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모음2012. 3. 28. 04:44

우리나라 서울에서 열린 '2012 핵안보정상회의'에 생소한 리투아니아의 국가수반 달랴 그리바우스카이테 대통령이 참가했다. 북동유럽의 작은 나라 리투아니아가 왜 핵과 관련한 정상회의에 참가했을까?  

* 사진출처 source: president.lt

2009년까지 리투아니아는 세계 최강으로 알려진 원자력발전소을 보유하고 있었다. 유럽연합 가입 조건으로 부득이하게 이 원자력발전소 가동을 중지해야만 했다. 원자력발전소 사상 최악의 사고로 기록된 체르노빌 원자로와 동일한 RBMK 노형이기 때문이다. 

이 발전소 폐쇄로 리투아니아는 전력수출국에서 수입국으로 전락했다. 현재 리투아니아 정부는 같은 장소에 새로운 원자력발전소 건설을 추진하고 있다. 한국이 우선 입찰국의 지위까지 얻었으나 막판에 포기한 것이 아쉬움으로 남는다.  

아래는 여수 세계박람회 리투아니아 홍보 잡지에 실린 "리투아니아는 어떤 나라인가?"라는 글이다. 생소한 리투아니아에 대한 좀 더 이해하길 바라는 뜻으로 소개한다.  

1. 니다 미술가 마을 
니다 미술가 마을은 발트해 연안에 최초로 조성된 마을 중 하나이다. 19세기 후반기에 작가들이 멀리 떨어져 있는 작은 어촌 니다를 발견했다. 이들에 미술가들도 더해졌다. 19세기 말 쾨니히스베르크 예술대학 교수들과 이들의 학생들이 여름에 니다를 방문하기 시작했다. 로비스 코린트(Lovis Corinth, 1858~1925)는 대학 시절(1876~1879) 쿠로니안 곶을 방문했고, 1880년 후에 다시 여기로 돌아왔다. 구세프에서 태어난 화가 겸 시인 하인리흐 크류커(Heinrich Krüger, 1863~1901)는 쾨니히스베르크 예술대학 졸업생 에른스트 비쇼프쿨름(Ernst Bischoff-Culm, 1870~1917)을 1888년 무렵 니다로 초청했고, 비쇼프쿨름은 니다 미술가 마을을 형성하는 데 가장 큰 영향을 끼쳤다. 미술가들은 1867년 스크루즈디네에 세워진 헤르만블로데 호텔에 체류하곤 했고, 이 호텔은 세월과 함께 미술가 마을의 중심이 되었다.

2. 발견되고 미발견된 리투아니아
리투아니아에서 가장 많이 방문하고 원하는 곳은 유네스코 세계 유산 목록에 등재된 구 시가지로 유명한 수도 빌뉴스, 호수 안 중세 시대 성을 가진 옛 수도 트라카이, 리투아니아에서 가장 큰 두 강(네무나스와 네리스)이 만나는 지점에 위치한 양차 대전 사이 임시 수도 카우나스다. 발트해와 쿠로니안 만 사이에 있는 멋진 아름다움의 곶인 유네스코 유산 목록에도 등재된 쿠로니안 곶(쿠르슈네리야) , 십자가 언덕, 소련 조각 공원도 모든 방문자를 매료시킨다. 
방문이 적은 곳에 대한 관심이 최근 증가하고 있지만, 남아 있는 정통 귀족 저택, 희귀한 박물관, 멋진 자연 경관지, 활동적인 휴가 노선 등이 보다 덜 아름답고 흥미로운 곳은 아니다.

3. 갈매기는 날려고 태어난다
댄스스포츠 클럽 주베드라(Žuvėdra, 갈매기)는 리투아니아뿐만 아니라 국경 넘어 멀리까지 알려져 있다. 리투아니아에서든 해외 국가에서든 공연하는 동안 주베드라는 수많은 박수를 받는다. 관람석에 서있는 구경꾼들은 “훌륭해, 훌륭해……”를 자주 외친다.
클라이페다 대학교 댄스스포츠단 주베드라는 일곱 차례나 각각 유럽 챔피언과 세계 챔피언 자리를 차지했다. 클라이페다 대학교 예술대학 댄스스포츠학과 스카이스투테 이젤레비치에네(Skaistutė Idzelevičienė) 교수와 로무알다스 이젤레비츄스(Romualdas Idzelevičius) 교수가 댄스스포츠 전문가들을 훈련시키고 있다. 주베드라 앙상블의 기반은 대학생들이다.  
 
4. 세계박람회에서 리투아니아 사람들은 독특하고 흥미롭다
리투아니아는 세계박람회에서 늘 주목할 만한 참가국이었다. 나라가 점령되었을 때도 리투아니아 이름은 위대한 독립 국가들 사이에 언급되었다. 독립을 회복한 발트 삼국에서 가장 큰 나라는 세계박람회에 항상 참가해왔다. 세계에 리투아니아 소개하기는 리투아니아 모습 그 자체처럼 매번 변했다.
1900 파리세계박람회 민속관에 이미 리투아니아 진열대를 찾아볼 수 있었다. 심지어 독립 선언까지는 아직 18년이나 남아있었다. 

