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뉴스/최대석[자유기고가] chtaesok@hanmail.net
 
나폴레옹 군대와 러시아 군대가 맹렬한 포격전을 벌였다. 이어진 격렬한 백병전. 백마를 타고 질풍같이 내달리며 전투를 지휘하는 사람은 영락없는 나폴레옹의 모습이었다. 리투아니아 빌뉴스 중심가를 흐르는 네리스강의 넓고 푸른 강변에는 200년 전 나폴레옹 군대의 함성이 다시 울려퍼졌다. "나폴레옹 만세! 프랑스 만세!" 

지난 5월 31일과 6월 1일 빌뉴스에서 각각 열린 나폴레옹 군대 전투 재현과 당시 군인들의 유골 매장식 장면이다. 2001년 11월 빌뉴스 아파트 건축 현장에서 나폴레옹 군대의 유골 약 3,000구가 발굴되면서 일기 시작한 나폴레옹 추모 열기가 이날 절정을 이뤘다. 유럽 각국에서 온 취재진으로 성황을 이뤘고, 이를 계기로 전유럽 통합을 꿈꿨던 나폴레옹에 대한 유럽인의 관심이 새삼 고조되고 있는 것이다. 



추모식 행사 각국서 취재진 몰려 
빌뉴스에는 나치 독일 점령 시대나 소련 치하에서 희생된 자들의 유골이 대거 묻혀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아파트 건축 현장에는 유골과 함께 나폴레옹 얼굴이 찍힌 단추와 주화, 군화 및 군복 조각, 결혼반지, 십자가 등이 함께 발견됨에 따라 이들 유골은 1812년 러시아 침공에 참가한 나폴레옹 군대 군인의 유골로 확인되었다. 

역사학자들은 이 집단 매장지는 최대 규모라고 평하고, 빌뉴스 반경 100㎞에 약 8만 명의 나폴레옹 군대의 군인이 묻혀 있을 것으로 추정한다. 집단 매장지 발굴은 그동안 밝혀지지 않았던 나폴레옹의 러시아 원정 의혹을 풀어주었다. 특히 외부 손상이 없고 잔뜩 웅크린 유골이 많이 발견되면서 혹독한 추위가 원정 실패의 요인이라던 당시 나폴레옹의 주장을 입증해주었다. 

발굴된 유골은 리투아니아의 국가 지도자-독립 영웅-유명인 등이 묻혀 있는 국립묘지 격인 안타칼나스 묘지에 매장됐다. 6월 1일 열린 제막식에는 리투아니아 국가 지도자와 각국 대사와 일반 시민이 대거 참여했다. 프랑스의 나폴레옹 추모단체에서도 50명이 참석했다. 

사각형 묘 주변에는 흰 대리석을 깔고 나폴레옹 군대와 함께 러시아 원정에 참가한 11개국을 의미하는 사각기둥을 세웠다. 리투아니아 국회의장 아르투라스 파울라우스카스는 추모사에서 "우리나라 민요에는 '프랑스인들이 이 땅에 와서 우리를 구해주었네'라는 가사가 있고, 여러 노래에 파리와 몽마르가 등장한다"며 프랑스인에 대한 리투니아인의 오랜 호감을 표현했다. 주 리투아니아 프랑스대사 장 베르나르드 하트는 "다민족으로 구성된 나폴레옹 군대의 군인이 이제 이곳에서 편히 쉴 수 있게 해준 리투아니아 정부에 감사한다"고 말했다. 리투아니아 전 국회의장 비타우타스 란드스베르기스는 "유럽을 재편 통일시키고, 예속된 민족을 해방시키고, 그들에게 통일된 나폴레옹 법전을 주고자 한 나폴레옹의 포부는 역사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고 자신의 견해를 밝혔다. 

유골 매장식 일환으로 거행된 1812년 전투 장면 재현에는 당시 나폴레옹 군대와 러시아 군대가 입었던 군복과 사용했던 무기들로 무장한 400명이 참가했다. 나폴레옹 역할은 러시아 군역사협회장이자 상트페테르부르그 대학교와 파리 소르본 대학교 교수인 올레그 소콜로프가 맡았다. 이 재현 행사에는 리투아니아-폴란드-라트비아-백러시아-우크라이나-러시아에서 온 역사학자 등이 대거 참가했다. 



