 적용되는 봄이나 여름에는 해가 길어 평일 오후나 주말에는 가족단위로 인근 공원이나, 호수, 숲속 등으로 나들이 가는 사람들이 많다.

일찍 퇴직한 남편은 5월부터 9월까지 거의 매일 아파트에서 4킬로미터 떨어진 텃밭(우리나라의 주말농장)에서 채소를 가꾸면서 시간을 보낸다. 주로 도시 아파트에 사는 사람들이 이 텃밭을 활용하고 있다. 이 한 개인이 차지하는 텃밭의 크기는 지역에 따라 다소 차이가 있지만 일반적으로 300평방미터(약 90평)이다. 이 텃밭은 집단적으로 도시의 외곽지대나 녹지대에 군데군데 조성되어 있다. 대부분 사람들은 이 텃밭에 조그마한 여름별장을 지어 놓고 있다. 이곳에 자두나무, 벚나무, 사과나무, 배나무, 호도나무 등을 심어 놓고, 감자, 양파, 마늘, 사탕무우, 오이, 토마토, 딸기, 상치 등을 가꾼다. 이 텃밭은 싱싱한 무공해 채소를 자급하는 데 큰 역할을 한다. 남편은 이외에도 중앙아시아와 한국에서 보내온 고추씨, 무우씨, 오이씨, 배추씨를 더 심는다. 특히 이곳에 심은 한국 오이는 달고 물이 많아 아주 맛있다고 한다. 

이 댁의 집안일은 세 사람이 분담한다. 아침식사 후 설거지는 남편이 하고, 점심식사 후 설거지는 아들이 하고, 저녁식사후 설거지는 부인이 한다. 주중 식사준비는 부인이 주로 하고, 주말에는 아들이 주로 한다. 집안청소는 아들이 도맡아 하고, 세탁은 남편이 하고, 다듬이질은 부인이 한다. 쓰레기는 아들이 늘 버린다. 또 다른 집에서는 자기가 먹은 식기는 자기가 씻는 것을 보았다. 이처럼 집안일을 어느 누구에게 일방적으로 부담하는 것이 아니라, 식구 모두가 나누어 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들은 식당에서 외식을 하는 일은 거의 없다. 친척이나 친구들이 모이더라도 집으로 초청을 하여 식사를 한다. 외식을 할 정도로 소득수준이 높지 않고, 또한 식당의 음식값이 집에서 하는 것보다도 몇 배로 비싸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초청을 받아 가면 자기가 마실 술이나 음료수는 가지고 가져가는 것이 상례이다. 친구들과 어울러 맥주집에 가더라도 술값 때문에 의리가 상하는 일도 없다. 왜냐하면 자기가 먹을 술은 자기가 사기 때문이다. 안주도 시킬 필요가 없다. 음식도 자기가 먹은 것은 자기가 낸다. 

이 세 식구는 모두 제각기 취미를 가지고 있다. 남편은 독서가 취미이다. 특히 역사, 정치, 인문지리 등에 관한 많은 책을 읽는다. 하루 평균 겨울철에는 6시간, 여름철에는 밭에서 채소를 가꾸면서 3시간 정도 독서를 한다. 부인은 우표를 수집한다. 어느 날 1965년부터 폴란드에서 발행하는 모든 우표를 수집한 다섯 권의 책을 나에게 보여주면서 폴란드우편사를 강의했다. 아들은 어릴 때부터 각종 열쇠고리를 모아왔다. 지금까지 수집한 세계 각국의 열쇠고리는 약 1400개이다. 평범한 열쇠고리부터 기발한 열쇠고리들이 수없이 많다.

이 댁뿐만 아니라, 이곳 사람들은 가족 구성원간 대화가 많다. 어릴 때 엄하신 아버지의 묻는 말에만 대답을 하던 나의 경험과 비교하면 정말 천양지차다. 이곳에서는 아들과 아버지는 거의 친구처럼 지낸다. 이들의 언어에 경어가 없는 것이 수평적 대화를 활성시키는 한 요인이 아닐까 생각한다. 이들은 대체로 말이 많은 편이다. 때로는 이들의 말많음이 나에게 도움이 되기도 한다. 무슨 일에 대해 물으면 상세하게 일러주기 때문이다.

한 평범한 가족의 사는 모습을 보면서 가장 느끼는 것은 우리처럼 버둥거리며 살지 않고 주어진 생활여건 속에서 여유를 가지면서 살아간다는 것이다. 조그마한 아파트이지만 더 큰 아파트를 이사가려고 악착같이 구두쇠로 살기보다는 한 달에 걸치는 여름휴가 때에는 휴양지에서 일광욕, 산림욕, 해수욕 등을 즐기면서 시간을 보낸다. 주말이면 가족들과 공원이나 숲속에서 산책을 하고, 혹은 텃밭에서 채소를 가꾼다. 음악회나 전시회에도 자주 간다. 이 덕분에 나는 한국에서는 보기 어려운 오페라를 여러 편 관람하였다. 지금은 공산주의체제가 무너지고 시장경제체제가 도입된 후 살아가는 방식도 점점 달라지고 있다. 

* 해피데이스 1999년 6월호 게재
Posted by 초유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