5. 네링가는 유럽의 함유물
네링가는 리투아니아와 유럽에서 희귀한 모래 지대이다. 이는 피곤한 사람들을 위한 휴식의 오아시스이다. 네링가가 비록 1961년 세워졌지만, 쿠로니안 만과 발트해가 씻어주는 도시의 역사는 거인들이 살았던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전설에 따르면 마음씨 착한 거인녀 네링가가  현지 어부들을 위해 성난 바다 괴물들로부터 안전한 피난처를 만들면서 쿠로니안 반도를 쏟아부었다고 한다.
수세기 동안 이 전설은 여기에서 살고, 일하고, 창작하는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고, 이들은 조심성, 강하고 단련된 성격, 신뢰성과 환대로 구별된다. 특별한 자유와 평온과 휴식의 분위기가 낯설지 않은 사람들은 휴가를 위해 이 해변 휴양지를 선택할 것이다. 네링가는 희귀한 자연과 독특한 문화를 가진 우수한 휴식처이다. 이 지역은 일상과 도시 소음에 지친 사람을 위한 확실한 재충전소이다.

6. 클라이페다는 바다 옆 도시
바다축제 조직과 범선 도착은 클라이페다 도시 이미지와  해양 전통 육성의 매우 중요한 부분이다. 이런 행사 중 가장 유명한 행사인 권위 있는 세계범선경주대회가 클라이페다에 벌써 두 차례나 열렸다. 국제항해훈련협회와 협력으로 조직된 2009 발트범선경주대회는 리투아니아 이름 1000주년 기념의 가장 빛나는 중점적인 요소 중 하나이자 가장 규모가 큰 국제 행사가 되었다. 클라이페다 항구 역사상 처음으로 29개국에서 100척의 역사적인 범선이 도착했다.

7. 발트해에 대한 책임을 느낀다
‘살아있는 바다, 숨쉬는 연안’이 주제인 2012 여수세계박람회에서 리투아니아는 해양 국가로 소개되고, 바다 옆 존재(구체적으로 발트해가 리투아니아 연안을 씻고 있다)는 바다가 제공하는 가능성뿐만 아니라 동시에 바다 상태에 대한 그 나라에 주어진 적지 않은 책임이다. 
발트해는 세계에서 가장 어린 바다 중 하나로 매우 독특한 생태계를 가지고 있다. 이 바다는 아마도 지구에서 가장 큰 반염수 중 하나이다. 이는 대서양 유역에 속하는 북유럽 바다가 대륙에 깊숙이 침투한 것이다. 서쪽에는 스칸디나비아와 윌란 반도와 섬이 발트해와 대서양을 분리한다. 발트해는 외레순, 스토레벨트, 릴레벨트와 마지막으로 카테가트 해협을 통해 북해와 연결된다. 

8. 배 깃발이 국가 이미지를 만든다
세계 대양을 항해하는 배에 펄럭이는 국기는 그 국가 이미지를 만든다. 비록 세계화가 배에 새로운 깃발을 게양했을지라도, 다양한 화물을 운반하는 배와 페리는 리투아니아 깃발을 달고 여전히 바다와 대양을 가르고 있다. 
“국가가 선단을 가진다면 그런 나라는 해양 국가로 불릴 수 있고 그 국가가 집행하는 경제 정책은 대부분 해양 사업에 우호적이다는 것을 의미한다.”라고 리투아니아선주협회 비타우타스 리그누가리스(Vytautas Lygnugaris) 이사장이 말했다.

9. 리투아니아 도로
리투아니아 국도는 경제 발전의 가장 중요한 부분 중 하나이다. 리투아니아는 성공적으로 국도를 확장하고, 또한 생산적으로 국제 운송 사업에 참가하는 경유국으로 유명하다. 유럽 연합에 가입한 리투아니아에게 도로 기반시설 확충, 신 도로와 고가교 건설과 구 도로 개축을 위한 새로운 가능성이 열렸다.
한 해의 다른 때에 리투아니아 도로를 타본 여행객들은 알아보지 못하는 같은 경관과 도로에 깜짝 놀랄 수 있다. 여름철과 겨울철에 차 문을 통해 보이는 광경은 다르다. 또한 경관 미와 도로 상태도 변하고 있다.

10. 작지만 현명하다
인터넷 통신이 가장 빠르고, 국제 운송 도로의 교차로에 자리잡고, 지역에서 가장 효과적으로 기능하는 항구와 4개의 공항을 가진 나라는 자기 혁신으로 수출 시장을 정복하고 있다. 인구 300만명이 조금 넘는 발트 국가 리투아니아는 투자 지도에서 눈에 확 띄는 지점이다.      
전국에 도입해 운영 중인 최신 대화형 응답 기술(EDGE 기술, 3세대와 4세대 이동 통신 등) 외에도 인터넷 통신 속도는 리투아니아가 선두이고, 인터넷 망에 자료 올리기 속도는 세계 2위이다. 게다가 인구 300만명이 조금 넘는 나라에 이동 통신 보급(147%)은 유럽 연합에서 가장 높고, 거주자 100명당 이동 통신 가입자수는 세계 1위이다.

11. 작은 나라에서 과학 대양까지
위험에 대한 의심과 느낌이 바다에 대한 리투아니아 사람들의 관계에 항상 뒤따랐다. 이교도 리투아니아 신화에서 바다는 악마의 요람지이자 악마의 소굴 자체였고, 육지는 신이 보호하고 보살피는 안전한 천국이었다. 역사적으로 바이킹이 마을을 급습했고, 후에 독일 기사단 침략자들이 리투아니아 해안을 따라 첫 외국인 요새를 건설했다. 북쪽 이웃인 라트비아 사람들과 에스토니아 사람들과는 대조적으로 바다는 재산과 유용의 견지에서 리투아니아 사람들에게 많이 중요하지 않았다. 현대 시민들에게조차 바다는 여전히 주로 여름 휴가나 여가로 연상된다. 이는 유럽에서 가장 짧은 해안선 중 하나인 90km 밖에 가지고 있지 않은 작은 나라에게는 아마 놀랄 일 아니다.


Posted by 초유스