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합군 1946~47년 독일서 몰수한 30만3천톤 수장 … 해변서 용기 발견 ‘공포의 바다’로 돌변 

<최대석/ 리투아니아 통신원>chtaesok@hanmail.net

지난 6월5일 낮 12시30분쯤. 리투아니아 항구도시 클라이페다의 스밀티네 해변에서 일광욕을 즐기던 한 여성이 파도에 떠밀려온 이상한 용기(容器)를 발견하고 경찰에 신고했다. 길이 2m, 지름 30cm로 표면에 해골 그림과 함께 ‘Yp럕ite’(이페리트)이라는 글씨가 적힌 이 용기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발트해에 수장된 화학무기 중 하나로 밝혀졌다. 만약 호기심 많은 어린이나 악의를 품은 사람이 이를 먼저 발견했다면 어떤 결과가 생겼을지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수심이 얕은 발트해에 위험한 화학무기를 대량으로 수장했다는 사실은 1990년대 초기부터 전문가들 사이에 간간이 알려져 왔었다. 그러나 화학무기가 해변에서 발견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그만큼 일반인들이 느끼는 충격은 클 수밖에 없다. 한때 청정해역의 대명사였던 발트해는 이제 공포의 바다로 변하고 있다. 

“실제는 더 많은 양 버려졌을 것” 

발트해에서 발견된 이페리트는 제1차 세계대전중인 1915년 독일이 프랑스 전선에서 처음 사용한 발포성 독가스다. 이후 영국 이라크 독일 러시아 등이 주로 생산했다. 눈과 폐를 손상시키고 화상이나 발포 증세도 나타나는 이 독가스는 5g이면 인명살상도 가능할 만큼 위험한 무기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인 1946년과 47년, 연합군은 독일로부터 약 30만3000톤에 달하는 화학무기를 몰수했다. 이 무기들의 처리문제는 결코 간단치 않았다. 엄청난 환경 재앙을 몰고 올 수도 있는 무기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전쟁에서 승리한 영국 미국 소련은 유럽 분할을 둘러싼 정치문제에 온 정신이 쏠려 있어 환경 따위에는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결국 연합국은 몰수한 화학무기를 서로 분할한 후, 대서양의 깊은 바다 밑에 수장하기로 협약했다. 자료에 따르면 영국이 4만2000톤 혹은 6만5000톤, 소련이 3만5000톤을 인수하고, 나머지는 미국 몫이 되었다. 

그러나 세 나라는 대서양 대신 가까운 발트해를 선택했다. 화학무기를 실은 배를 대서양까지 몰고 나가는 것이 힘들다는 이유에서였다. 또한 몰수한독일 무기뿐만 아니라 자신들이 보유하고 있던 화학무기도 함께 수장했기 때문에 실제로 발트해에 버려진 양은 더 많을 것으로 추정된다. 

영국과 미국은 화학무기를 배에 실어 덴마크와 스웨덴 사이의 카테가트 해협과 덴마크-노르웨이간의 스카케라크 해협에 배와 함께 가라앉혔다. 수심 200m 미만인 이 지역은 현재도 선박의 왕래가 빈번하고 고기잡이가 성행하는 곳이다. 소련은 배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아예 3만5000톤 분량의 폭탄과 포탄을 그대로 바다 밑에 산포(散布)했다. 독물질이 든 폭탄이 터진 장소는 보른홀름섬 인근의 스웨덴 해역과 라트비아 항구도시 리예파야에서 남서쪽으로 70마일 떨어진 해역이다. 과거 소련은 수십년간 이 해역에서 고기잡이를 금지해 왔다. 

영국과 미국 국방부는 1997년 이 작전과 관련한 자료의 비밀유지 기한을 2017년까지 연장했다. 하지만 러시아인들이 비밀의 막(幕)을 조금 열어주었다. 그들은 수장된 화학무기의 이름과 양, 그리고 수장된 장소도 공개했다. 러시아측 자료에 따르면 현재 발트해 밑바닥에는 이페리트, 루이사이트, 사린가스, 비소 등 총 14가지에 달하는 화학무기가 가라앉아 있다. 

