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인 ‘지우네 스기하라’탄생 100주년을 기념하는 행사가 최근 리투아니아 수도 빌뉴스에 성대하게 열렸다. 스기하라는 제2차 세계대전 중 수천명의 유대인들에게 일본 통과사증을 발급해 이들의 목숨을 구했다. 수 많은 유대인들을 나치로부터 구해낸 독일인 산업가 오스카 쉰들러에 견주어 '일본의 쉰들러'로 알려진 스기하라는 1900년에 태어나 1986년에 사망했다. 쉰들러 부부의 유대인 구조활동은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이 '쉰들러 리스트'로 영화화해 오스카상을 수상하는 등 큰 인기를 끌었었다. 

[사진설명]-(위)기념식수를 하는 미망인 유키코 스기하라, 리투아니아 대통령 발다스 아담쿠스, 일본대사, 리투아니아 외무부장관(앞줄 왼쪽으로부터)
/ 빌뉴스 스기하라기념비와 갓 심어진 벚꽃나무 

지난 10월 2일 빌뉴스를 동서로 가르는 네리스강(江) '발타스 틸타스'(흰 다리라는 뜻) 부근 경관 좋은 언덕에 열린 이 행사에는 리투아니아 대통령 발다스 아담쿠스, 일본 대사 쇼헤이 나이토, 스기하라 미망인 유키코 스기하라(88세), 와세다대학교 관계자 등 200여명에 이르는 일본의 정치인과 예술인, 리투아니아의 정치인과 학생들이 참여했다. 이들은 리투아니아어, 일본어, 영어로 쓰여진 약력과 함께 스기하라 기념비를 제막했고, 그 주변에 100그루의 벚꽃나무를 심었다. 

"리투아니아와 일본에 있어 나무에 대한 존경은 인간애와 문명의 보편적 가치에 대한 존경처럼 지대하다. 리투아니아에 심어지는 이 일본 나무들의 뿌리는 두 나라 국민간 친선을 더욱 강화하는 데 도울 것이다"라고 아담쿠스 대통령은 축사를 하였고, "스기하라의 영웅적인 행동은 61년 전 유대인을 구했을 뿐만 아니라 리투아니아와 일본간 우호관계를 위한 토대를 마련해주었다"라고 나이토 대사는 말했다. 

이 벚꽃나무는 일본 북부지방에서 직접 가져온 것이었다. 원래 280그루가 도착할 예정이었으나, 동경에서 코펜하겐으로 운송되는 과정에서 나머지는 유실되었고, 108그루만 무사히 도착했다. 

스기하라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는 이 벚꽃나무는 스기하라 기념비 부근뿐만 아니라 그의 이름을 딴 거리, 그가 거주하며 근무했던 카우나스(리투아니아 제2의 도시, 당시 리투아니아 임시 수도) 옛 일본영사관 정원, 리투아니아 대통령궁 정원, 텔세이 일본정원 등에 심어졌다. 이로써 빌뉴스는 유럽에서 오스트리아 빈, 독일 베를린에 이어 일본 벚꽃나무 공원이 조성된 세 번째 도시가 되었다. 

기념식이 끝날 무렵 일본 학교와 자매결연을 맺은 리투아니아 학생들이 '행복의 새' 종이학이 달린 오색 풍선 100개를 가을 하늘로 날렸다. 이어 식수(植樹)를 마치자 하늘에는 유르기스 카이리스가 일본 음악에 맞춰 절묘하고도 환상적인 묘기 비행을 연출했다. 

그는 지난 해 일본에서 열린 세계묘기비행대회에서 우승을 해 일본인들에게 널리 알려진 인물. 빌뉴스 로투쉐(구시청건물)에는 일본에서 가져온 대형 아름다운 벚꽃사진들과 종이 접기 작품들이 전시되었고, 저녁에는 경축 폭죽이 터트려졌다. 

1939년 8월 나치독일과 소련이 상호불가침의 이름 아래 동유럽에서의 영향권 행사를 분명히 하기 위해 몰로토프-리벤트로프 조약(1939)을 체결했다. 그 해 9월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하자 독일의 영향권에 놓여 있던 리투아니아는 독일의 폴란드 공격에 참가하기를 거부했다. 이에 리투아니아는 소련의 영향권으로 편입되었고, 1940년 소련은 군대로 리투아니아를 점령하여 소비에트화를 시작했다. 

이 격변의 시기인 1939에서 1940년 스기하라는 리투아니아 일본영사관 부영사로 근무했다. 독일 나치의 대학살에 공포를 느낀 리투아니아, 폴란드 심지어 독일 출신 유대인들은 일본 영사관으로 몰려갔다. 그 당시 소련은 일본의 사증을 받으면 자국을 통과시키겠다고 했다. 

영사관 밖에서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어진 얼굴로 두려움에 떨며 기다리고 있는 수 많은 유대인들을 바라보면서 스기하라는 깊은 고민에 빠졌다. 본국 정부에 사증 발급 허가를 요청하는 전보를 쳤고, 독일과 동맹을 맺은 일본 정부는 사증을 발급하지 말라는 지시를 했다. 

하지만 스기하라는 이 훈령을 무시하고 양심의 소리에 따라 유대인들에게 약 6,000개의 통과사증을 발급했다. 이 스기하라의 '생명의 사증' 덕분에 많은 유대인들은 소련과 일본을 거쳐 제3국으로 안전하게 피난할 수 있었다. 

1941년 독일은 리투아니아를 침공해 1944년까지 리투아니아 총 유대인수의 95%인 약 25만명을 학살했다. 빌뉴스에서 남쪽으로 10km 떨어진 파네레이에서 나치는 1941-1944년에 약 10만명을 대량학살했고, 이 중 7만명이 유대인이었다. 이로써 유대인은 세계에서 가장 주목할만한 유대인 공동체 하나를 잃게 되었다. 

이후 리투아니아는 빌뉴스의 한 거리를 지우네 스기하라로 이름지었고, 그가 살았던 옛 일본영사관을 스기하라기념관으로 운영하고 있으며, 10월 2일에는 스기하라 기념우표를 발행하는 등 스기하라의 용감한 인도적인 행동에 깊은 감명과 경의를 표하고 있다. 

또한 그의 행동은 오늘날 리투아니아인들이 일본과 일본인에 대한 우호적인 태도를 갖는 데 큰 계기를 마련해주었다. 특히 올해는 일본이 소련으로부터의 리투아니아 독립을 인정하고 외교관계를 맺은 지 10년이 되는 해로 더욱 의미가 깊었다. 

1947년 일본으로 귀국한 그는 '훈령위반'으로 해임되었고, 오랫동안 그의 유대인 구원 행적은 일본 국민들 사이에선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다만 이것을 우익 단체들이 일본은 제2차 대전 때 유대인을 도왔다"며 자신들의 과거를 왜곡하는데 이용했다. 마침내 스기하라는 탄생 100주년을 맞아 지난 해 명예를 회복했다. 

일본 정부는 지난 해 10월 10일 그의 삶을 기리는 조촐한 기념식을 열었고, 도쿄 외교사료관에 스기하라씨의 공적을 기리는 현판을 세웠다. 전쟁이라는 극한 상황에서 국가와 민족에 관계없이 인간을 구한 스기하라의 용기 있는 인도적 행동은 오늘날 시대에도 소중한 귀감이 되어야 할 것이다. 

* 이 기사는 하니리포터 2001년 10월 25일자로 이미 보도된 내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