민요에도 나올 만큼 프랑스에 호감 
어린이와 여성도 등장해 관람객의 눈길을 끌었다. 실제로 나폴레옹 군대에는 여성도 있었다. 모스크바에서 온 타트야나는 "여성은 군인에게 포도주를 주는 일, 사망한 군인의 귀중품을 걷는 일, 부상한 군인을 돌보는 일 등을 했다"며 "러시아에는 역사 재현을 취미로 하는 사람이 아주 많다"고 말했다. 

이들은 6월 1일 유골 매장식을 끝난 후 나폴레옹 군대의 빌뉴스 입성식과 환영식도 재현했다. 빌뉴스에 입성한 후 시청 광장에서 빌뉴스 시장으로부터 상징적인 열쇠를 건네받는 나폴레옹은 "나폴레옹 만세! 프랑스 만세!"를 외쳤다.  

1812년 6월 말에서 12월 말까지 비록 짧은 기간이지만 리투아니아 사람은 이 시대를 프랑스 시대로 부른다. 비록 실현되는 않았지만 리투아니아인에게 이 짧은 시기는 나폴레옹의 도움으로 잃어버린 국가를 재건하고자 하는 희망의 시대로 기술된다. 지난 5월 10~11일 실시된 국민투표에서 유럽연합 가입을 전폭적으로 지지한 리투아니아인에게 나폴레옹이 시도한 유럽통합은 이날 더 큰 의미를 심어주었다. 

러시아 원정군 임시수도 
동유럽의 넓은 영토를 차지하고 있던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국가는 1795년 프러시아-오스트리아-러시아로 각각 분할되어 역사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두 민족은 나폴레옹의 도움으로 국가 재건을 시도했다. 1806년 나폴레옹은 프러시아 원정에 이겨 1807년 바르샤바공국을 세웠다. 1809년 오스트리아를 정복한 나폴레옹은 프랑스를 도운 바르샤바공국의 영토를 더욱 넓혔다. 이로 인해 그 지역에 영향력을 행사하던 러시아와 관계가 악화되었고, 마침내 유럽 대부분을 점령한 나폴레옹은 러시아 원정에 나섰다. 

1812년 6월 24일 나폴레옹은 50만 명의 대군을 직접 이끌고 국경선인 리투아니아 카우나스 네무나스강을 건넜다. 빌뉴스에 도착한 나폴레옹은 7월 1일 리투아니아대공국을 수립했다. 리투아니아인은 나폴레옹 군대를 해방군으로 극진히 맞았고 군대를 조직해 나폴레옹의 모스크바 진격을 지원했다. 나폴레옹은 이 원정 중 빌뉴스를 임시 수도로 선정했고, 이곳에 프랑스 국무장관을 상주시켰다. 나폴레옹 군대는 행진해 계속해 9월 14일 모스크바에 도달했다. 

러시아 군대는 주로 전략전인 후퇴 및 방어작전을 펴면서 측면 공격으로 맞섰다. 또 미리 마을과 도시에 불을 지르고 땅을 황폐화시켜 나폴레옹의 주된 원정 전략인 현지 보급을 불가능하게 했다. 모스크바에 도착한 나폴레옹 군대는 황폐한 도시에서 피곤-배고픔-화재-다가오는 추위 등으로 많은 고통을 겪었다. 5주 동안 모스크바에 머물면서 평화협정 체결을 고대한 나폴레옹은 성과가 없자 퇴각을 명령했다. 

러시아 군대는 지쳐 퇴각하는 나폴레옹 군대를 후방과 측면 공격해 엄청난 손실을 입혔다. 50만 명으로 출발한 군대가 12월 빌뉴스로 돌아왔을 때는 5만 명밖에 되지 않았다. 이들은 영하 30도의 추위-부상-질병-배고픔으로 등으로 수없이 죽어갔다. 이 원정에서 살아남은 자는 1만 명에 불과했다. 

이때 죽은 군인의 유골에 대해서는 뚜렷한 증거가 없었다. 기록에 의하면 러시아 군대가 나폴레옹 군대를 뒤쫓아 빌뉴스에 들어왔을 때 곳곳에 널려 있는 시체 처리가 가장 큰 골칫거리였다. 언 땅을 팔 남자가 부족했다. 처음에는 시체를 태웠지만 악취와 연기를 견딜 수가 없어 이를 중지했다. 

* 이 기사는 뉴스메이커 제530호 2003년 6월 27일자로 이미 보도된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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