발트해에 있는 이 화학무기 쓰레기장에 대해 전문가들의 의견은 다소 엇갈린다. 리투아니아 환경부 소속 해양연구센터 소장인 알기르다스 스타케비추스는 ‘례투보스 지뇨스’지와의 인터뷰에서 “발트해는 넓은 바다이므로 이들 무기가 가라앉아 있다 해도 독물질이 많이 희석되었을 것이다. 우리는 해수 표본을 채취해 바다 오염을 측정하고 있는데 아직 오염은 허용 기준치를 넘지 않고 있다. 또 프랑스 어류학자들이 리투아니아 해변에서 잡힌 어류를 조사했지만 별다른 변화를 찾지 못했다”고 말했다. 반면 전직 러시아 함대의 부사령관 텡기즈 보리소프는 “어부들의 저인망에 화학무기 폭탄이 걸릴 위험이 있다. 얼마 전 러시아 잠수함들이 이 인근을 조사했는데 특수 잠수함 표면에는 아교풀처럼 무엇인가 더덕더덕 붙어 있었다. 그것은 부식된 포탄에서 나온 이페리트였다. 보른홀름섬 근처 약 40m 수심에서는 많은 양의 사린가스가 발견되었다”면서 문제의 심각성을 경고했다. 

수년 내 엄청난 재앙 초래 우려 

지난 90년대 중반부터는 발트해의 화학무기 수장 지역에 대해 몇 차례의 현장조사가 이루어졌다. 가장 최근에는 지난해 12월부터 올해 1월 사이에 러시아, 폴란드 그리고 인근 몇몇 국가 과학자들이 주축이 되어 조사를 벌였다. 이들은 바다 밑바닥에 가라앉은 배에서 화학물질이 새고 있다는 사실과 함께 심하게 부식된 포탄이 분해되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기준치를 200배나 넘는 비소량을 함유한 물과 토양 표본도 있었다. 몇몇 전문가들은 이대로 방치하다가는 수년 내에 대대적으로 독물질이 분출되는 엄청난 재앙을 초래할 수도 있다고 우려하고 있다. 

상상만으로도 무시무시한 이 예측이 현실이 될 경우, 발트해 연안 국가들은 환경 재앙뿐 아니라 경제붕괴를 맞을 가능성이 크다. 어업은 발트해 연안 국가들의 경제에서 큰 몫을 차지한다. 발트해의 연간 어획량은 250만톤에 달한다. 발트해의 어획금지 조치는 곧 국내 생산의 감소로 이어지고 연쇄적인 경제문제가 발생할 것이다. 이는 연안 국가뿐 아니라 유럽연합, 나아가 세계 경제에 큰 파장을 가져올 수도 있다. 

물론 발트해 연안 국가들이 미국 영국 러시아 등 당시 연합군 국가들에 피해보상을 요구하는 방법도 있다. 그러나 이는 2억5000만 유럽인에게 체르노빌 원전사고나 9·11 테러 이상의 공포와 심리적 공황상태를 야기할 것이다. 또 수심이 얕은 발트해에 수장된 거대한 양의 화학무기가 전 세계적으로 알려지면서 테러리스트들의 표적이 될 가능성도 없지 않다.

55년 동안 바다 밑에서 잠자고 있다가 파도에 밀려온 이페리트 용기는 그동안 소극적으로 대처한 국가들에 이 문제의 심각성을 인식시키는 좋은 계기가 되고 있다. 관련 국가들의 원수뿐 아니라 유럽연합과 나토가 이제 적극적인 행동을 취하려는 분위기다. 한편 이번 사건으로 화학무기 생산 중단, 사용금지 및 폐기 등에 대한 세계인의 요구가 더욱 거세질 전망이다. 

수장된 화학무기는 일반인들에게도 현실적인 위협으로 다가오고 있다. 이페리트 용기 발견을 보도한 리투아니아 언론사의 인터넷 독자 의견란에는 발트해 해변 대신 해외나 내륙 호수로 여름휴가를 가겠다는 글이 많이 올라와 있다. 화학무기를 제조한 나치 독일이나 이를 경솔하게 바다에 수장한 연합국측에 대한 원망과 분노의 글도 적지 않다. 올 여름 청정해역으로 이름난 발트해를 찾는 피서 인파는 현저하게 줄어들 것이 분명하다. 

* 이 기사는 주간동아 2002 년 6월 27일(340호)자로 이미 보도된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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